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복음주의연맹(WEA) 서울총회를 앞둔 시점에서 WEA의 구조적 개혁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회원국 연합체에서 터져 나왔다. 스페인복음주의연맹(AEE) 세수스 마누엘 수아레스 사무총장은 최근 발표한 성명에서 “WEA는 중앙집권적 구조에서 벗어나, 회원국들이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 시스템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현 WEA의 중앙집권적 구조가 국가 단위 연합체들의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다.

AEE는 WEA를 향해 △사무총장 총회 직선제 및 정기보고 의무화 △국가 연합과 소통 강화 등을 제안하면서 “진정한 권위는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섬기고 경청하는 데서 나온다”라고 했다. 또 “WEA가 가톨릭교회와 관계를 신학적 연합이 아닌, 박해받는 기독교인을 보호하고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실용적 협력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AEE가 공문이 아닌 성명을 통해 WEA의 구조적 개혁에 목소리를 낸 건 국가 단위 회원연합체의 참았던 불만 표출로 해석된다. 복음주의 정신에 입각해 대륙별 회원국들이 유기적으로 뭉친 WEA의 중앙조직이 소수 리더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배경이다.

그럼에도 AEE의 성명서 발표는 매우 이례적이다. 회원국 연합체가 이런 문제점을 지적할 때는 사무국에 공문을 보내거나 직접 총회에 안건을 올려 발언하는 게 통상적이다. 굳이 성명서를 발표한 건 절차와 방법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일 수 있다.

AEE 성명서의 방향은 현 WEA의 비민주적 시스템에 쏠려있다. 회원국들이 WEA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없게 돼있다는 구조적 문제점이 핵심이다.

얼마 전 WEA 신임 사무총장에 임명된 보트루스 만수르는 25명의 지원자 중 3명으로 압축해 국제이사회에서 다수 찬성으로 인선이 확정됐다. WEA 사무총장은 전 세계 143개 회원 교단과 단체를 대표해 WEA의 방향과 국제적 협력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최고위 리더십이다. 그런 중요한 요직의 인사를 개별 이력서를 받아 심사한 후 국제이사회에서 찬반 의사를 물어 최종 결정하는 게 현 WEA의 인사시스템이다. 이는 사무총장의 막중한 역할과 직위 측면에서 볼 때 지나치게 허술하고 폐쇄적이란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전임 슈마허 사무총장의 경우, 여러 가지 구설 끝에 지난 3월 중도 퇴임했으나 실은 내부에서 경질한 것이란 말이 돌았다. 그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는 뜻일 거다. 전임 사무총장의 중도 퇴임이 누구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바로 이런 폐쇄적 인사 시스템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국제이사회가 인선을 한 후 최소한 총회에서 전체 대의원의 의사를 묻는 인준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몇몇 사람이 인선 기준을 정하고 인선을 확정, 임명하는 건 국제이사회가 가진 독점적 지위를 말해준다.

WEA 국제이사회는 세계 복음주의 교회의 연합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최고 의사결정 기구다. 그런 막중한 임무와 권한이 부여된 국제이사회가 최근 국가 회원 연합체들로부터 불만과 원성의 표적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현재 WEA 내 모든 의사 결정을 국제이사회 의장인 굿윌 샤나와 종신 이사 존 랭로이가 주무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국제이사회 의장 굿윌 사냐는 ‘신사도운동’ 연루 의혹을 비롯해, 신학적 정체성 불명확, 정규 신학교육 미이수 등 드러난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신사도운동’ 연루 의혹은 예장 합동을 비롯해 한국교회 보수권에서 집중적으로 제기한 문제다.

국제이사회 종신이사 존 랭로이에 제기된 문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가족을 평생 정서적으로 학대한 사실과 부친이 ‘컬트’ 계열의 이단이라고 폭로했다. 이 점은 신학적 검증이 요구되는 부분이지만 이런 류의 인물이 1969년부터 무려 40년간이나 WEA 내에서 최고 지도자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더 놀라운 건 이들이 WEA 서울총회를 국내 대형교회가 유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란 점이다. 총회에서 대의원들의 총의를 모아 결정된 사항이 아니라 국제이사회 실권을 쥔 몇몇 인사가 한국에 드나들며 재정과 인원 동원 능력이 있는 대형교회를 물색해 만들어 낸 결과물이란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AEE는 성명서 말미에 “이런 제안이 분열을 위한 것이 아니라, WEA가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함”이라고 했다. WEA의 변화와 개혁이 “서로 존중하고 책임을 나누는 구조가 복음주의 운동의 지속 가능성을 높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내면서 말이다. 이는 개혁 요구에 대한 깊은 고뇌와 함께 결단과 통첩의 의미가 숨어있다.

WEA는 WCC가 지향하는 에큐메니칼에 맞서 순수 복음주의 정신으로 시작된 기구다. 복음 중심의 기구가 종교다원주의·혼합주의 논란에 휩싸이면서 WCC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정체성이 흐려졌다. 이는 가톨릭·이슬람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신복음주의’ 경향의 문제이자 갖가지 의혹의 중심에 있는 핵심 리더십들의 복음노선 이탈에 기안하고 있다.

그런데도 WEA 총회가 한국교회 위상을 높일 것이라고 떠들어대는 이들이 있다. 드러난 문제점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변화 노력 하나 없이 대형교회가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 부어 총회를 한들 뭐가 달라진다는 건가. 한국교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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