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후천년설 천년왕국론(Postmillennialism)
1) 후천년설 개요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은 교회와 신자들의 복음 전파와 성령의 역사로 세계는 점진적으로 주의 평화(샬롬: shalom)가 온 세계에 확산될 것이며, 그에 따라 악의 세력이 점차 소멸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후천년설은 세계가 어느 시기에 이르렀을 때 기독교 이념으로 다스려지는 천년왕국으로 전환될 것이며, 그리스도는 이 천년왕국이 완성된 후에 재림하신다고 믿는 낙관적 종말론이다. 이 개념은 이미 앞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4세기 북아프리카 라틴 기독교 신학자 티코니우스(Ticonius)의 상징적 해석에서 후천년설의 사상적 전조를 볼 수 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악의 도성과 선의 도성이 투쟁이라는 역사를 통해 선의 도성이 승리하고, 그때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의 견해는 그와 동시대 신학자인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주어 『하나님의 도성』에 반영되었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 나타난 천년왕국의 상징적 개념은 이후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로 채택되었다. 초기 종교개혁자들은 대체로 요한계시록과 그 교리를 경시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개신교 신학자들 사이에서 어거스틴의 신학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의 견해에 바탕을 둔 그 교리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던 중에 독일에서 재세례파의 얀 마티스가 전천년설을 기반으로 극단적 종말론을 주장하는 뮌스터 반란이 일어났다(1535). 이 사건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군대에 의해 곧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종교개혁 진영에서 진지한 신학적 검토가 필요한 것이었으나, 주요 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의 진압에 동조하면서 흐지부지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전천년설과 분명히 반대되는 새로운 후천년설의 싹이 튼 것은 종교개혁의 발생지에서 멀리 떨어져 바다 건너에 있는 섬나라 영국의 청교도 신앙에 의해서였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16세기에 생겨난 청교도 신앙은 앞에서 설명한 후천년설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런 신앙은 역사를 낙관적으로 이해하는 바탕이 되었다. 청교도 신앙은 칼빈보다 더 개혁적이라고 평가받는 존 녹스(John Knox, c.1514-1572)가 스코틀랜드에 처음 이식한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토양에서 자랐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글래스고 대학을 졸업하고,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제 서품을 받았으나, 순회설교자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로부터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이고 사제직을 반납했던 인물이다. 존 녹스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메리 여왕(Mary Stuart, 재위 1542-1567)의 박해로 위샤트가 순교하자, 그의 뒤를 이어 메리 여왕에 항거하다가 프랑스 지원군에게 체포되어 갤리선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었다.
잉글랜드에서 로마가톨릭교회를 반대하는 종교개혁은 헨리 8세(Henry Tudor Ⅷ, 1509-1547)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종교개혁운동이 대륙에서 시작되는 시기에 로마가톨릭 교황이 그의 이혼과 재혼을 불허하자,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 1534)을 선포하고, 영국 국교회를 만들어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시키고, 그 수장이 되었다. 잉글랭드 국교회의 수장이 된 그는 교황의 승인 없이 이혼과 재혼을 독단적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제도와 교리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청교도는 개혁주의 비국교도와 함께 국교회가 개혁의 시늉만 냈을 뿐이라며 거부하고, 완전한 개혁을 요구하면서 저항했다. 헨리 8세의 사망 후에 즉위한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Edward Tudor VI, 재위 1547-1553)는 10세에 즉위하여 재위 6년 동안 개신교에 호의적이었다. 그는 재위 중에 갤리선 노예로 생활하던 존 녹스를 구출해주었고(1549), 잉글랜드로 오게 해서 얼마 뒤 궁정 설교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는 4년 뒤 16살 나이에 일찍 죽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은 이복 누이 ‘피의’(Blood) 메리 여왕(Mary Tudor, 재위 1553-1558)은 즉위하자, 로마가톨릭교회로 복귀하려고 존 녹스와 충돌하며 박해하였다. 이때 녹스는 잉글랜드를 떠나 스위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개혁자 칼빈으로부터 개혁신학을 배우고, 제네바에서 잉글랜드 피난민교회를 이끌었다. 그는 얼마 뒤에 고향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칼빈주의 장로교회를 정착시키고, 프랑스군의 철수를 이끌었다. 