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의대 졸업 후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바로 미국으로 유학 와 산부인과 전문의가 됐고 웨인주립대학교, UC데이비스 등 명문대학에서 불임 치료 분야의 교수와 의사로 큰 명성을 쌓았다. 소위 더 할 수 없이 좋은 스펙이다. 돈이라면 “이제 충분하다”할만큼 벌었고 명예도 “족하다”할만큼 얻었다. 샘 복지재단(SAM Care) 대표 박세록 장로다.

 


그러나 그런 그를 하나님이 붙잡으셨다. 故 한경직 목사의 기도를 받으며 크게 회심하고 인도에서 의료 선교에 눈을 떴다. 북한을 향한 부르심에 순종해 북한 사역을 시작해 병원을 설립하고 의술을 펼쳤다. 빨갱이라는 욕부터 생명의 은인이라는 극과 극의 평가가 그에게 따라 다녔다. 그러나 결국 병원은 빼앗기고 “기독교를 포교한다”는 명목으로 북한에선 쫓겨나게 됐다.

“이젠 북한에서 고생 안 해도 된다”며 안도하던 그에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 “당신의 조국은, 당신의 교회는, 당신 자신은 탈북자들의 인권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실의 질문에 큰 충격을 받고 그는 조중 접경 지역에서 다시 의술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실은 이곳에서도 한번 쫓겨날 뻔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좋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에게 의술을 베풀도록 인도하셨다.

그는 “목숨을 살려야 복음도 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23년간의 사역 경험을 통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 수 없는 지원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갖게 됐다. 물론 그것보다 상위의 원칙은 “정치적 상황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신앙 양심에 의해 하나님이 여시는만큼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사랑의영양특별식품을 제작해 전세계의 어린이들에게 응급 식량 구호와 의약 혜택을 전하려는 박세록 장로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본다.

-현재 샘 복지재단은 단동 지역에서 병원을 세우고 의료를 통한 구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재단의 사역이 상당히 다양한데, 그 사역에 관해서 먼저 소개해 주십시오.

샘 복지재단(SAM Care)의 SAM은 Spiritual Awakening Mission의 약자입니다. 즉 단어 자체가 영적 각성과 선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료 활동을 중심으로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선교이며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으로 남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우리 먼저 영적 각성을 체험해야 한다는 의미가 이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영혼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지만 일단은 육의 생명이 살아 있어야 영혼도 구할 수도 있기에 우리는 의료 혜택이 열악한 국가에서 의료 활동을 통해 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어떻게 이 사역이 시작되었나요?

저는 미국에 유학와 공부를 마친 후, 디트로이트에 있는 웨인대학교 의대의 교수이자 의사로서 재직했습니다. 저의 전공 분야는 산부인과인데 그 중에도 특별히 호르몬 분야와 불임 분야가 전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인도 봄베이대학이 웨인대학으로부터 현미경과 레이저를 이용한 산부인과 수술 기술을 도입하기 원했는데 학교 측에서는 저를 이곳으로 3주간 파견을 보냈습니다. 저 역시 대한민국이 한참 못살던 당시를 겪으며 배 부르게 한번 밥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어서 죽어라고 공부해 미국에서 인정받는 의사, 교수가 됐지만 인도에 가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도를 보면서 제가 미국에 있는 몇 년동안 새카맣게 잊어 버렸던 과거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가난하다 보니 소똥으로 집의 벽을 막아서 비가 오면 소똥이 흘러 내리는 집 안에서 온 가족이 살고 있고 콜레라, 이질같은 질병이 창궐해 길에서 사람이 죽어 갑니다. 그러면 그 시체를 가져다가 화장터에서 대충 태운 후, 그걸 강물에 버립니다. 그럼 죽은 사람의 손이나 입에서 나오는 금을 채취하려는 사람들이 그 강물에 수두룩 합니다. “인간의 삶이 이렇게 한번 불타 없어지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한 채 나만을 위해서 살아온 인생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온 후, 한 신문에 인도에 다녀온 경험을 글로 썼는데 그 글을 보고 독자들이 좋은 일에 쓰라며 무려 1만2천불을 제게 보내 왔습니다. 당시에도 정말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저는 그 돈으로 인도에 신학교를 세우고 현지인 지도자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역이 어느 정도 자리잡을 무렵, 갑자기 동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북한이 의료 상황이 좋지 않은데 재미동포 의사를 통해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온 가족과 동료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저는 “가야 한다”는 소명감을 강하게 느끼게 됐습니다. 그때는 한국인이 북한 땅을 밟는다는 것 자체가 “죽을 각오”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너무도 무섭고 두려워서 ‘덜덜덜’ 떨면서 중국 공항에 내렸고 북한에 도착해서도 초긴장 상태에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두려움이 커질수록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강해졌습니다.

북한에 병원을 건립해 주기로 약속을 하고 미국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의 인도 사역은 모두 현지인 목회자에게 인수인계 해 주고 저는 북한을 돕기로 했습니다. 돈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북한에 병원을 짓는다”는 말에 모두 손사래를 쳤지요. 그런데 결국 95년에 5백 병상을 가진 평양제삼인민병원을 건축해 내고 의약품과 의료기구를 마련해 병원을 개원했습니다.

