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제목
내게로 돌아오라

 

성경
예레미야 4장 1-4절, 14절

서론

왜 예레미야는 울었는가

예레미야를 우리는 흔히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왜 그렇게 울었을까요? 그가 마음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이 힘들어서만도 아닙니다. 그의 눈물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아직 성전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있었고, 나라도 당장 망하지 않았습니다. 일상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달랐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백성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고,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본론

1. 회개로의 부르심

예레미야는 9장 1절에서 탄식합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의 눈물이었습니다. 죄를 책망하면서도 죄인이 망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백성이 돌이켜 살기를 바랐습니다.

예레미야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예레미야는 두려워했습니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그리고 그의 사명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렘 1:10)

이 말씀은 예레미야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하나님께서 뽑으시는 것은 다시 심기 위해서이고, 무너뜨리시는 것은 ​다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심판을 외친 궁극적인 목적도 백성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돌아오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백성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보내셔야 했습니까?

그 답이 예레미야 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죄를 단 두 가지 악으로 압축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여기에 이스라엘이 무너진 근본적인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을 대신할 것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이 두 가지 악을 이해해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간절하게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악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지적하신 죄는 무엇입니까? 우상숭배라는 행동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나를 버렸다.” 여기서 ‘버리다’는 히브리어 아자브(עָזַב)​입니다. ‘떠나다, 내버려두다, 관계를 저버리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실제로 어떻게 하나님을 버렸습니까?

예레미야 2장은 그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났습니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놀라운 말씀입니다. 율법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다루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말씀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제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을 더 옳다고 여기기 시작할 때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말씀은 읽지만 내 생각과 맞는 말씀만 받아들이고, 불편한 말씀은 지나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경험을 앞세우고, 순종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필요할 때만 찾는 분이 되어버립니다.

2) 두 번째,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과 바꾸었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알과 바꾸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종교를 바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필요했고 바알도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풍요와 번영은 바알에게서 얻으려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혼합신앙의 위험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주일에는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월요일부터는 돈이 삶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는 “주님을 의지합니다”​라고 하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힘을 먼저 계산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면서 통장의 숫자가 줄어드는 순간 모든 평안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만 불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불신앙입니다.

3) 세 번째, 하나님보다 강대국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18절입니다.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시홀은 애굽을 가리키고, 여기서 ‘그 강’은 유브라데를 가리켜 앗수르를 상징합니다. 국가적인 위기가 닥치자 유다는 하나님보다 강대국에서 안전을 찾으려 했습니다. 외교 자체가 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두어야 할 궁극적인 신뢰를 강대국의 힘에 두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애굽과 앗수르는 무엇입니까? 위기가 찾아왔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붙잡습니까? 돈입니까? 사람입니까? 인맥입니까? 직장입니까? 자녀입니까? 내 경험과 능력입니까? 이것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잃는 것보다 이것을 잃는 것이 더 두려워질 때입니다. 무엇을 잃었을 때 내 평안이 완전히 무너지는지를 보면, 내가 실제로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4) 네 번째, 하나님의 길보다 자기 길을 선택했습니다.

17절은 이스라엘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하나님께서는 길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의 실제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하라고 하시는데 손해가 두려워 타협합니다. 용서하라고 하시는데 자존심 때문에 붙잡고 있습니다. 기다리라고 하시는데 조급해서 내 방법을 사용합니다. 맡기라고 하시는데 불안해서 모든 것을 내가 통제하려고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실제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단순히 ‘물’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생수의 근원되는 나.” 여기에 이 말씀의 깊이가 있습니다. 근원은 물이 잠시 고여 있는 곳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물이 솟아나는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버린 것은 물 한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물의 근원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고, 홍해를 가르셨으며 원수의 손에서 건지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떠나면서도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고 그날 당장 모든 것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통장도 그대로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도 다닐 수 있습니다. 사업도 잘될 수 있습니다. 건강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과의 연결은 이미 끊어졌습니다. 나무에서 가지를 잘라냈다고 그 순간 잎이 모두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동안은 여전히 푸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잘리는 순간부터 이미 마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씀은 주님을 떠나면 직장도 못 다니고 돈도 벌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이루면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의 열매는 맺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수의 근원을 떠난 영혼에는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돈보다 먼저 평안이 메말라갑니다. 평안이 사라지면 감사가 줄어듭니다. 가진 것이 많아도 부족하게 느껴지고, 잘되고 있는데도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기도가 메말라갑니다.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 닿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아픔이 줄어듭니다.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이 그립지 않습니다. 이것이 생수의 근원을 떠난 영혼의 갈증입니다.

