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전 사무총장 한진유 장로.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전 사무총장 한진유 장로. ©자료사진

[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 이하 한복협)가 10일 오전 신촌성결교회에서 "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님들을 기리며"란 주제로 2월 월례회를 개최한 가운데, "화해와 평화의 목회자 한경직목사님을 기리며"란 주제로 한진유 장로(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전 사무총장, 영락교회)가 발표했다. 다음은 그의 글 전문이다.

한경직목사의 탄생부터 영락교회 창립까지

추양 한경직목사(秋陽 韓景職)는 1902년 12월 29일(음)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자작마을)에서 태어났다. 자작마을은 20여 가구의 작은 동네였으나 이미 자작교회라는 예배당도 있었고 마을사람 대부분이 예수를 믿고 있었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아버지 한도풍씨는 그를 서당에 보내지 않고 선교사가 그 동네에 세운 진광소학교에 가게 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선생님의 추천에 따라 남강 이승훈이 설립하고 고당 조만식이 교장으로 있는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시켰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는 현대과학문명을 배워 나라에 이바지 하겠다는 생각에 평양 숭실대학 이과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3학년 여름방학 때 방위량선교사 (William N. Blair)를 도와 책을 번역하기 위해 선교사들의 휴가지인 황해도 구미포에 갔는데 저녁에 혼자 바닷가를 거닐던 중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장래에 이런 것도 저런 것도 할 수 있겠지만, 너는 온전히 나에게 몸을 바쳐서 복음을 위해 살아라.“ (나의 감사 118쪽)

그리하여 그는 과학보다는 신학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방선교사의 주선과 윤치호선생의 재정지원(미화 100불)으로 미국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한경직은 방선교사가 주선한 캔서스주 엠포리아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준비로 철학, 심리학 등의 인문학을 공부하였고, 그 후에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예일대학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신학박사과정을 하려고 준비하던 중 폐결핵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폐병은 치료약도 없고 거의 죽는 병으로 알려졌고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요양하는 방법 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미국결핵협회 회장이자 결핵전문의사인 피터슨박사의 소개로 뉴멕시코주 알버커키에 있는 장로교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2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기도와 묵상, 독서를 하며 지냈다. 그는 기도 중에 그동안 공부 많이 하고 금의환향하여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것을 뉘우치게 되었고, 안되겠다는 생각에 한국에 돌아가 단 3년 만이라도 복음전파하다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 후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1년 더 요양한 후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1932년 여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처음에는 평양숭인상업학교와 숭실대학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는데 일본 당국은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아내었다.

그런데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청빙을 받고 목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2년 일본 당국의 명령으로 교회에서도 시무할 수 없게 되어 그가 1939년에 의지할 곳 없는 고아와 노인들을 위해 설립한 보린원에 가서 그들과 함께 지내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은 되었으나 북한지역에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게 되므로 한경직목사는 10월에 남한으로 탈출을 하여 서울로 왔다. 그리고 1945년 12월 2일 북한을 탈출한 27명이 함께 모여 베다니전도교회라는 이름으로 첫 예배를 드렸고 일년 후에 노회에 가입하며 이름을 영락교회로 바꾸었다.

화해와 평화의 목회자 한경직

故 한경직 목사
故 한경직 목사

저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고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회사에 취직하여 30여년을 일한 평신도입니다. 따라서 한경직목사에 대하여 학술적으로 말할 능력은 없고 다만 지난 50여년 동안 한목사님 옆에서 보고 느끼고 들은 것을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마치고 입사한 직장이 섬유제품을 제조하여 수출하는 당시로서는 재벌회사중 하나인 ㈜대농이었는데 마침 회사 사장가족이 저와 같은 영락교회 교인으로 한경직목사님을 잘 돕고 있는 분들이었다.
우리회사가 1973년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방직공장을 청주에 건설할 때 종업원들을 위해 교회와 여자고등학교를 공장구내에 세웠고 영락교회가 목사를 보내 주었으며 여름·겨울에는 선교팀과 주일학교팀이 그곳에 와서 봉사해 주어 5,000여명의 종업원중 반 이상이 교회에 출석하였다. 한목사님도 은퇴하신 후라 여러번 그 교회에 와서 설교해 주셨고 그때 저도 함께 청주에 다녀오곤 하였다.

