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상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데, 어느 때보다 공허하다. 냉장고는 가득 차 있는데 마음은 비어 있고, 스마트폰 연락처는 넘치는데 정작 깊은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없다. 기술은 인간을 연결해 놓았지만, 영혼은 오히려 더 멀어졌다. 그래서일까. 오늘 시대를 가장 정확히 설명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영혼의 빈궁함’인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난, 바로 영혼의 가난이다. 겉으로는 성공했지만 마음은 텅 비어 있는 사람들, 좋은 집에서 살아도 깊은 밤 잠 못 이루는 사람들,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지독한 외로움에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한국 사회는 지금 ‘정서적 고립’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다. 중장년층의 고립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혼자 사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경제적 어려움보다 더 깊은 상처는 ‘마음 둘 곳 없음’이다. 실제 인터뷰에서 한 중년 남성은 이렇게 말했다. “죽고 싶은 건 아닌데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영혼의 빈궁은 대개 위기 속에서 시작된다. 건강의 문제, 인간관계의 배신, 자녀 문제, 경제적 실패, 억울함과 오해. 인생은 생각보다 쉽게 흔들린다. 더 위험한 것은 그 다음이다. 상처가 깊어질수록 사람은 쉽게 독해진다. “나도 복수할까?” “나도 저 사람처럼 살아볼까?” 마음이 흔들리면 말이 거칠어진다. 영혼이 메말라 갈수록 혀는 칼이 된다.
실제로 우리는 말의 폭력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여러 사건을 통해 보고 있다. 최근 온라인 악성 댓글과 허위 정보 확산으로 인해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극심한 정신적 피해를 겪는 일이 있었다. 몇 초 만에 던진 말 한 줄이 누군가의 삶을 흔드는 칼날이 되었다. 익명 속에서 던진 말이 한 사람의 영혼을 무너뜨리는 시대다.
반면, 같은 위기 속에서도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전쟁과 난민촌 인터뷰에서 많은 이들이 “내일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폐허 속에서도 서로를 붙들고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해도 서로를 위로하고, 절망 속에서도 아이들을 웃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무엇이 그들을 지탱할까.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부요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도자였던 Nelson Mandela 는 깊은 통찰을 남겼다. 그는 인종 갈등과 복수의 요구가 들끓던 시대에 보복의 언어 대신 화해의 언어를 선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화해는 단순한 제도나 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영적인 과정이다.” 분열된 나라를 다시 세운 것은 강한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언어였다.
사실 영혼은 방치하면 반드시 메말라 간다. 정원처럼 가꾸어야 한다. 감사라는 물을 주고, 희망이라는 햇빛을 비추어야 한다. 공동체 속에서 함께 걸어야 하고, 무엇보다 자신보다 큰 의미를 바라보아야 한다. 인간의 영혼은 위로부터 오는 위안과 목적 없이는 결코 배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무엇으로 버티고 있는가?” “내 영혼은 건강한가?” “내 말은 누군가를 살리고 있는가?”
세계적인 심리학자 Viktor Frankl 은 이렇게 말했다. “삶의 의미를 가진 사람은 거의 모든 고통을 견딜 수 있다.”라고 말한다. 영혼이 부요한 사람은 위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흔들려도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까지 붙들어 준다. 메마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혼의 부요함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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