저는 그때 공산주의건 민주주의건 내 손으로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참 기뻤습니다. 그런데 병원을 개원하고 나니 “기독교를 포교한다”며 당국에서 저를 쫓아냈습니다. 결국 병원도 빼앗기고 북한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됐습니다.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먼저는 이제 병원을 다 지었으니 제가 필요 없었을 것이고 제가 기독교인으로서 북한의 상황을 간증하며 모금을 하니 부담이 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하는 등 엄청난 지원이 북한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제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되는 때가 된 것이죠.

-결국 북한에 많은 지원을 하셨는데 그렇게 쫓겨나고 나니 어떠시던가요?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너무 좋았습니다. 이제 그 무서운 곳에 다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북한에 들어갈 때만 해도 북한이란 곳은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었는데 이젠 북한 사역을 하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제게 대한 거짓된 루머들도 저를 따라 다니며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은 하나님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했지만 이젠 욕도 안 먹고, 좀 편하게 살자”고 생각하니 아깝다는 생각이나 분통터진다는 생각은 아예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북한 내 사역은 아니더라도 조중 접경 지역에서 의료 선교 사역은 계속하시지 않습니까?

마침 좀 쉬어 보려는 찰나에, 제네바에 있는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조중 지역의 탈북자 인권 문제가 심각하다는데 이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아무 것도 몰랐지요. 그래서 “좀 알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압록강 두만강을 다니며 이들을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 사람들을 살리지 않는다면 살릴 사람이 없겠구나”라는 절박한 마음이 들면서 “내가 그동안 엉뚱한 데 노력을 했구나”란 후회가 들었습니다.

고등판무관실에서는 탈북자들과 관련해 제게 3가지를 물었습니다. 그 첫째는 “당신의 조국은 탈북자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였습니다. 두번째는 “당신의 조국에는 그렇게 교회도 많고 기독교인도 많은데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번째는 “당신은 그동안 뭘 했는가”였습니다. 저는 한마디도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국경 근처에서 의료 활동을 했고 한번은 몇시간을 굶으며 차를 타고 가다가 여기가 어디냐 물으니 단동이라고 합니다. 바로 신의주 맞은편입니다. 저는 “이곳이다”란 생각이 들어 단동복지병원을 개원했습니다. 100개 병상을 가진 병원이었습니다. 단동 끝자락 시골에 병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큰 소리로 찬송하고 예배드렸습니다. 장구치고 북치고 다 했죠. 이곳에서 11년간 병원을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그기간 중국의 경제가 급성장하자 중국은 북한과의 무역이나 교류를 위해 단동을 전략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경을 하나 두고 단동에는 바람이 불면 옥수수가 물결치는데 북한에는 황량함만 감돌았습니다.

우리 병원 주변도 개발이 들어갔는데 우리 병원이 지역 개발에 방해가 된 것입니다. 건설회사가 매일 와서 온갖 공사를 시끄럽게 벌이는 식으로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우릴 쫓아낼 심산이었죠. 병원 앞에서 땅을 파면 온 병원 건물이 흔들거릴 정도였으니까요. 병원이 보상을 받으려면 원장은 이곳에 안 나타나는 게 좋다고 해서 저는 한동안 이곳을 떠나 있었는데 그즈음 “병원이 망했다”, “원장이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차라리 병원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정부 측에 “이제 관두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위생국장, 당서기가 “안된다”고 합니다. “지금 중국은 경제가 발전하면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다. 정부가 빈곤층을 위한 구제를 해야 하는데 노하우가 없으니 너희가 도와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단동 한복판 시내에 병원을 열어 주었습니다. 관리들이 직접 나서서 행정적인 절차를 다 마쳐 준 덕에 순식간에 병원이 재개원하게 됐습니다. 개원 예배 때에는 십자가까지 크게 걸어 놓고 예배를 드렸는데 당의 주요 관리는 물론 경찰국의 고위 관리들도 모두 개원식에 참석해 격려해 주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동안은 거의 무료에 가까운 진료비를 받으며 의술을 펼쳤습니다. 무료로 하면 “무료의 대가는 바로 전도가 아니냐”며 따지는 바람에 무료로 진료는 못하고 아주 저렴하게 돈을 받거나 저희가 돈을 준 후, 그 돈을 내게 하는 식으로 진료를 했지요.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의 후원자들이 이 병원의 운영을 가능케 해, 단 한번도 직원 월급을 밀리지 않으며 병원을 운영했습니다.

요즘은 한국식 현대 건강검진 센터가 중국에서 유일무이하게 설립돼 고수익을 창출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이제 단동복지병원도 후원자의 후원을 받던 기관에서 자립하는 기관이 되고 향후 2년 내에 다른 선교지를 후원할 수 있는 후원자로 커 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생을 왜 사서 하십니까?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때론 하나님께 불평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일에 저뿐 아니라 온 가족이 23년간 매달리면서 참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역이 꼭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교란 것은 안방에 드러누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지는 어느 곳이든 핍박받고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곳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저보다 똑똑한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르침과 훈련을 통해 고난 가운데 그런 교만함이 적어질수록 고난 가운데 강한 자가 되고 은혜 가운데 강한 자가 됩니다.

