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은 박사
박상은 박사

우리는 임신과 낙태를 생각할 때 여성의 자기 결정권만을 떠올리게 된다. 생부(生父)인 남성의 자기 결정에 따른 책임에 관해서는 최근에 와서야 논의가 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태아의 자기 결정권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도 말하고 있지 않다. 과연 태아의 자기 결정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태아는 우리나라 형법과 민법에 인간생명체의 주체로서 유산상속의 자격을 가지며 사회구성원으로서 헌법이 보장하는 보호의 대상이다. 어쩌면 태아는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하는 가장 연약한 인간의 생명으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다.

생명윤리의 4대 원칙 중 가장 우선되는 첫째 원칙이 자율성 존중의 원칙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과 건강에 있어서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물론 충분한 정보를 주고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본인이 판단을 내려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주체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90년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신애 사건'이다. 당시 12세였던 피해자 김신애 양은 상대적으로 완치율이 높은 종류의 소아암에 걸렸으나, 사이비종교에 심취한 부모가 기도로써 치료할 수 있다는 잘못된 종교적 맹신으로 딸을 방치했다. 뒤늦게 신고를 받은 경찰이 부모로부터 보호자의 자격을 빼앗아 치료를 받게 했지만, 신애 양은 3년 뒤 결국 사망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아이에게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는 부모에게 더 이상 부모의 자격을 주지 않고 그 마을의 목사님에게 보호자의 자격을 부여해 치료받게 했으며, 2000년 국회에서 아동보호법을 개정했다. 신애 양에게 최선의 선택을 주려는 자만이 보호자의 자격을 얻게 되고 미성년자를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 것이 바로 자율성 존중의 원칙이다.

마찬가지로 태아는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야 하는데 이때 태아에게 최선의 선택을 취하려고 하는 자만이 보호자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태아를 가장 먼저 지켜내야 할 부모가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힌 신애 양의 부모처럼 아이를 살해할 결심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사회는 부모로부터 보호자의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

법은 사회안전망의 최후 보루로서 개별적인 가족이 할 수 없는 경우 사회공동체가 책임을 가지고 개입하는 것으로 약자에게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 고려하여 정의와 사랑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부모가 낙태를 결심하게 되는 순간 이미 보호자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봐야 한다. 보호하려는 의도가 없는 자가 어찌 보호자가 될 수 있겠는가?

임신은 세 명의 독립된 개체가 함께 참여하는 관계성을 가진다. 남성과 여성은 주체적이고도 능동적으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스스로 자기 결정을 행사한 데 반해, 태아는 그 결과로 생성된 수동적인 객체로서의 생명체이다. 낙태는 자신들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해 임신을 원상으로 되돌리려는 행위인데, 이때 어머니인 여성과 독립된 개체인 태아가 주체로 등장하며 아버지인 남성은 오히려 객체로 밀려나게 된다.

임신을 지속하는 경우 남성은 양육에 대한 재정적 부담을 떠안지만, 여성은 임신과 출산의 육체적 고통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낙태로 이어질 경우 태아는 재정이나 고통과 불편함을 넘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아야 한다. 세 명의 스테이크홀더 중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태아인 셈이다. 그렇기에 낙태의 결정은 가장 큰 피해를 입을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하며 이를 고려하는 것이 진정한 자율성존중의 원칙이다.

지적 장애인이나 미성년자를 위한 결정에 있어서 보호자가 그들에게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 고려해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낙태를 고려할 때 태아에게 가장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인도주의적 결정일 것이다.

박상은 박사(샘병원 미션원장, 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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