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기 추모식 및 학술대회가 13일 진행됐다.   ©오상아 기자

서거 100주기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전덕기 목사를 추모하고 그의 삶과 목회를 신학적으로 조망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13일 오후 1시부터 충무아트홀에서 진행된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기 추모식 및 학술대회에서 이덕주 교수는 '전덕기의 목회와 신학사상 - 만남과 소통의 관점에서'란 주제로 발표하며 전덕기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규명하며 기존의 105인사건 가담 문제가 수정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전덕기의 105인사건 관련 체포 및 투옥설은 재검토되어야 한다"며 "우선 105인사건과 관련된 일제측 조사기록과 재판기록 어디에도 전덕기 목사가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또한 "무엇보다 평북 선천에서 105인사건과 관련하여 신민회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한 1911년 10월부터 105인사건 피의자 123명이 재판에 회부된 1912년 6월까지 8개월 동안 전덕기 목사의 '공개적인' 행적이 언론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덕기 목사의 105인사건 관련 체포설은 교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만남과 소통의 관점에서'라는 글의 부제처럼 전덕기 목사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고 교회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는 관점으로 접근했다.

그는 전덕기 목사의 민중목회가 스크랜턴 선교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민족문제에 있어서는 스크랜턴과 입장이 달랐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민중 출신이었던 전덕기 목사는 목회 현장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구제하고 도와주는 '민중목회'에 매진했다"며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강도 만난 자'의 불행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여리고 골짜기에 숨어 있는 강도를 퇴치해야만 했다"고 했다.

그는 "이 부분에서 전덕기는 자신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본보여 주었던 스크랜턴의 신학을 뛰어넘고 있다"고 평가하며 "중립적 위치에서 고난 받는 한민족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선교사와 고난 현장에서 고난을 직접 당하고 있는 토착인 목회자의 시각과 감각 차이는 이렇게 컸다"고 평했다.

또한 그는 전덕기 목사가 민중목회로부터 민족목회로 나아가기까지 과정을 민중목회와 민족목회의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청년목회(상동청년회)와 교육목회(상동청년학원)를 상세하게 분석한다.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을 구심점으로 해 거대한 사회 민족운동 세력이 형성됐고 이 세력과 연대하고 소통한 것이 전덕기 목사의 민중목회가 민족목회로 나아가는데 영향을 미쳤다고도 이 교수는 평했다.

그는 "전덕기의 '민족운동'은 그의 '민중목회'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며 "이러한 사실은 그의 사상 형성 과정이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을 위해 봉사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하여 '억압된' 민중의 자의식 계발을 추구하는 계몽의식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것은 정치. 사회적으로 '고난 받는' 민족을 구원하려는 구국 사상으로 연결되는 사상적 흐름에서도 확인된다"고 말했다

이 발제의 논찬자로 나선 김흥수 교수(목원대신학대학/교회사)는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민족교회론의 위험으로 민족을 위한다는 이름 밑에 민족을 형성한 민중은 수탈상태에 방치되어 왔다고 비판했다"며 "그러나 전덕기의 삶과 목회는 앞으로도 한국교회가 건전한 민족적 기독교로 존속하려면 사회의 약자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시사해준다는 점에서 오늘의 교회에 큰 교훈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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