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이 발표자인 성덕교회 민경운 목사
오른쪽이 발표자인 성덕교회 민경운 목사. 그는 故 방지일 목사의 중국 선교에 대해 높은 평가점을 줬다. ©이수민 기자

[기독일보 이수민 기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교회 큰 어른이었던 故 방지일 목사(영등포교회 원로)의 소천 2주기를 맞아 '제2회 방지일 선교신학 연구논문 발표회'가 11일 낮 장신대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방 목사는 한국교회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세계교회에서 파송 받은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되었음에도 불구,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버티다가 1957년 추방된 한국교회가 배출한 대표적 선교사이기도 하다.

총회 회록 중심으로 방지일 목사의 선교사역을 고찰한 민경운 목사(성덕교회)는 그 사역의 성격에 따라 임의로 3기로 구분했다. 제1기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이며, 제2기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이며, 제3기는 1946년부터 1957년까지의 시기이다. 그는 "방지일 선교 사역 제1기는 어학 공부의 시기이며, 제2기는 교회 개척과 목회의 시기이며, 제3기는 총회에 구체적 보고가 없는 사역의 시기"라 설명했다.

먼저 총회는 방지일 목사의 언어 학습을 위해 3년 동안 지원했다. 그러다가 1940년 9월 제29회 총회에서 선교부는 방지일의 어학 공부가 마무리 됐다고 보고했고, 이후 방 목사는 전력을 다해 선교 사역을 진행한다. 그는 열심히 전도했고, 믿는 사람이 생기면 교회 개척을 했으며, 교회가 성장하면 예배당을 다시 건축했다. 민 목사는 "이런 방지일의 선교 사역은 교회중심, 목회중심의 사역이었다"면서 "방지일은 전도자요 목회자로, 참으로 충성됐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방지일 목사는 총회에 구체적 보고를 할 수 없게 되는데, 민 목사는 "이 시기 방지일은 중국 내 혼란스러운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목회자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정권의 추방 위협 속에서도 성도들과 함께 고통을 나눠지고 가는 동반자로서의 선교사 모습을 보여줬다"고 했다.

당시 방 목사는 죽창(粥廠)을 운영하고, 한국 동포들을 국내로 송환하는 일 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커다란 선교 사역을 해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내 선교지 상황과 6.25전쟁으로 어지러운 국내 상황으로 총회에 그의 사역 보고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민 목사는 "이런 방지일의 제3기 선교 사역 시기는 사람 중심의 선교 사역이라 할 수 있다"고 평했다.

방 목사의 선교사역을 돌아보면서, 민 목사는 3가지 제언을 했다. 먼저 그는 선교사 파송 후 반드시 현지 언어 학습 기회를 적어도 3년은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번째로는 "(과거) 총회 회록을 유심히 살펴보면, 당시 한국 장로교회의 총회가 중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에게 요구하는 선교 사역이 혹 교회 개척과 목회적인 선교 사역만이 아니었는가 싶다"면서 "총회가 더욱 다양한 영역의 선교 사역에 관한 홍보와 개발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선교 사역에 관한 체계적이며 철저한 보고와 그 관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행사에서는 "중국선교사 방지일"(홍경환) "고 방지일 목사님의 선교적 유산은 무엇인가?"(임종표)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 본 교단을 중심으로"(안교성) 등의 발표가 이뤄졌으며, 종합논찬자로는 임희모 교수(예장통합 총회세계선교부 선교연구위원회 위원장)가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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