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 손양원의 목회와 신학'(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북 토크콘서트에 패널로 초청된 책의 필자들   ©오상아 기자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지난 27일 오후 감신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진행된 '손양원 목사 순교 64주기 기념예배' 및 '산돌 손양원의 목회와 신학'(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북 토크콘서트가 진행됐다.

이날 북 토크콘서트에는 송현강 교수(한남대)가 사회를 맡은 가운데 전체 필자 8명 중 6명인 영남신대 최상도 교수, 장신대 이치만 교수, 감신대 이덕주 교수(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교수), 전주교대 최병택 교수, 김승태 교수(세계선교신학대학 강사)가 패널로 참가했다.

이 책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와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가 같이 진행한 지난 3번의 손양원 목사와 관련된 학술회의를 통해 발표된 8건의 논문을 묶은 것으로, 주최 측은 손양원 목사와 관련된 첫 전문 연구서라고 설명했다.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이덕주 교수는 "2010년 1월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가 초교파적인 단체로 조직되며 첫 사업으로 손양원 목사의 실체를 규명해보자 해서 그분의 목회, 삶, 순교 그 실체를 규명하는 학술적인 작업으로 저희 연구소에 연구용역을 주셨다"며 "손양원 목사님에 관해서는 안용준 목사님이 쓰신 '사랑의 원자탄' 그 책 하나로 60년 세월을 지내왔는데 애양원의 원 자료를 가지고 더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교회사를 연구한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생각)했다. 2011년부터 그의 생애, 목회, 설교, 신학, 순교 등을 주제로 각 신학대학에서 강의하시는 교수님들과 강사를 초청해서 3년간 학술회의를 했고 작년에는 여수에서 순교를 주제로 진행했다. 그동안은 손양원 목사님에 관한 글은 평신도들에게 읽기 좋은 은혜로운 글들이었는데 이런 책도 도움이 되겠다 해서 학술적으로 신학자들이 논문을 내서 묶게 됐다"고 말했다.

▲(왼쪽부터)이만열 교수, 이덕주 교수   ©오상아 기자

이만열 교수는 이날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해서 주기철 목사님 그밖의 여러 순교자분들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해왔고 해방 후 한국교회가 그 어른들을 (속된 언어입니다만) 많이 우려먹었다. 우려먹었지만 그분들 행적을 정리하는 순교자들의 전집이라든지 남은 글들을 정리한다든지, 생을 정리하는 그런 일들은 거의 못했다"며 "그걸 제대로 해야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손양원 목사 전집 같은 것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다. 한국교회는 다른데는 돈을 많이 쓰는데 여기에는 안 쓰고 있다"고 쓴소리 했다.

또 "요새 순교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쓰이고 있다. 선교를 돕기 위해서 어느 지역에 가서 병에 걸려서 죽었다고 했을 때 어느 교회에서는 이것을 순교라고 한다"며 "한국교회에서 '순교','순교자'라는 개념 을 교단별로 정리해야 한다. 또 한국교회 전체가 동의할 수 있는 순교가 뭐냐 이런 작업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고 했다. 이외 이 교수는 "순교자 유족들을 제대로 받들지를 못했다. 손양원 목사님 후예들만 하더라도 교회와 담을 쌓고 있는 자녀가 있다. 한국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떠받들었는데 그 후손들에게는 제대로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며 이 또한 한국교회의 과제라고 제시했다.

'순교의 개념' 정리에 대해 '순교'를 전공한 최상도 교수는 "학계에서 순교라는 것을 정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정의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순교자는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 돼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란 무엇이냐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실제 초기교회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입니다' 고백하는 동시에 사형순교가 내려졌기 때문에 순교에 대해 쉬운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정체성에 대한 증오로 박해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죽는 것이다"고 했다.

이어 "그 다음 381년 기독교가 국가종교가 된 이후에는 (다른 이를)죽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리고 그 힘을 사용하다 죽은 사람도 순교가 됐다. 거기에는 공격성과 폭력성의 의미가 있어서 국가종교 되기 이전의 의미를 순교로 보고 거기서 의미를 가져와야 되지 않느냐 한다"고 말했다.