그는 왕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회를 소집하여 로마가톨릭교회를 불법화했다(1560). 존 녹스는 무엇보다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강조했으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s Confession)를 제정하고, 그것의 범주를 벗어난 로마가톨릭교회와 영국 국교회를 개혁의 대상으로 표적 삼았다. 존 녹스는 피의 메리 여왕에게 잉글랜드로 불려갔으나, 여왕의 면전에서 잉글랜드의 종교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존 녹스는 칼빈으로부터 개혁신학을 배웠지만, 그의 생애에서 보여준 활동으로 칼빈보다 더 개혁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또한 청교도 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준 인물로서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1899-1981) 등에 의해 청교도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1) 청교도 신앙의 성장
칼빈주의 장로교회가 영국에서 점차 확산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와 영국 국교회는 만사를 성경으로 따져보면서 일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처음에는 비아냥 투로 ‘Precisians’(정확한 자들)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Puritans’(청교도: 순수한 자들)로 바꿔 불렀다. 그들에게서 후천년설의 신앙이 자라났다.
① 잉글랜드에서 청교도를 박해하던 ‘피의 메리’(Bloody Mary) 여왕이 급사하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Elizabeth Tudor I, 재위 1558-1603)이 등극하자, 국교회로 복귀하는 수장령이 다시 반포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국교회를 강화했지만, 개신교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핍박하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서거를 마지막으로 튜더(Tudor) 왕조는 끝나고 스튜어트(Stuart)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 8세의 자녀인 이복 3남매가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② 스튜어트 왕조의 첫 왕인 제임스 1세(King James I, 재위 1603-1625)는 즉위한 이후에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왕권 강화를 위해 국교회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제임스 1세는 어렸을 적에 스코틀랜드에서 개신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그는 국교회와 청교도의 통합을 위하여 통합의회를 열었으나, 애당초 국교회로의 통합을 목적으로 소집된 것이었기 때문에 청교도의 반대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③ 그는 재위 중에 기독교에 불후의 영역본 성경(King James Bible: KJB, 1611)을 만들었다. 그러나 통합회의의 실패로 KJB는 결국 영국 국교회만을 위한 것이 되었다. 그동안 청교도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수 있다는 종말론적 믿음을 적극 수용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현실 정치 체제와 충돌이 불가피한 신념이었다. 제임스 1세는 국교회를 거부하는 자를 분리하고, 차별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때부터 영국에서 청교도는 영국 국교회를 거부하는 개신교인들을 총칭하는 ‘분리주의자’(the Separatists) 또는 비국교도(Dissenters)를 가리키는 말로 발전했다.
④ 제임스 1세는 비국교도를 분리하고 차별하고 박해하였다. 이에 청교도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국을 떠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일부가 먼저 네델란드로 건너갔으며, 일부는 메이플라워호(The Mayflower)를 타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⑤ 1620년 9월에 영국 플리머스 항구에서 신대륙을 향해 떠난 메이플라워호에 승객은 102명이었다. 그들 중에 청교도는 35명으로 신원 기록이 알려진 사람은 5명에 불과하다. 항해 도중 선상에서 ‘메이플라워 서약’을 작성하여 미래의 공동체 운영에 대해 합의했다. 막상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었고 선상에서 월동 생활을 하는 동안 반수 이상이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듬해 3월에야 신대륙의 플리머스라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청교도에게 신대륙은 그들이 만들어갈 천년왕국의 터전이었고,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실현하실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처럼 보였다.
⑥ 그렇다고 영국에 남아 있던 청교도들이 모두 국교회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성경적 원리에 입각한 신정정치(Theocracy)를 실현하기 위해 조국에서 투쟁했다. 그들은 영국 내에서 또는 영국 밖에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이라는 청교도의 신앙을 행동으로 보임으로써 그것이 역사 변혁과 교회 개혁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원인이 되었음은 물론, 후천년설을 신학적 논의의 자리에 올려놓는 계기를 만들었다.