2. 생수의 근원을 떠난 영혼의 실상과 회복의 시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반드시 교회를 떠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씀의 다스림을 받지 않을 수 있고, 기도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사람과 돈과 자신의 능력을 더 의지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바라본 유다의 비극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생수의 근원 곁에 있으면서도 목말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훗날 예레미야 4장 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왜 굳이 “내게로”​라고 하셨습니까?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복은 다른 곳에서 시작될 수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바로 거기에서 회복이 시작됩니다.

두 번째 악은,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웅덩이는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직접 파야 합니다. 더구나 물을 저장할 만큼 큰 웅덩이를 만들려면 상당한 수고가 필요했습니다. 단단한 땅과 바위를 파내고 안쪽을 다듬어 물이 새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인생의 웅덩이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합니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공부합니다.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직장에 들어가면 승진을 위해 밤늦도록 일합니다. 사업을 시작하면 성공하기 위해 잠을 줄이고, 사람을 만나고, 위험을 감수합니다.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오랫동안 대출금을 갚고, 노후를 위해 아끼고 저축합니다. 자녀를 잘 키우겠다고 부모는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젊음을 쏟아붓습니다.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하게 공부하고 일하며 가정을 돌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그것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이것만 가지면 안전하다.” “이것만 이루면 행복하다.” “이것만 있으면 내 인생은 충분하다.” 그 순간부터 그것은 단순한 삶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는 웅덩이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문제는 얼마나 열심히 팠느냐가 아닙니다. 그 웅덩이가 터져 있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바쳐 팠습니다. 청춘을 쏟았습니다, 건강을 쏟았습니다. 시간을 쏟았습니다, 가족과 함께할 시간까지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만들어놓은 웅덩이의 밑바닥에 금이 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을 부어도 계속 새어 나갑니다. 더 많이 부으면 채워질 것 같지만, 아무리 부어도 온전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터진 웅덩이에서는 무엇이 새어 나갑니까?

먼저 만족이 새어 나갑니다. “이것만 있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얻고 나면 만족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더 큰 집,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돈, 더 많은 인정이 필요해집니다.

두 번째로 평안이 새어 나갑니다. 많이 가지면 불안이 사라질 것 같았는데 오히려 잃을 것이 많아지면서 두려움도 커집니다. 성공하면 편안해질 줄 알았는데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새로운 불안이 찾아옵니다.

세 번째로 시간이 새어 나갑니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어도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겠다고 정신없이 달리는 사이에 자녀는 자라고, 부모는 늙고, 함께해야 할 순간은 지나갑니다.

네 번째로 관계가 새어 나갑니다. 성공을 붙잡다가 가족을 놓칠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형제와 멀어지고, 자존심 하나를 지키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합니다.

다섯 번째로 건강이 새어 나갑니다.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사용하고, 나중에는 잃어버린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벌어놓은 돈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은 영혼이 메말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다 얻었는데 하나님을 잃었다면 무엇이 남습니까? 통장에는 쌓였는데 감사가 없어지고, 집은 커졌는데 가족의 대화가 사라지고, 지위는 높아졌는데 마음의 평안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터진 웅덩이의 비극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얻기는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는 동안 더 귀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돈을 얻었지만 시간을 잃었고, 성공을 얻었지만 관계를 잃었고, 명예를 얻었지만 평안을 잃었고, 사람의 인정을 얻었지만 자신을 잃었고, 세상을 얻었지만 하나님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웅덩이를 더 깊이 파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해결책은 터진 웅덩이에 물을 더 붓는 것이 아닙니다. 생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그러므로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내 인생을 쏟아붓고 있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을 얻는 동안 내 삶에서 무엇이 새어 나가고 있는가?” 성공을 채우면서 가정이 새고 있지는 않습니까? 돈을 채우면서 평안이 새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인정을 채우면서 믿음이 새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것을 채우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메말라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많은 물을 부어도 터진 웅덩이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회개란 터진 웅덩이를 더 깊이 파는 것을 멈추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문제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첫 번째 악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고, 두 번째 악은 하나님을 대신할 웅덩이를 스스로 판 것이었습니다.

3. 참된 회개의 4단계: 돌아오라, 바꾸라, 갈아엎으라, 속하라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레미야 3장에 들어가면 한 말씀이 반복해서 들려옵니다.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렘 3:1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렘 3:14) 그리고 22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 4장 1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돌아오라고만 하시지 않습니다.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절은 회개의 방향을 말씀합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2절은 회개의 열매를 말씀합니다.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3절은 회개의 내면적 변화를 말씀합니다.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가운데 파종하지 말라.” 4절은 회개의 최종 목적을 말씀합니다.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러므로 예레미야 4장 1절부터 4절은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네 단계로 보여줍니다.

