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식 목사
김창식 목사 ©미주 기독일보

1950년 7월 말경에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인민군으로 끌려갔다. 인민군복을 입고 기차를 타고 남으로 달려 내려오던 중 UN군 제트기 4대가 나타나 융단폭격을 수차례 가하였다. 졸지에 나는 바로 앞에 나의 키 두 배나 깊은 계곡이 있어 머리만 안 맞으면 살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에 양 팔을 쭉 뻗고 뛰어내렸다, 순간 나는 죽었다, 잠시 후 정신이 들기 시작하여 손, 발을 만져보고 꼬집어도 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팔이 부러지던가 아니면 어디 상처라도 있을 것인데 손가락 하나도 다친 데가 없었다. "할 렐 루 야"

이때에는 이미 서울은 물론이고 남한 거의 다 빼앗기고 끝자락의 포항 대구 부산만 남아 있을 때이다. 폭격의 화를 면한 나와 다른 6명은 죽기를 각오하고 도망을 쳐 계룡산에 숨어 있던 중 그(1950)해 9월 한국 날짜 14일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뒤 바뀌어 공산군들은 후퇴를 하고, 38선 남쪽에까지 내려온 인민군(약 5만 명 정부발표) 포로가 되고, 숨어 있던 나의 일행 7명도 UN군에 포로가 되어 73수용소에 수감되었다.

73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공산군 장교 포로들이 너무너무 악독했다. 낮에는 유엔기가 게양되어 있는데 오후 6시가 되면 수백 명이 연병장에 나와 유엔 깃발을 내리고 인민 공화국 기를 계양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도하에 공산당 세계가 된다. 그들은 수용소가 떠나갈 정도의 호령과 구호, 그리고 북한군 군가를 부르게 했고 훈련도 시켰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에도 그 안에 교회가 있어 직원 11명(신학교 출신)과 찬양대원 16명 도합 27명이 교회를 사수하고 있었는데 나도 찬양대 한 멤버였다.

1950년 12월 23일 밤중에 공산당 두목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우익 책임자 4명을 죽였다. 각 천막 안에 있는 우익들을 몽둥이로 때려 유혈이 낭자한 채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73수용소에 있는 우익들의 가슴을 찢어지게 하였다, 사실 그들의 주목표는 교회였다. 그러나 교회는 바로 정문 안에 있고 정문에는 유엔군 보초가 있었다. 그들은 먼저 텐트에서 우익들을 죽이고, 교회로 돌격해 오다가 유엔군 보초에게 발각이 되었다. 보초는 비상벨을 울리며 호루라기를 불어 대는 바람에 두목들은 줄행랑을 쳤고, 교회 27명은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보호를 받았다.

며칠 동안이나 잠을 못 자며 시달리던 차라 보초 서는 유엔군을 믿고 모두 곯아떨어져 있는데 유엔군들이 들어와 구두 발로 막 차며 깨우는 바람에 벌떡 일어나 소리를 들으니 몽둥이로 얻어맞은 포로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울부짖던 소리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귓가를 맴돌고 있다! 그 후에 이 소리가 수시로 들려서 몇 번이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왜 또 살려 주셨습니까? 폭격에서는 손가락 하나 상하지 않게 보호해 주셨고 오늘은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게 보호해 주십니까? 순간 분명히 "너 쓸려고!"라는 음성을 듣고 "나는 주의 길을 가리라" 굳게 굳게 결심을 하였고, 그 후부터 오늘까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무릎을 꿇고 기도할 것이다.

날이 밝아 성탄 전날이 되었다. 옥호열 군목을 통해 만국기를 구입하여 밤을 지새우며 유엔군 깃발을 중심 동, 서, 남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만국기를 계양하였다. 때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두 시가 되었나 보다, 모두 눈을 부치려고 천막에 들어가 눕자 즉시 모두 곯아떨어졌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거리다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아갔다. 크리스마스이브 이건만 거제도의 겨울밤은 맑았다. 반짝이는 별들 아래서 나는 고향 생각에 깊이 잠겼다. 그때 멀리서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들렸다. "천사들의 노래가 하늘에서 들리니 산과 뜰이 기뻐서 메아리 처 울린다, (후렴) 영~광을 높이 계신 주께 영~광을 높이 계신 주계" 매 절마다 반복되는 후렴은 나를 울렸다.

당시 나는 너무도 쇠약하고, 초라하고 가련한 신세로 생명을 유지하며 하루 이틀을 살아가는 포로 신세였다. 나 지신이 너무 초라했다. 언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지 고독에 잠겨있는 나의 마음을 완전히 녹여 놓았다. 울고 또 울었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났다. 지금도 이 캐롤송을 부를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안경을 적시고 있다!