(2) 청교도 혁명의 성공과 실패
한편 잉글랜드에 남아 있던 청교도는 국교회뿐만 아니라, 국가의 제도까지 개혁할 것을 요구하면서 투쟁하였다. 청교도는 그들이 해석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와 국가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신정정치를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 이상은 현실에서 혁명적 수단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① 역사에서 청교도 혁명은 제임스 1세가 죽고, 새 왕으로 즉위한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I, 재위 1625-1649)로 인하여 촉발되었다. 찰스 1세는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그가 국교회의 수장으로서 임명하는 주교를 스코틀랜드에서 거부하자, 청교도의 본거지인 그곳을 토벌하려고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주교전쟁’(1639-1640)이라 불리는 이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국가 재정만 탕진하였다.
② 찰스 1세는 전비 충당 목적으로 세금 징수를 위해 의회를 소집했으나. 잉글랜드 의회는 이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왕실의 군대와 의회의 군대 사이에 ‘잉글랜드 내전’(1642-1648)이 세 차례 벌어지게 되었다. 독실한 청교도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청교도가 주력이었던 의회군을 지휘하여 승리했다. 1, 2차 내전에서 패배하고 체포되었던 찰스 1세는 비밀리에 탈출하여 그가 자란 스코틀랜드에서 지원군을 얻어 3차 내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결국 다시 패배하여 체포되었고,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이때 그의 아들 찰스 2세는 왕위 계승을 선언하였으나, 의회가 거부하자 스코틀랜드로 탈출하였다.
③ 이후 잉글랜드 의회는 1649년 군주제를 폐지하고, 독실한 청교도인 올리버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옹립하여 공화제를 시행하는 청교도 혁명에 성공하였다. 청교도 혁명은 신정국가 수립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은 곧 로마가톨릭교회가 반란을 일으킨 아일랜드의 정복과 도망쳐 온 찰스 2세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스코틀랜드까지 복속하여 잉글랜드 내전에서 시작된 ‘삼왕국 전쟁’(1642-1651)을 먼저 끝내야 했다. 이때 패배한 찰스 2세는 다시 탈출하여 로마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로 건너갔다.
④ 크롬웰은 정복한 삼왕국을 잉글랜드 연합국으로 병합하였다. 1653년 의회는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다시 추대하였지만, 그 의미는 이제 삼왕국을 통치하는 국가 원수로 승격된 신분이었다. 재추대된 호국경의 취임식은 왕의 대관식과 다름없었고, 그 이후 크롬웰의 정치 행보는 의회를 해산하여 그의 재임 동안 다시 열지 않았다. 크롬웰은 점차 독재의 길로 나아갔다. 그의 독재는 청교도 신앙을 토대로 한 신정정치 방식으로 영국연방을 그만이 통치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그것은 신정정치의 이상과 세속정치의 현실 사이에 놓여있는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⑤ 크롬웰의 통치 10여년 동안은 청교도 혁명 시대로 불리고 있다. 크롬웰은 그의 말기에 왕으로 옹립되기를 시도하다가 그를 지지하던 의회군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대신 그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크롬웰은 말년에 말라리아에 감염되었으나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사이에 악화되어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⑥ 1658년 크롬웰의 사망 후 호국경의 지위는 의회에 의해 그의 아들에게 주어졌으나, 의회군은 아들의 호국경 지위 승계에 대해서 반대했다. 아버지처럼 권위를 갖지 못한 아들은 반대파를 제어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청교도 혁명 정권은 급속히 구심점과 추진력을 잃었고, 아들은 밀려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틈 타 과거의 왕당파가 득세하여 1660년 찰스 2세(Charles Ⅱ, 재위 1660-1685)를 프랑스에서 불러들여 국왕으로 추대했다. 이로써 청교도 혁명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왕정과 국교회의 복고가 이루어졌다. (계속)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허정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