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교도 후천년설에 대한 역사적 검토

허정윤 박사
허정윤 박사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공격하는 비판이 쏟아졌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녹스의 영향으로 생겨난 청교도는 무엇보다 성경을 따르는 경건한 신자들이었다. 후천년설은 그들의 신앙 안에서 뚜렷하게 발전하였으며, 그들의 역사관과 신정정치 이상과도 연결되었다. 그들은 사회와 국가 제도의 개혁에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신정(神政)국가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들이 믿는 후천년설에 의하면, 신정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실 것이지만, 그때까지 준비하는 일은 신자들이 할 몫이다. 청교도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반대하면서 국교회의 미진한 개혁도 거부하였으나, 영국을 사랑하는 애국주의자였다. 이 무렵에 로마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교황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등장하는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비판에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당시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년-1536)은 종교개혁을 돕기 위해 1526년 독일에서 번역하여 인쇄한 영어 신약성경을 영국으로 보냈고, 이는 KJB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 출판되었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로마가톨릭교회는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성경 읽기를 금지했다. 그러나 이미 인쇄되어 터진 봇물처럼 나오는 성경들을 막을 수 없었다. 고작 틴데일을 잡아 화형에 처했을 뿐이었다(1536). 무엇보다 성경을 앞세우는 청교도들이 성경을 읽게 되고, 종교개혁의 바탕이 된 어거스틴의 신학을 알게 되는 것은 종교개혁이 낳은 필연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중에서 후천년설 해석이 퍼지게 된 것도 필연처럼 보인다. 여기에 더해 개혁자들이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비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대한 관심을 촉발한 측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개혁자들의 비판에 대해 로마가톨릭교회는 예수회가 전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예수회는 스페인 출신 사제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1491-1556)에 의해 1539년 창립하여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Papa Paolo III, 재위 1534-1549)에게 ‘무슨 일이든지 교황의 명령에 따라 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겠다’는 서약을 하고, 정식 승인을 받았다. 예수회는 가톨릭 신자들의 교육과 비신자들의 개종과 개신교의 확장 억제 등의 세 가지 활동에 주력했다. 그 방법은 앞의 두 가지를 위해서는 선교지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마지막 한 가지를 위해서는 직접적인 방법과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비판하는 것이 발 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근거로 하는 반대 논증이 필요했다. 지속적이며 광범위하게 효력을 미치는 것은 새로운 신학적 이론이나 해석으로 개신교 신자들의 성경 이해에 혼란을 주는 것이어야 했다. 예수회는 뚜렷하게 효과를 거둔 두 가지 요한계시록 해석법을 찾았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리라’는 예언과 ‘교황이 적그리스도이다’는 종교개혁자들의 비판에 대해 교황은 적그리스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혼란을 주는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수회는 어거스틴이 사용했던 상징적 해석 방법에다 과거주의 해석과 미래주의 해석을 추가했다. 그 해석법들을 천년왕국론과 연결해서 잘 살펴보면, 그 해석들이 교묘하게 왜곡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미래주의 해석과 과거주의 해석

① 예수회의 스페인 신학자였던 프란시스코 리베라(Francisco Ribera, 1537–1591)는 적그리스도가 먼 미래에 등장할 것이라는 미래주의적 종말론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서를 집필하여 앞의 몇 장들을 제외하고는 먼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예언들뿐이라고 주장했다.

◆ 그는 적그리스도가 개인적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 적그리스도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 적그리스도는 3년 반 동안 하나님으로 행세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기독교를 폐지하려는 대환난이 일어날 것이다.
◆ 대환난 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땅에서 천년왕국을 이룰 것이다.
◆ 이는 전천년설 요소를 내포하는 미래주의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해석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같지 않음에도 공인되었다.