또 1982년 부터 12년간 제가 회사 중역일 때 영락사회복지재단 이사를 맡아 한목사님과 함께 보린원 경로원 모자원 어린이집등 복지시설을 방문하고 행사에 참석하였다. 대농과 같은 그룹인 미도파백화점 사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마친 후에는 이철신 담임목사의 부탁으로 영락교회 행정처장으로 4년,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으로 7년을 봉사하였다.

교회 행정처장일 때 한목사님을 좀 더 가까이 모실 수 있었고, 특히 1999년 12월31일 목사님이 급성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2000년 2월14일 퇴원할 때 남한산성에 있는 사택이 너무 추워 교회 안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여 모시고 있었고 그곳에 계신 2개월 동안 매일 아침 저녁 그리고 수시로 들어가 뵈었으며 그래서 4월 19일 하나님 곁으로 가실 때도 가까이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한목사님은 제게 인자한 집안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었고 그분은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정말 그분이 좋아서 저는 우리 아들 이름을 지을 때 “경(景)” 자를 써서 지었다. 저나 우리 애들이 그분 성품의 만분의 일이라도 닮았으면 하고 늘 기도하였다.

영락교회에 오래동안 다닌 교인들은 한목사님이 주일 아침마다 예배당 앞 계단에 서서 교인들을 맞으시고, 주일학교 어린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인사 받으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분은 주일 또는 평일에 교회 뜰에서 교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참 좋아 하셨다. 우리들은 우리를 보고 웃으시던 그 인자하고 온화한 모습을 생각하며 한 주 내내 가정에서 직장에서 우리도 peace maker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한목사님은 설교 때 자주 화해· 화평·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내 자신이 하나님과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고 하셨고, 그러기 위해 내 안에 도사린 온갖 죄악을 고백하고 회개하고 온전히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의 형제 자매간에, 우리 믿는 이들 사이에 화해와 화목을 힘써야 한다고 하셨다. 그 다음 사회의 모든 사람 사이에 화목을 이루고 평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한목사님은 강단에서 말로만 화목을 외친 것이 아니라 그의 평소의 삶 자체가 말씀과 일치하였다.
온유한 사람으로 살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 가난한 마음을 갖고 일생을 살았다. 나이가 훨씬 아래인 우리들에게도 늘 겸손한 말과 몸가짐으로 대해 주셔서 그분 앞에 서면 항상 평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1945년 8월 우리나라가 해방될 때 신의주에 있던 일본인 평안북도 도지사가 비록 그들이 교회에서 쫓아버린 목사이지만 평소 한목사님의 성품을 알고 있었으므로 한목사님에게 신의주 지역의 치안을 맡아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부탁을 받은 한목사님은 그리스도의사랑과 화평을 보여 줄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를 승낙한 후 도지사와 함께 방송국에 가서 방송하고 윤하영 목사등과 신의주자치회를 조직한 후 치안을 잘 유지하여 아무 사고없이 일본인들이 신의주를 떠날 수 있게 하였다.

영락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시작할 때 한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신앙지도방침을 정하였다.

첫째, 성서중심의 복음주의 신앙의 육성 둘째, 경건한 청교도적인 생활 훈련 셋째,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교회 상호간의 협력과 연합사업에 적극 참여 넷째, 교회의 대 사회적인 양심의 구현.

70년 전에 이러한 원칙을 세웠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그후 외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고, 교회 내에 담임목사가 몇 번 바뀌었어도 이 신앙지도방침은 변하지 않고 아직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하여 영락교회가 한목사님의 정신을 이어 받아 우리나라 기독교계와 사회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화해 평화 정신을 잘 전하고 있다.

한목사님은 교회에서 목회할 때 혹시 당회에서 어떤 안건에 대해 찬반 의견이 격해 지면 오늘은 그만하고 좀 더 기도한 후 다시 의논합시다 라고 하며 화목한 가운데 당회를 마치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다툼과 분열이 있을 때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화해와 화목의 정신으로 상대방을 감싸고 품어 주고 연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한목사님의 몸에 밴 성품이었다.

