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한평우 목사

오랫동안 기도하던 문제가 응답받았다면 그 기쁨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지휘자 정명훈 선생이 스칼라 김독이 되기를 기도해 왔다. 본인도 그렇고 주변의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이태리에는 세계적 지휘자들이 10명이 넘을 정도로 많고 그들 모두 한결같이 스칼라의 감독이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다는 그 제목을 놓고 기도했을 때, 결국 응답받을 수 있었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니 모니카의 감격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싶다. 모니카는 빗나간 아들이 정욕의 노예로 사는 모습을 보며 비탄한 심정으로 기도해 왔다. 그는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정으로 끈질기게 기도했고 또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당을 찾아갔고 때로는 눈물로 간구하기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매달렸다.

아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 저 멀리 칼타고에서 밀라노까지 찾아갔을 정도이었다. 아마 21세기에서 유학을 떠난 자식을 그리스인으로 만들기 위해 모니카 여사처럼 기도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식이 있는 외국까지 찾아가는 부모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유는 나는 유학생 목회를 오랫동안 했지만, 자녀의 신앙에 대해 고민하여 부모로부터 연락을 받은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앙생활인데 말이다. 잘못된 신앙은 때로는 불신앙보다 못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은 나치의 수장 히틀러가 성가대원이었고, 수천만 명을 학살한 스탈린은 신학교 중퇴생이었다고 한다.

요즈음에는 비행기나 배 펀을 이용하여 쉽게 올 수 있지만, 당시 칼타고에서 로마에 가려면, 바람을 이용하는 화물선, 그 배를 여인이 타고 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아들을 향한 간절함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당시 밀란에 도착한 모니카 여사는 동거녀가 아들까지 낳아 기르고 있었는데, 강제로 헤어지게 했다. 그리고 아들의 회개를 위해 암브로시우스 감독이 사역하는 밀란 교회를 부지런히 찾아가 기도했다. 어느 때는 목석같은 어거스틴이 도무지 돌아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하소연하는 일도 있었다.

자식을 신앙으로 돌이키기 위해 이런 열정을 가진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까?
“감독님, 제발 제 아들을 한 번만 만나주세요. 소원입니다.” 그러자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기도는,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라고.

그 순간 주교의 말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천둥처럼 들려왔다고 고백했다. 고로, 모니카는 낙심 중에도 소망을 붙잡을 수 있었다.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던 아들이었지만… 그 아들이 드디어 회개하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으니 그 감격은 형언할 수 없었다. 아들이 흰옷을 입고 평소 존경하던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아들을 위해 간구하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라는 의구심까지 일어났다. 그 당시만 해도 세례식은 교회의 아주 중요한 예식으로 치부되었다. 세례식을 참관하는 성도들은 세례받는 성도들을 향해 일제히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을 향한 감사와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미였다. 모니카는 아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였기에 더욱 감격스런 찬양을 불렀을 것이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저 멀리 칼타고(튜니지)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또 로마에서 밀란까지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고 드디어 그 찾아온 목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교회에서 세례식에 참석한 성도들이 찬양을 드리는 일은 이전에는 없었다. 그런데 당시 왕제의 모후요, 아리우스의 추종자, 유스티나는 385년 황실의 부활절 예배를 위해 포르시아노 교회를 양도하라고 암브로시우스에게 강력하게 요청하는 일이 있었다.

그 요구를 거절하자 암브로시우스를 체포하기 위해 병사를 보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시민들이 힘을 합해 강력하게 궐기함으로 황제의 모후 유스티나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존심 상한 유스티나는 암브로시우스를 밀란에서 추방하려고 황제의 군대를 보냈다. 그러자 밀란 시민들은 교회에 바리케이트를 치며 황제 군과 맞섰다.

결국 동방의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중재했는데, 유스티나가 암브로시우스 감독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겠다고 서약함으로 그 일을 매듭짓도록 했다. 이런 승리를 쟁취하기까지 밀 란의 전 시민들은 유스티나의 겁박에 맞서 결사적으로 일어났다.

 

어거스틴
어그스틴은 은혜를 받고 세례 공부를 하기 위해 친구의 별장이 있는 카시아쿰에 가서 6개월을 지냈다. 사진은 그곳에 있는 유적의 일부.

그동안 전 시민들이 합심으로 금식하며 부르짖었고 함께 찬양을 부르며 항의했다. 아마도 여호사밧 왕 시대에 모압과 암몬 자손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여호사밧을 치려고 엔게디에 주둔하고 있을 때 드렸던 결사적 기도처럼 말이다.

 

여호사밧이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때 적군을 물리쳐주셨다(대하20;14-23). 밀란의 시민들은 이런 승리를 마음에 그리며 찬양을 드렸을 것이다.

시민들의 이런 집단행동에 모니카도 동참하여 금식하며 기도했고 또 찬양에 발을 맞추웠다. 성도들이 부르는 찬양을 들으며 감격적으로 세례받은 어거스틴은 놀라운 결단을 하였다. 자신을 평생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거룩한 결단이었다. 진리를 찾기 위해 마니교에 빠져 9년 동안이나 세월을 허송한 어거스틴이었다.

그 후회란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더 나아가서 수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이단에 대한 적개심이 끓어올랐다.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소굴에서 빠져나왔지만, 아직도 잘못된 이단에 매여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자신이야말로 마니교의 잘못을 경험하였기에 강력하게 변론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일어날 신학적 싸움에서 진리를 방어하도록 어거스틴을 부르셨다 싶다. 추후 싸우게 될, 동족 도나투스와 펠라기우스와의 치열한 영적 전투를 대비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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