탈북민 오영화 전도사(청주 우암교회)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에 진행되는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모임’에서 3일 탈북민 오영화 전도사(청주 우암교회)가 간증을 했다. ©에스더기도운동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에 진행되는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모임’ 3일 순서에선 탈북민 오영화 전도사(청주 우암교회)가 종 되었던 애굽땅에서 인도해주셔서 회복시키시고 귀한 사명을 주신 하나님에 관해 전했다.

오 전도사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 후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마음속에 늘 가족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들어주지 않으시면서 딸의 앞날을 걱정해 전문학교라도 보내려는 아버지가 가식적으로 보이고 원망스러워 군 농촌경영위원회를 찾아가서 농촌파견장을 받아왔다. 북한의 농장원은 결혼 상대로도 무시당할 정도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이런 농촌파견장을 받아왔으니 가족들은 할 말을 잃었다”며 “그날부터 평생 잊을 수 없는 눈물과 고통의 아픔들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어 “키 140도 안 되는 몸으로 삽자루, 이가 빠진 낫, 부실한 곡괭이, 도끼를 들고 1년 12달 전투상황인 농촌에서 출퇴근 시간도 따로 없이 날이 밝으면 일하러 가야 했고, 중요 전투 기간엔 식전작업, 야간작업이 필수였다. 작업반마다 한두 대 있는 기계는 기름 부족에 잦은 고장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비료가 귀하기에 적은 양의 비료를 물에 타서 사람이 물 배낭을 매고 직접 뿌렸다. 농약도 귀해 흙과 섞어 사람이 직접 뿌렸다. 비료 물에 다리가 젖고 마르고 반복하다 보니 다리 결이 다 찢어져서 피가 났다. 밤마다 다리가 아파서 울고 어린 나이에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 억울하고 분해서 울다가 잠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이어 “가족 없이 혼자 힘으로 당일꾼의 눈에 들려면 두 배로 노력해야 했기에 남들보다 적어도 10분 더 일찍 나가고 10분 더 일했다. 4년의 세월이 지나 농장에서도 청년 모임에서도 다소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고생은 가족들이 내 꿈을 이뤄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가족에게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21살 되던 어느날 아버지가 심장판막으로 돌아가셨다. 당시 집 상황이 남의 집 창고를 빌려서 쓰는 상황이었다. 남의 집에서 돌아가셨기에 울 수도 없었고, 남의 집에서 장례식을 치를 수도 없어 아버지 시신을 다시 외삼촌 댁에 모시고 장례식을 치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달이 지나 김일성이 죽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고, 오빠는 당에 충성하며 보답해야 한다며 집안 모든 물건을 팔아서 군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오 전도사는 “이듬해 농약 중독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증상이 없어지니 임산부처럼 배가 불러왔고, 병원에선 간 복수라고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다. 한국에 와서 검사를 받고 영양실조란 걸 알게 되었지만 당시엔 어린 나이에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펐다. 가족한테 따뜻함을 받고 싶었고 안식하고 싶었는데 아가씨가 임신했다고 오해할까 봐, 아빠가 돌아가신 지 3년도 안 되어 초상을 치를까봐 쉬쉬하는 눈치에 또 한 번 상처를 받았다. 밤낮으로 충성했던 농장의 당일꾼도 매일 찾아와서 위로가 아닌 일하러 오지 않는다고 욕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같이 산에 가자고 하더니 소나무에 밧줄을 묶고 같이 죽자고 했다. 그렇게 이 세상이 싫고 죽고 싶었는데 엄마가 죽자고 하니 무서워서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목놓아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모녀가 부둥켜안고 울고 내려왔다”고 했다.

이어 “당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고, 기숙사 생활하던 언니도 전염병에 영양실조까지 걸려 회사에서 쫓겨났다. 오빠는 가족들이 죽을까봐 사채를 빌려 엄마와 막내를 데리고 장사를 하러 갔고 그동안 나는 아픈 몸으로 언니를 돌보며 나물을 뜯고 나무를 하며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사기를 당해 돌아온 오빠는 스트레스로 오자마자 나를 때렸다”고 했다.

이어 “중국 가서 설거지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사기를 당해 심란한 엄마를 생각하며 빵 장사라도 할 수 있는 돈을 벌어오려고 했다. 아저씨들을 믿고 장대비를 맞으며 압록강을 건너 연길의 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는 집에 도착했다. 그날 밤 안전 때문이라며 창고에 우리를 가두고 문을 잠갔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면서 잡혀가면 가족들까지 총살당하니 숨소리도 내지 말라고 했다. 알고 보니 중국 돈 백 원을 받고 팔린 것이었다. 25살의 나는 사람이 아닌 물건이 되어 팔려 다니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날 산 사람은 50대 조선족 아저씨였고, 다음날 60대 한족에게 날 팔려고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음 날 새벽 화장실에 가는데 한 할머니를 만나 내복 바람으로 할머니의 안방으로 짐승 우리로 숨었다가 나를 쫓는 조선족 아저씨를 피해 다른 동네로 또 다른 동네로 도망갔다”고 했다.