② 리베라를 뒤이어 같은 스페인의 예수회 신학자 루이스 알카자르(Luis del Alcázar, 1554–1613)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과거주의 해석을 하여 교황을 방어한 인물이다. 그는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마지막 3개 장을 제외하고는 전부 고대 로마시대에 성취되었으며, 기독교를 박해하는 적그리스도는 로마의 네로 황제였다고 주장했다. 그의 해석도 로마가톨릭교회 내에서 공인되었다. 그가 쓴 Vestigatio arcani sensus in Apocalypsi(묵시록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서)는 그가 죽은 뒤 1614년에 출판되었다.

(2) 예수회의 개신교 확산 저지 방법

① 직접적인 방법은 유력한 개신교인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 이단 현의를 씌우고 체포하여 종교재판에서 화형 등으로 처형하는 것이다.
◆ 암살, 독살, 협박 등의 방법도 사용한다.

② 간접적인 방법은 개신교의 확산을 저지하는 음모를 꾸미고,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다.

◆ 예를 들자면, 국가 정책에 관여하거나 교회, 기관에 침투하여 분쟁을 야기하거나 개입하는 것 등이 있다.

(3) 예수회의 개신교 확산 저지 시도 사례

엘리자베스 1세 시기부터 예수회가 잉글랜드 내에 침투하여 엘리자베스 1세를 암살하고, 국교회와 개신교를 말살하여 로마가톨릭으로 복귀시키려고 했다.

① 이 사건을 ‘배빙턴 음모(The Babington Plot)라고 부른다.

◆ 1586년 런던에서 로마가톨릭 교도인 배빙턴이 예수회를 따르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암살과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파에게 밀려나자, 망명차 와있던 로마가톨릭 신자 여왕 메리 1세의 옹립을 기도했다.
◆ 음모는 메리 1세 여왕과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이 발각되었기 때문에 사전에 탐지되었다. 배빙턴과 그 일파는 체포되었고, 처형되었다.
◆ 잉글랜그 국민들은 메리가 잉글랜드 왕권을 탈취하려고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메리 1세 여왕의 처형을 요구하였다. 엘리자베스는 고모의 손녀로서 이종 조카인 메리 1세를 감쌌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처형을 승인하였다.

② 존 줄리어스 노리치(John Julius Norwich, 본명: John Julius Cooper, 2nd Viscount Norwich, 1929-2018)는 그의 저서 『교황 연대기』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비밀 조직인 예수회가 청교도의 확산을 막기 위해 청교도 혁명 이전부터 깊이 개입했으며, 후에 제임스 1세 암살 시도에도 개입했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③ J.E.C. Shepherd는 The Babington Plot에서 특히 교황청이 엘리자베스 1세 암살 시도 이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 파견도 가톨릭의 음모로 설명하고 있다.

④ 1646년 존 브람볼(John Brambal) 국교회 추기경이 창조 연대를 BC. 4004년이라고 주장한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이탈리아·독일 등지에서 훈련된 예수회 단원 100여 명이 영국·스코틀랜드·아일랜드에 파송된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들은 각 개신교에 침투하여 신자처럼 위장해서 활동한다고 했다.

⑤ 그렇다면, 크롬웰의 갑작스런 사망 배후에도 예수회의 음모가 개입되었다는 설이 합리적 의심으로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찰스 2세가 즉위 후 크롬웰 시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의 시신을 부관참시하고, 관련 기록과 상징들을 대대적으로 폐기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보복을 넘어, 청교도 혁명 시대의 기억을 체계적으로 말소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 첫째는 당시 크롬웰이 감염되었던 말라리아는 약만 먹으면, 잘 듣는 가벼운 질병이다.
◆ 둘째는 말라리아의 치료약은 당시 예수회만이 공급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미 알려져 있는 말라리아 치료약을 궁중 의료진이 나서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회가 그 시기에 고의적으로 잉글랜드 전역에 말라리아 치료약을 공급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⑥ 청교도 혁명을 주도하고 공화정을 지지하던 의회군이 호국경 크롬웰이 죽자 갑자기 분열하여 왕정과 국교회로 복귀가 뻔한 상태에서 다수가 찰스 2세 지지로 돌아선 것도 어떤 배후 조직의 사전 음모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4) 왕정 복고 이후 청교도 동향

청교도 혁명이 좌절되자, 의회는 찰스 2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찰스 2세는 즉위하자, 곧 자신을 박해하고 아버지를 처형한 보복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무덤에서 크롬웰의 시신을 꺼내 부관참시를 하였고, 목을 잘라 의회당 앞에 걸어놓았다.