그래서 1980년대 초에 한국 기독교계가 함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을 하기 위해 협의회를 조직할 때 한목사님에게 총재직을 맡기었으며, 용인에 순교자기념관을 세우고, 양화진에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을 세우고, 1984년 8월에는 여의도광장에서 100주년 기념선교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할 수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 어느 교파는 함께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한목사님은 그들도 한 형제이니 100주년을 기해 서로 화해하고 포용하여 사업을 함께 하므로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보여 주자고 하여 100주년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한목사님이 군사 독재정권을 비판하지 않고 협조하였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2년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되고 그 후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1974년 초에는 대통령긴급조치권도 발동되어 나라가 매우 어지러운 때가 있었다. 그 때 한목사님은 기독교계 큰 교단의 대표들과 함께 의논한 후 건의서를 작성하여 1974년 8월2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갖다 주었다.

건의서 내용은 첫째, 대통령 긴급조치를 해제할 것 둘째,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인사들 특히 종교인, 젊은 학생들을 8·15를 기해 석방해 달라 는 것이었다.

건의서에 서명한 사람은 예장 증경총회장 한경직을 위시하여 예장, 기장, 감리회, 성공회, 구세군, 대한복음교회,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대표하는 총회장, 감독, 주교, 사령관, 이사장, 중앙위원, 회장, 총무 (10명)이었다. 아마 모두 곤욕을 치를 각오를 하고 서명하고 날인하였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100주년기념사업을 마치고 난 후 많은 부흥과 성장을 하였으나 교계가 여러 교파 교단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한목사님은 1989년초 교회연합정신에 따라 범교단적인 조직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10여명의 교계 원로 목사님들과 의논하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1년 가까이 영락교회와 남한산성에 있는 한목사님 사택등에서 모여 협의한 결과 1990년 3월에 창립기념예배를 드렸다. 그 때 여러분이 한목사님을 회장으로 추대하였으나 끝까지 사양하여 결국 명예회장으로 모시었다.

1980년대 말에 쌀 풍년으로 정부 비축미는 늘어나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한목사님은 쌀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여 사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자는 취지로 1990년에 기독교실업인회 등 교계 기관 단체 지도자들과 의논하여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매주 토요일 아침 남산감리교회에 운동본부 임원과 실무자들이 모여 기도회를 하고 사업을 추진하였다. 한목사님은 거의 항상 이 기도회에 참석하시었으며 미도파백화점도 이 운동에 동참하여 기도회에 가서 쌀 구입대금을 후원한 일이 있다.

모금된 돈으로 쌀을 구입하여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국내에 있는 가난한 이웃, 소년소녀 가장, 결식아동, 무의탁노인, 장애인 실직 가정 등에 전달하고, 하나는 북한에 있는 헐벗는 동포에게 전달하고, 하나는 해외 가난한 나라 (아프리카, 사할린, 몽골,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에 전달한다는 원칙을 세워 사업을 시작 하였다.

1990년 6월 쌀 1만 가마를 부산에서 배에 실어 홍콩으로 보냈고 홍콩에서 환적하여 북한으로 보내어 남북분단후 첫 남북민간교류의 문을 열었다. 이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사업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며 다만 최근에는 북한에는 보내지 못하고 국내와 해외에만 보내고 있다.

이 사업을 할 때에도 한목사님은 모두가 연합하고 협력하자고 하시며 실행위원장은 이한빈 전총리, 운동본부장은 박세직 전국회의원에게 맡기고 본인은 명예회장으로 계셨다.

2000년 4월19일 한목사님이 하나님 곁으로 가셨을 때 많은 사람이 빈소를 찾았다. 종교계의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이희호여사, 전 대통령 등 정치인들과 사회 각계층 지도자들이 다녀갔는데 눈에 띄는 것은 다른 교회 교인, 믿지 않는 일반인들도 와서 조문을 하였다. 부축을 받고 온 노인, 휠체어를 타고 온 장애인, 농아인, 맹인,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한목사님이 교회를 뛰어 넘어 여러 계층의 그리움의 대상이 된 것은 평소 그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위에 말과 행동으로 널리 전하고 보여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되었다.