또 "381년 이후에 종교가 국가종교가 되고 중세기로 넘어가며 교회 안에서 죽음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순교)전통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느냐 해서 그리스도를 따라서 철저히 살아가는 것에서 백색순교가 나온다. 박해자에 의해서 당하는 죽음은 '적색순교'인데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천주교는 천주교대, 개혁가는 개혁가대로 '적색순교'가 일어난다. 이 시대의 도래란 결국 381년 국가종교가 된 이후의 순교의 폭력성을 그대로 갖고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모습은 자기희생과 용서에서 조금 더 비껴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故 손양원 목사   ©자료사진

그는 "원형적인 순교, 마르투스라는 말은 철저하게 '나는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람입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십자가의 삶과 죽음을 본받는 것이다. 십자가의 철저한 자기희생적 대속적 죽음, 자기를 희생시켜서 남을 살리는 죽음이 순교의 첫번째 의미이다"며 또 "예수 그리스도가 폭력적 박해 속에서 저항하지 않고 폭력을 되사용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용서를 선포했듯이 두번째 의미는 용서의 선포이다. 세번째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 화해를 이루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또 최 교수는 "누가 순교자였는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시지만 교회가 어느 사람을 순교자라고 불러줘야지 순교자가 된다. 우리가 순교자로 기념하지 않으면 순교자가 되지 않는다. 추서가 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되는 죽음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그는 손양원 목사에 대해서도 "교회적으로 추서했기 때문에 순교자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 초대교회 순교의 그 모습과 너무 닮아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며 "삶 가운데 철저한 한센병 환자를 위한 자기 희생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피난을 위한 배에 탔음에도 불구하고 배에 승선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배에서 내려서 남아서 목회했던 모습 또한 자기 희생적 순교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용서는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두 아들을 죽인 이를 양아들로 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적의 재창출, 폭력의 악순환이 될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또 이덕주 교수는 "손양원 목사님은 생전 설교에서 '순교자는 갑자기 되는게 아니다. 순교는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씀처럼 손양원 목사님의 감옥 들어가기 전 삶은 백색순교(白色殉敎, 피 흘림없는 오늘 현대적 순교)의 삶이다. 자아와의 싸움, 정욕과의 싸움에서 자기를 죽이는 것이 목회현장에서 이뤄졌을 때 그것이 적색순교(赤色殉敎)로 이어졌다"며 "평소에 백색순교의 삶을 산 분이 적색순교의 영광을 받는다"고 했다.

이어 '호남이나 충청도에 가면 6.25때 학살로 사망한 무수한 분들은 무엇으로 지칭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최상로 교수는 '순직'이라 하기 원한다고 답했다. 이만열 교수 또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6월 11일 저녁 인천에서 배를 타고 성경번역을 위해 가다 군산 앞바다에서 배 충돌 사고로 돌아가셨다. 이 분을 두고 감리교 내에서 한쪽에서는 순교자다 하고 한쪽에서는 순직자라고 얘기한다. 저는 순교라고 할 수 있겠느냐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며 "카톨릭에서는 성자 되기 전 복자가 있는데 이번에 교황이 와서 시복식을 했다. 시성식이 아니다. 개신교에서도 순교 담론이 활성화되고 각 교단에서 좀 정리를 해야겠다고 한다면 순교, 순직 등 또 다른 단계를 넣어가지고 차차 정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이외 사회자 송현강 교수는 필자들간 상충되는 문제로 손양원 목사가 애양원의 한센병 환자의 환부에 고름을 빨아준 것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들며 이상규 교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는 반면 다른 필자들은 그 사실 자체를 긍정 또는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이덕주 교수는 "과연 역사적인 사실일까 아닐까는 그때 안살아봐서 모른다. 그런데 그 기록이 처음 나온건 '사랑의 원자탄' 책과 딸 손동희 권사님의 증언이다. 이상규 교수님은 '엄격하게 의사들이 격리치료를 했는데 어떻게 환부에 입술을 댔겠는가?'하며 그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고 한다. 애양원 교회에 출석하던 장로님 증언을 근거로 해서 의문을 표시한 것이"며 "저는 20년전 애양원에 가서 (연구차)취재할 때 손양원 목사님을 직접 뵜던 한 노(老) 권사님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그게 가능하겠구나' 답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손 목사님의 성품과 목회적 열정과 애양원 교회 환자들에게 보여준 행위를 보면 그렇다. 그분이 별명이 '손불'이었다. 불덩어리같이 설교하셨다는 것인데 애양원교회 담임목사로 초청 받은 이유도 전도사 시절 부흥회 강사로 초청 받아 왔을 때 한센병 환자들 예배드리는 일반 공간과 의사나 직원들이 예배드리는 공간이 유리창으로 막혀있는 것을 보고 '저게 뭐냐'며 '저거 없애라'고 한 것이 애양원 교인들의 마음을 열었다는 것이다"며 "그 권사님이 하는 말이 '여기 오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어떤 앞선 목회자도 여기는 심방 안왔는데...'라고 했다. 그분 성품으로 봐서는 끌어안고 능히 상처에 입을 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도 모른다. 천국에 가서 물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손양원목사 #산돌손양원의목회와신학 #순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덕주교수 #이만열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