① 크롬웰의 목은 찰스 2세가 죽은 후에야 그곳에서 내려졌으나, 바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한동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수집품으로 팔려 다녔다. 그후 크롬웰의 목은 비밀리에 그의 모교이며 총장을 지냈던 캠브리지 대학교정 한 곳에 겨우 묻힐 수 있었다.

② 크롬웰의 몰락의 원인은 그의 독단적 청교도 신앙 때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독단적 성경 중심주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성경에 없다고 크리스마스 기념행사를 금지할 정도로 일방적인 것이었으며, 그에 따른 그의 정치적 행보는 일반 시민들과 신정정치를 기대했던 청교도 내부에서도 점차 공감을 잃어갔다.

③ 크롬웰의 독단적인 성경 해석과 청교도적 신앙생활은 그가 이끌었던 청교도 혁명이라는 기독교의 개혁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뒤에 수구적 기독교 세력이 복귀한 것은 과연 어떤 신앙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5) 청교도 신앙의 후천년설 발전

그러나 어쨌든 역사적으로 청교도들의 성경중심주의 개혁신학 연구에서 후천년설이 점진적으로 발전한 것은 분명하다

① 존 오웬(John Owen, 1616년-1683)은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1647)에서 기독교가 점진적으로 복음을 확장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후천년설 관점으로 낙관적 견해를 제시했다.

◆ 오웬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며 바라볼 때 영적으로 변화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가 된다고 보았다.
◆ 오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이 교회 안에서 점점 더 드러나면, 결국 세상이 그 영광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단순한 개인 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확장되는 과정을 묘사하며, 후천년설의 낙관적 종말론과 맞닿아 있다.
◆ 오웬의 견해는 그가 자주 언급했던 어거스틴의 견해를 알고 있었지만, 그의 견해는 낙관적 후천년설에 기울어져 있다. 사실 어거스틴을 제대로 이해하면, 그의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도 상징적으로 후천년설을 가리키고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 오웬은 청교도 혁명이 성공했던 시기에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 앞에서 설교했다. 그러나 그는 신정정치를 기대했던 크롬웰의 정치가 독재로 변질되면서 왕이 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657년 궁정 목사를 사임했다. 이후 그는 회중교회파 청교도 운동에 매진했다.
◆ 오웬은 옥스포드대학교에서 부총장을 지냈고, 영국에서 청교도 추방을 강제한 통일령(1662) 이후에도 남아 청교도 신학을 집대성한 최후의 청교도 학자이다.

② 후천년설 전파에 영향을 끼친 문학 작품으로는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의 실낙원(失樂園)과 복락원(復樂園),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1678년 1부, 1684년 2부)이 있다. 특히 천로역정은 기독교인이 멸망의 땅에서 천국에 이르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③ 다니엘 휘트비(Daniel Whitby, 1638-1762)는 국교회 신학자로서 Paraphrase and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1703)에서 후천년설 개념을 논의했다. 이로 인해 일부 신학자들이 그를 최초의 후천년설 제안자로 보는 부류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국교회 신학자로서 당시 알미니안주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 20장을 해석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한 신학적 평가라고 본다.

④ 후천년설은 역사적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청교도가 처음 수용했던 칼빈주의 개혁신앙과 어거스틴 신학의 바탕 위에 낙관적 역사관과 언약신학의 이해를 더하면서 자랐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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