1) 돌아오라 — 회개는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1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돌아오다’는 히브리어 슈브(שׁוּב)​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돌려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닙니다. 후회는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고,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팔고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뉘우침은 주님께 돌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통곡했지만 다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회개와 후회의 결정적인 차이는 눈물의 양이 아닙니다. 어디로 돌아갔느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돌아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내게로’​입니다. 회개의 목적지는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생활도 아닙니다. 과거의 착한 생활로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그리고 실제로 행동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20) 깨달음이 회개가 되려면 발걸음이 아버지를 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돌아왔는데 하나님께도 돌아왔습니까? 예배 자리에는 앉아 있는데 마음도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입술로는 주님을 부르면서 실제 삶에서는 다른 것을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2) 삶을 바꾸라 — 회개에는 돌아온 사람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2절입니다.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라고 하신 뒤 곧바로 진실과 정의와 공의를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말 돌아왔다면 그 흔적이 삶에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 백성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5장 2절은 말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입에는 여호와가 있었지만 삶에는 여호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진실과 정의와 공의를 요구하십니다. 진실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 없이 사는 것입니다. 정의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사람과의 관계와 삶의 선택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정말 돌아왔다면 삶으로 보여라.” 사람이 어떤 길을 지나가면 흔적이 남습니다. 비가 지나가면 땅이 젖고, 불이 지나가면 그을음이 남으며, 상처가 지나가면 흉터가 남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나온 사람에게는 무엇이 남아야 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20)

예수님의 못자국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사랑과 구원의 흔적이었습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그렇다면 우리 삶에는 어떤 흔적이 있습니까? 반드시 이겨야 했던 사람이 양보하기 시작하고, 미워하던 사람이 용서를 선택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사람이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돌아온 흔적입니다. 돌아온 사람에게는 돌아온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 흔적이 바로 진실과 정의와 공의입니다.

3) 마음을 갈아엎으라 — 회개는 마음 깊은 곳을 뒤집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가운데 파종하지 말라.” 묵은 땅은 오랫동안 경작하지 않아 굳어진 땅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를 가지고 있어도 굳은 땅에 그대로 뿌려서는 제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땅을 갑니다. 쟁기가 지나가면 굳은 흙이 깨지고, 깊이 숨어 있던 돌과 잡초의 뿌리가 드러납니다. 기경은 표면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뒤집는 작업입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상처가 오래되면 굳어지고, 미움이 오래되면 굳어집니다. 죄를 반복하면 양심도 둔감해집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들으면 찔렸는데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처음에는 잘못하고 나면 마음이 아팠는데 반복하다 보면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묵은 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씨를 더 뿌려라”고 하시기 전에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마음을 갈아라.” 호세아 10장 12절도 말씀합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가시덤불 가운데 파종하지 말라.” 가시덤불을 그대로 둔 채 씨만 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더하려고만 합니다. 기도를 더 하고, 말씀을 더 듣고, 봉사를 더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더하기 전에 제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미움을 품은 채 기도만 늘려서는 안 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서 예배만 늘려서는 안 됩니다. 욕심을 그대로 두고 복만 구해서도 안 됩니다. 회개는 좋은 것을 더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막고 있는 것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 속하라 — 회개의 마지막은 소속이 바뀌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3절에서는 “갈라”​고 하셨습니다. 4절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베라”​고 하십니다. 우리 안에는 갈아엎어야 할 것도 있지만 아예 끊어내야 할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은 이미 육체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할례는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 가죽을 베라.” 외적인 표지가 있다고 마음까지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16절도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마음의 할례란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오래된 미움이 있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반복되는 거짓이 있다면 끊어야 합니다. 죄로 이끄는 관계가 있다면 정리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붙잡고 있는 완고함도 버려야 합니다.

결론

우리는 종종 말합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원래 그렇다고 붙잡고 있지 말라.” 그런데 4절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베라’가 아닙니다. 그다음입니다. “나 여호와께 속하라.” 여기에 회개의 최종 목적이 있습니다.

회개는 죄를 조금 덜 짓는 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도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결국 소속의 변화입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살아왔던 사람이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시간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물질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자녀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재능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남은 인생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것이 회개의 마지막 자리입니다. “주님, 이제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최원호 목사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두고 세상의 터진 웅덩이를 파며 살아왔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시고, 굳어진 마음을 갈아엎어 주시며, 끊어야 할 것은 끊어내고 온전히 주님께 속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말과 삶에 진실과 정의와 공의의 흔적이 나타나게 하시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나는 주님의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떠나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은혜제일교회 #최원호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