국민일보 이태형 기자는 “빈소가 마련된 영락교회 선교관은 화합의 자리이었다. 여야의 정치인들이 함께 머리 숙였고, 기독교의 진보와 보수가 함께 벽을 넘었다.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과 불교계의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도 동참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하였다.

방지일목사는 “한목사님을 대하신 분들은 주님의 얼굴을 대한 듯 언제나 만나면 마음의 흐뭇함을 갖게 됨은 우리 모두가 다 같이 느끼는 정서라 하겠습니다. 그 화창한 웃음의 얼굴을 주님께로부터 받으셔서 우리를 대할 때 마다 보이는 본이 되셨다”고 하였다.

강원용목사는 “내가 해방 후 서울에 와서 한목사님을 만났을 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한국장로교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뉜 후에도 나에게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지도해 주셨다.

한국기독교100주년사업을 할 때 총재직을 맡은 한목사님은 나를 부회장중 한명으로 추천하여 함께 일하였는데 그는 늘 “일보다 중요한 것은 화평 화합이올시다” 라고 말씀하셨다.

한목사님은 특별히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정해 하나 되게 하는 것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항상 열린 마음과 열린 자세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그의 태도에 모두 서로 양보하고 서로 존중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정진경목사는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와 추양재단에서 이사, 이사장으로 수고하시었는데 “내가 본 사람중 한목사님 같은 화목의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분이 함께 계실 때에는 저절로 화기애애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일부러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닌데도 저절로 그렇게 되어졌다” 라고 기억하였다.

김준곤목사는 “한목사님의 신앙 품성 가운데 특별히 돋보이는 것은 화합입니다. 한목사님은 한국교회가 100주년을 맞을 때 보수와 진보 20여개 교파와 단체를 하나로 통합 결집시켰습니다. 그가 아니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신앙인격의 카리스마가 구심점이 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빌리 그래함 (Billy Graham)목사는 그가 1952년 한국에 와서 전도대회를 할 때 설교통역을 하였고, 1973년 전도대회 때에는 대회장으로 수고한 한목사에 대하여 한목사님이 돌아 가셨을 때 서울에 직접 오지 못하여 마삼락 선교사(Samuel Moffet) 편에 조사를 보냈는데 “그분을 아는 모든 사람은 그와 함께 있으면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 한목사님이 저와 제 사역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본인은 잘 모를 것입니다. --- 한목사님과 함께 할 때면 저 자신의 부족함을 깨우첬으며, 제가 좀 더 그와 닮은 사람이 되기를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한목사님은 은퇴한 후에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에 강사로 초청받아 미국, 남미, 유럽, 아프리카, 대만, 인도 등을 여러번 여행하였다.

그래함목사는 후에 미국 템플턴 재단 (Templeton Foundation)에 한목사님을 추천하여 1992년 4월에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템플턴상(Templeton Prize)을 받게 되었다.

템플턴상은 메달과 상금을 영국 런던에 있는 버킹검궁에서 필립공이 직접 수여하는데 한목사님은 그때 받은 상금 575,000 영국파운드 (미화 약103만 불)을 영락교회 임영수 담임목사에게 주며 이 돈은 후에 북한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데 사용해 달라고 하여 영락교회는 통일 후에 귀하게 사용하기 위해 보관하고 있다.

한경직목사님은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은 철저히 반대하고 싫어했으나 그들 밑에서 고통받는 동포들에 대하여는 측은한 마음, 불쌍한 마음을 갖고 하루 빨리 그곳에 평화가 임하고 복음으로 통일이 되기를 늘 기도하셨다.

그리고 그의 꿈은 하루 빨리 백두산의 나무로 신의주에 무너진 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나의 감사 한경직 지음 2010년
한경직목사 설교전집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09년
한경직목사 장례예배 자료집 2007년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한경직목사 탄신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2002년
아름다운사람 한경직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00년
한경직목사 김병희 편저 1982년
영락교회 50년사 영락교회 1998년

/글=한복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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