저는 원래 신앙심이 그리 깊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를 교회에 데려다 주기 위해 교회까지 간 후 주차장에서 음악이나 듣곤 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아내가 얼마나 속이 탔던지, 미국 중부 지역에 한국 목회자들이 집회만 오면 저희 집으로 목회자를 모시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남편 신앙을 붙들어 주려고 그랬던 것이지요. 당시 제가 돈을 꽤 잘 벌고 이름도 알려졌던 때라 집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저를 기억 못하는 분들도 제 집만은 기억할 정도였으니까요. 오시는 목사님들마다 “박 장로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한경직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제가 일을 마치고 집에 오자 아내가 저를 한 목사님께 이끌었습니다. 저는 “또 안수 기도나 하고 잘 믿어라 그런 소리나 하겠군” 생각하고 “이번엔 정말 확 들이받아 버려야겠다”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이 저를 위해 울면서 기도하시는데 저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박 박사님. 세상은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들어갈수록 더 진정한 의미의 평화와 화해, 용서와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 것에만 목숨을 걸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큰 낭패를 당하지 마시고 더 깊은 세상, 보이지 않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사십시오”라고 하시는데 저도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그런 이게 인연이 되었는지 제가 북한 사역을 하면서 한국 교회에 도움을 구하러 가자 한 목사님이 깜짝 놀라시며 “재미 동포들이 이런 일을 해야 한다”며 적극 나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집을 거쳐 가시며 안면이 있었던 여러 목사님들이 선뜻 협력해 주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제 집에 목사님들이 다녀 가신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인생 최초로 영락교회에서 간증을 하고 이후 여러 교회에서 간증을 하며 후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사역을 하시며 친북주의자라는 오해도 받으시지요?

간혹 어떤 분들은 제가 간증을 하면 “이 빨갱이야. 이번에는 공작금을 얼마나 받아 왔냐? 무슨 지령을 받았냐”고 멱살을 잡기도 합니다. 저는 사실 공산주의가 무엇이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논할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저 평생동안 학교에서 가르치고 환자들을 치료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도 반공교육을 평생 받은 사람이고 한국적 시각에서 보면 꼴통보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군대를 다녀 온 사람입니다. 다만 저는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는 점만은 확실히 주장합니다. 저는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나고 가슴 아파하는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북한 사역에 있어서 인도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정치적 관점도 배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북한을 돕는 일에 있어서 정치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북한의 핵개발이나 연평도 사태 등을 보면 북한 지원에 대한 우리의 상황도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치는 잘 모르지만, 신앙에는 양심이 제일 중요합니다. 샘 복지재단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할 수 있는만큼 할 뿐입니다. 저는 23년간 북한 사역을 하면서 두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는 갖다 준 후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지 모르는 지원은 하지 말자”는 것이며 “안되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여실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가져다 주고 사진 한장 찍는 그런 것은 안됩니다.

그리고 지금 북한이 상당히 불안정한 시기입니다. 물론 이런 불안정이 북한을 위해 사역하는 분들에게 위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더욱 남과 북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순간에도 가장 큰 피해자는 시골, 산골, 압록강, 두만강의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샘 복지재단은 사량의영양특별식품을 만들어서 보급하고 있지요?

이 제품은 국경없는의사회가 아프리카 지역 어린이들을 위해 보급하던 치료식품입니다. 그런데 이 식품의 문제는 바로 땅콩인데 어린이에게 땅콩 알러지가 있을 경우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동에 식품공장을 세우고 2년동안 연구해 쌀로 이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박테리아 검사를 100% 통과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겨서 원인을 규명해 보니 바로 재료의 문제였습니다. “재료가 문제라면 중국산이 아닌 한국산 재료로 만들어 보자”는 시도를 하게 됐고 한국의 가장 큰 한 식품 회사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계에서 100만명에 이르는 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한달 이내에 응급 처치를 받지 못하면 사망에 이릅니다. 이 사랑의영양특별식품은 영어로 RUTF(Ready for Use Therapeutic Food), 즉 즉석에서 사용 가능한 치료 식품입니다. 포뮬라 형식으로 그냥 입으로 넘기기만 해도 됩니다. 또 이와 함께 5세 이상의 어린이를 위해 영양 크래커도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과자에 비타민 등 필수 영양분과 칼로리를 더 첨가해서 영양학적으로 개선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북한 어린이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데 북한 뿐 아니라 전세계의 어디라도 공급할 수 있습니다.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단기선교를 갈 때, 이 영양식품이 필요하다면 저희가 이 제품을 제작비만 받고 공급해 주고 선교지에서 유용히 사용할 수 있는 교육을 해 드리려 합니다. 또 샘 복지재단이 제공하는 비타민이나 진통제 같은 간단한 의약품 패키지도 생산비와 배송비에 해당하는 저렴한 가격에 구매해서 선교에 사용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이 여러 단체의 선교를 도울 수 있길 기대합니다.

-네. 장로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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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복지재단 #박세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