이어 “가정부로 일하게 된 조선족 집에선 엄청난 무시와 멸시를 받다가 4년째 될 때 도망쳐 나왔다. 탈북민인 걸 숨기고 식당을 전전하며 일하다가 탈북민인 걸 눈치챈 것 같으면 그동안 일한 돈도 받지 않고 도망쳐 나왔다. 탈북자라는 것 때문에 눈치 보고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생이별하고, 말도 글도 모르는 남의 땅에서 북한이라는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죄 아닌 죄로 가는 곳마다 설움과 폭행과 무시를 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니 견딜 수 없어 두 번의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날 한국에 가면 자유를 준다는 브로커의 말에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중국 여러 도시와 여러 나라를 거쳐 자유를 맛보려고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 사회로 나왔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자유가 뭔지 모르겠고, 외롭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누구 하나 말 걸어주는 사람이 없는 외로움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오 전도사는 “그러다가 바로 집 앞에 교회가 있는 걸 보고 사람이 그리워 찾아갔다. 토요일이었는데 목사님은 외출 중이셨고, 집사님 세 분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대화에 끼워주지 않아서 교회 밖을 나와 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그때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입은 분이 교회로 들어가는 걸 보고 목사님이란 생각에 따라 들어가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껏 무시당하고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기에 얌전히 말하면 무시당할까봐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목사님은 돌아서더니 두 손으로 정중하게 의자를 권해주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동안 목사님은 당 간부 같은 분이라고 생각했기에 이야기를 안 들어주실까봐 강하게 하려고 했는데 기가 죽어서 목사님을 쳐다도 못 보고 내일 예배에 나와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와도 된다는 말에 흥분되어서 밤새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이어 “목사님은 예배 광고 시간에 저를 탈북민으로 소개하고 많은 관심과 사랑 기도를 부탁했다. 예배가 끝나니 사람들이 저를 안아주며 사랑해요 축복해요 라고 하는데 너무 어색하고 불편했다. 내 부모도 나를 사랑한다고 한 적 없기에 사기라고 생각했지만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게 저는 당신을 믿지 않지만 이 사람들만은 저를 팔지도 배신하지도 억울한 누명을 씌우지도 않고 나를 좋아하고 내 옆에서 떠나가지만 않게 해주신다면 저도 참고 있겠다고 마음속의 말을 했다. 거짓이라도 좋으니 관심과 사랑이 좋아서 주일예배를 빠지지 않고 매일 나갔다”고 했다.

이어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언제 사랑을 알게 될지, 얼굴에 그늘이 없어지게 될지 날 위해 사모님이 우셨다는 말에 견딜 수가 없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었다. 십자가 밑에 신발을 벗고 철퍼덕 앉아서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사랑도 못 받아봤는데 누군가가 날 사랑한다면서 나 때문에 울고 있는 게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다. 왜 항상 나는 악역이고,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가 나를 불쌍히 여겨야 하냐면서 울기 시작했는데 중국에서 받아왔던 천대, 폭행, 억울함, 모든 감정이 다 드러나며 통곡하며 울었다. 한참 울다가 힘이 빠져 철퍼덕 앉아있는데 살며시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고 ‘많이 힘들지 내가 다 안다. 내가 함께 할게’라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서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인 것을 알게 해주신 것이었다”고 했다.

오 전도사는 이후 하나님이 만지시고 치유해주시고 회복해 주셨다고 간증했다. “빛이 임하니까 내 안에 어둠이 떠나가면서 내 안의 의심, 분노, 우울증 등이 다 드러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사역자들을 통해서 나를 치유해주시고 회복해주셨다. 치유받는 과정이 자존심도 상하고 수치스럽고 억울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워 딸의 손을 잡고 도망가기도 했었다. 도망친 자리에 찾아오셔서 제가 주님의 것임을 확인해주시며 주님을 믿고 주님이 원하는 자리로 가자고 인도하셨다. 그렇게 돌아오니 용서라는 단어를 보여주셨다. 나를 중국에 팔아넘긴 브로커, 폭력을 가한 사람, 억울하게 했던 사람, 공안에 신고했던 사람, 나를 폭행했던 오빠, 나를 존중하지 않았던 아빠 엄마에 대한 죄책감 등 어렵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용서했다. 하지만 또 용서해야 하는 한 가정을 보여주셔서 언제나 나와 함께하신다면서 다 용서했는데 한 번쯤은 내 편을 들어주실 수도 있지 않냐고 하나님께 소리를 질렀다. 그때 주님의 ‘ 딸아 진정한 용서란 나의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내가 허락한 특권이란다’라는 잠잠한 말씀 앞에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울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한다고 곳곳에 써서 붙이고 선포하며 살았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노력한 끝에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 후 제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북한을 향한 주님의 아픈 마음을 알게 해 주시면서 내 입술에서 좁은 길이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그곳에 가겠다는 고백을 드리게 하셨다. 이 고백을 드린 때는 카자흐스탄에서 선교하고 있을 때였다. 그 땅에서 하나님은 대한민국이 얼마나 축복받은 땅인지 보여주셨다. 한 나라가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그 나라에 자원이 얼마나 많으며 많은 인구가 살며 땅덩어리가 넓은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복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르심 앞에 순종하는지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다”고 했다.

오 전도사는 “저는 주님의 나라 사역자이고 살아계신 에수님의 증인이다. 그래서 사역자가 해야 할 것, 있어야 할 곳, 증인으로서 보고 듣고 체험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날마다 알아가고 있다. 나는 인간이기에 얼마든지 넘어지고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지키고 있는 것은 넘어져도 세상이 아닌 주님 안에서 넘어져야 아버지가 내신 그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하나님께 ‘제 삶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백드린 적이 있다. 그때 주님께선 실수해서 나를 낳은 것도 아니고, 실수해서 이곳까지 인도한 것이 아니라고 응답하셨다.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 된 제 삶은 늘 기쁨과 축복의 삶이고, 생명의 길로 끊임없이 나를 내려놓으며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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