날이 밝아 1950년 12월 25일 "성탄절"이다. 900여 명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두 연병장에 나왔다. 어제까지도 공화국기가 계양돼 있었는데 연병장 하늘을 뒤덮은 채 휘날리는 만국기가 놀라웠다. 그리고 성탄절 예배를 드릴 때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날 구원할 구주가 되셨도다! 늘 감사한 찬송을 돌려보내고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구세주 났네”를 1~4절 까지 부를 때에 목이 메었다. 감격과 감사의 눈물로 얼룩진 은혜 넘치는 성탄절 예배였다. "할 렐 루 야"

다음 날부터는 육신은 포로이나 마음은 은혜 넘쳤다. 나름대로 기쁜 신앙생활의 계기를 찾은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1952년도 초가 되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휴전 협정에서 포로교환 문제가 제기되어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5천 명)들과 남한에 유엔군에 억류된 포로 5만 명의 교환이 합의되었다는 것이다. 꼼짝없이 북한으로 돌아가야 하고, 돌아가면 개죽음이나 매 한 가지다.

그러기에 교회 직원 27명이 주동하고 우익 900여 명도 합세하여 "포로 교환 결사반대"를 외쳐도 무반응이었다. 최후 수단으로 우익 9백여 명은 셔츠를 찢어 먹으로 쓴 "결사 반공"의 머리띠를, 그리고 교직원 27명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 "포로 교환 결사반대"의 띠를 이마에 동이고 외쳤다. 외치고 외치다가 쓰러지는 자도 있었다. 마침 옥호열 군목께서 이 처절한 모습을 보고 머리띠 27개를 거두어 이승만 대통령께 보냈었다.

피로 쓴 "포로 교환 결사반대"의 머리띠 27개를 받아 든 대통령은 비상한 결단을 하고 한국군 헌병 사령관인 원영덕 장군에게 비밀지령을 내려 6월 18일 밤 자정을 기해 각 수용소에 철조망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그리로 포로들을 탈출시켰다. 일시에 수천 명이 탈출하려고 몰려와 깔려 죽는 자도 있었다. 나도 같이 행동을 하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가시 철망으로 기어 올라가는 자들이 보였다. 나도 이 방법을 택하고 가시 철망으로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당시 중간치 신구약 성경을 지니고 탈출하는 중이었다.

작은 성경이면 주머니에 넣고 두 손으로 기어오를 수가 있는데, 중간 크기의 성경이었기에 한 손으로 성경을 쥐고 한 손으로 철망을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방법은 단 하나 성경을 버리고 올라가야만 가능했다. ‘어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버려!’하며 갈등을 빚고 있는 순간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는 청천벽력 같은 음성이 들렸다. 결국 나는 6.18 반공포로 석방을 포기했다.

휴전 협정 회의가 본격적으로 성사되어 포로 교환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때에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만에 하나 유엔군이 철수를 하면 우리 국군들은 단독으로라도 북진을 하며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대통령의 뜻이 관철되었다. 이때에 대통령은 UN군이 첫째: 한미 방위조약 체결. 둘째: 황폐화된 한국 재건. 셋째: 국군 현대화. 넷째: 자유의사에 의한 포로교환. 이처럼 4대 공약을 내세우며 실천 약속을 받고 서명을 함으로써 휴전이 성사되었고, 나는 1954년 1월 24일 대한민국 자유의 시민이 되었다. "할 렐 루 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그 결과는 잿더미화 된 대한민국을 반세기 만에 세계 정상 12권에까지 올려놓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쟁 연구가 들은 말한다. 이 사실을 나는 "한국교회와 6.25 전쟁사"에 기록하였다. 모름지기 위에 기술한 바 '4대 공약'에 대한 사건은 본 칼럼이 두 번째 기록이 될 것이다.

1954년 1월 24일 대한민국의 시민이 된 나는 서울에서 6.18 반공 포로 석방 때 탈출한 수용소 교회 피아노 반주자였던 친구 김혜련을 만났다. 얼마나 반가운지 얼싸안고 감격하였다. 그런데 그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사연인 즉 6.18 반공 포로 석방 시 철망을 타고 꼭대기에 올랐을 때 유엔군(포로 수용법에 철망에 오르면 총을 발사해도 된다고 함)의 총에 맞아 다리를 관통하였는데 옥호열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하였고, 지금은 옥호열 선교사님의 장학금으로 예술대학에서 피아노도 전공을 했다.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데 나의 뒤통수를 치며 "성경책이 너를 살렸다"는 음성이 들렸다. 그 후부터 나는 나를 구한 이 성경을 우리 가보로 여기고 보관하고 있다. 자녀들에게도 성경책을 보여주며 "이 성경책이 너희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였으니 예수를 잘 믿으라"고 권하고 있다.

석방이 된 나도 즉시 옥호열 선교사님의 장학금으로 서울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졸업과 동시에 또 전액 장학금으로 숭실대학 철학과에 입학, 졸업을 하고 계속 목회를 시작하여 신촌성결교회 교육전도사, 문래동 성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서대문 성결교회, 답십리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1972년도 초에 미국에 건너와서 썬랜드 한인교회를 개척하고 25년 간 담임목회를 하며 신학교 교수로 후학을 지도하였다. 지난 90년 인생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에 감사한다. 할렐루야! 아멘!

반공포로 출신 김창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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