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만다 바우치 작가
아만다 바우치 작가.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아만다 바우치의 기고글인 '자연재해가 닥쳤을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When natural disasters strike: How Christians should respond)를 9월 2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아만다 바우치는 수상 경력이 있는 작가이자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여러 베스트셀러 도서의 집필과 편집에 참여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8월 말, 전 세계는 네팔을 덮친 끔찍한 홍수와 산사태로 마을 전체가 휩쓸려가는 참상을 충격 속에서 지켜봤다. 현재까지 1,35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으며, 수천 명이 여전히 실종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참혹한 파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동시에 미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해마다 비슷한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필자는 ‘음악의 도시’로 불리는 내슈빌(Nashville)에서 10년째 살아가고 있다. 그동안 이 지역 역시 몇 차례 강력한 토네이도의 직격탄을 맞았다. 몇 년 전에는 남편이 목회하는 교회 주변 지역을 토네이도가 휩쓸고 지나간 적이 있다. 폭풍이 지나간 뒤 그 일대를 차로 돌아보면서 필자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숨죽여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재난이 가져온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교회에는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 고통받는 이웃을 섬기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영원한 소망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재해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흔히 ‘자연재해(natural disasters)’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비극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상의 본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다(창 1:31). 하지만 인류의 타락 이후 피조세계는 죄와 죽음, 부패의 영향을 받게 됐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기록한다. 자연재해는 우리가 여전히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상기시킨다.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완전한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으며, 피조세계 전체가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의 죄’가 아니라 ‘타락한 세상의 현실’

사람은 고통을 마주할 때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고 싶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어 한다. 이러한 본능은 자연재해를 특정 개인이나 국가, 집단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라고 단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단순한 인과관계를 경계하게 한다.

누가복음 13장 1~5절에서 사람들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사건을 예수님께 전한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어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이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도 예루살렘의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신다.

예수님은 비극을 당한 이들의 고통을 그들의 특별한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재난과 죽음이라는 현실을 통해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셨다.

요한복음 9장 1~3절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답하신다.

다시 말해 성경은 비극적인 결과와 특정 개인의 죄를 단순히 일대일로 연결하는 사고방식을 경계한다. 모든 고통의 이유를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뜻과 영광을 드러내신다.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사 55:8). 우리의 지식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 비극을 어떻게 사용하시고 그 가운데서 어떤 선을 이루실지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믿음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선하시며,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음을 신뢰하게 한다.

무엇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시편 34편 17~18절은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선언한다.

재난이 한창일 때뿐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도 하나님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 가까이에 계신다.

시편 46편 1~3절 역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기자가 이 장면을 시적인 언어로 묘사했을지라도, 그 고백은 실제로 땅이 흔들리고 물이 넘치는 재난의 순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신실하심은 변하지 않는다는 고백이다.

세상을 향한 믿음의 증거

자연재해와 같은 위기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공포와 혼란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자기 보호만을 생각하기보다 이웃에게 손을 내밀며, 절망 가운데서도 소망을 붙드는 모습은 복음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재난 현장에서 음식과 물을 전달하고, 잔해를 치우며,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재정과 생필품을 기부하는 등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지역 교회와 구호단체가 피해 주민들을 돕고 있다면,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함께 섬길 수도 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욥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처음에는 함께 앉아 아무 말 없이 슬픔을 나눴던 것처럼, 때로는 해답을 제시하는 것보다 곁에 머물러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과 구조 및 구호 활동에 나선 이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 섬김이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지원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재난의 현장에서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섬김 가운데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이 말하는 것처럼, 그 소망은 세상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일시적인 필요와 영원한 필요

재난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당장의 필요를 채워야 한다. 음식과 물, 의료 지원과 거처가 필요하며,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일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현실적인 필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과 피조세계가 필요로 하는 궁극적인 회복이 단순한 재건보다 훨씬 크다고 말한다. 이 세상을 본래 의도된 모습으로 완전히 회복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로마서 8장 19~21절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소망은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는 낙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서도, 그것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소망이다. 지금의 아픔과 파괴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마침내 피조세계를 회복하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소망

네팔에 홍수가 발생한 이후 죽음과 파괴의 소식이 이어지는 가운데, 극적인 구조 소식들도 전해졌다. 무너진 건물과 잔해 속에서 사람들이 구조되고, 모두가 희망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생존자가 발견되는 일이 있었다.

자연재해 이후 전해지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소망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소망을 긍휼과 섬김, 기도를 통해 삶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히브리서 10장 23절의 권면을 붙들 수 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피조세계 위에 영원히 주권자로 계시며, 마침내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 5절이 선포하듯, 그분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재난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분명하다.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곁에 서며,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함께 울며 기도해야 한다. 동시에 절망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복음의 소망을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크리스천포스트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