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장 16절

사무엘서는 “사울의 죽음”을 기준으로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로 나뉘어집니다. 사무엘하부터는,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사울의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의 암흑기”가 끝나고, “이스라엘의 부흥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큰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 때, 패배당한 사울의 진영에서 한 청년이 도망쳐 나와, 시글락에 있던 다윗을 찾아가 전쟁의 결과를 보고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참담한 소식이었습니다. 이 청년의 옷은 찢어져 있었고, 머리에는 흙이 묻어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극도의 슬픔을 표현할 때,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썼습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슬퍼한 것인지, 아니면 겉으로만 그런 척을 한 것 뿐인지, 다윗의 입장에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는 삼상31장에서, 사울이 자기의 칼로 스스로 자결했다는 기록을 통해, 지금 이 청년의 보고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슬픔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하여, 보다 자세한 설명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자신이 우연히 길보아 산에 있었을 때, 중상을 입은 사울을 보게 되었고, 사울이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요청을 해서, 자신이 그를 죽이고 그의 왕관과 팔찌를 빼서 다윗에게 가져왔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아말렉 청년은 도대체 왜 이런 거짓 보고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청년은 사울의 진영 안에 있었던 사울의 부하로서, 사울로 인해 다윗이 어떤 고난과 수모를 당해왔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의 왕관을 가져다 주면서,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면, 자신이 다윗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다윗은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그 자리에서 이 청년을 처형하였습니다. 얼핏 보기에, 다윗의 이와 같은 처사는 너무 과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 청년을 처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다윗의 손을 통하여 내려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아말렉 사람이었습니다. 이 아말렉 사람이, 아말렉 군대에 들어가지는 않고, 이스라엘 군대로 들어와 이스라엘을 위해, 그리고 사울을 위해 지금까지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울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망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다윗이 다음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마치 자신이 사울을 죽인 것처럼 속인 후, 사울의 왕관을 갖다 주면서, 다윗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성공을 위해 거짓말에 의존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윤리도덕이나, 자신의 신앙, 사람들과의 신의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다 버릴 수 있는 “기회주의적”이고 “출세지향적”인 사람들을 쉽게 만나게 됩니다.
이런 류의 기회주의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인간들을 한 단어로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바로 “정치인”이라고 부릅니다.
정치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의 정치인이 있습니다. “정치를 하는 인간”이 아니라, “정치적인 인간”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일컬어 “그 사람은 정치적이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국가의 권력을 비롯한 어떤 종류의 권력이든 그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자기 자신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간의 이해를 조정하여, 결국에는 자신의 명예와 자신의 영광을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기본적으로 “정치”란 “권력지향적인 행위”입니다. 권력을 획득하고, 획득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 바로 정치입니다. 그래서 모든 정치인들은 “권력 의지”를 갖고 있는 “권력추구형 인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 자체가 나쁘거나 악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사실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를 위해 그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것인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려고 하는가? 나의 생업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국민을 위한 것인가? 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인가?” 바로 이것이, 내가 “정치를 하는 인간”인지, 아니면 그냥 “정치적인 인간”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정치인”은 나라와 국민을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정치인”은 자신의 권력 추구의 이유가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국민들을 속이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정치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정치적인 인간”이었습니다. 다윗은 “정치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말렉 청년은 정치적인 정치인, “거짓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거짓된 “정치적인 인간”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정치적인 인간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와 명예를 위해 거짓말로 자신의 권력을 추구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이 아말렉 청년, 이 거짓된 정치인의 이름은 바로 “이재명”입니다.
지난 5월 1일, 공직선거법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기소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에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유죄 취지로 서울고등법원에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는 5월 15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이재명 후보에 대한 파기 환송심 첫 재판이 열리게 됩니다.
이것은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로,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은 이미 유죄로 확정되었고, 이제는 형량을 확정 짓는 일만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은,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내린 2심 재판부의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1년, 집행유예2년을 판결한 1심 재판부의 손을 들어준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 다시 열리는 서울 고등법원의 파기 환송심에서는, 1심 재판부가 내린 형량과 같거나 비슷한 수준의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거의 확정적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은 6월3일 대선 전인, 5월 중에 아마 나오게 될 것이고,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대선 이후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이재명 후보가 벌금 100만원 이상의 대법원의 유죄 확정 판결을 받게 되면, 피선거권을 박탈당하게 되고, 설령 6월 3일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다 해도, 당선이 취소가 되는 것은 물론, 더불어민주당은432억원 정도의 지난 대선 선거비용과 함께, 이번 대선의 선거비용까지 다 국고에 반납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이재명 후보는 이제 망했습니다. 이재명 후보의 이 끈질긴 정치 생명이 이제 비로소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운명을, 이재명 후보는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대법원의 판결을 통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짓된 정치인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대법원 판결 직후, 이재명 후보는 자신에게 이미 확정적으로 예정된 이 비극적인 운명을 피하기 위해, 대한민국 헌정 사상, 듣도 보도 못한 온갖 꼼수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거짓된 계략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의 오만함”이요, 이와 같은 오만한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반드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정치인의 허위사실유포죄는 공직선거법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일반 유권자 입장에서는 공직에 출마한 후보에 대해서 잘 알기 어렵습니다. 텔레비전에 잠깐 나오는 인터뷰, 토론회 등을 보고 결국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나와서 허위사실을 유포하게 되면, 그것은 유권자들의 투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또는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공직후보자들은 국민들의 물음이나 기자들의 물음, 또는 자신에 대한 어떤 의혹이 제기가 있을 때, 아주 엄격하게 국민들 앞에서 진실을 털어 놓을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공직을 맡고자 하는 정치인들은 국민들 앞에서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반 국민들은 표현의 자유에 관해서, 정치적 견해 표명이 폭넓게 허용되지만, 입후보자들은 국민들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서,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거짓말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번 대법원 판결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민주당은 정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민주 파출소”라는 미명 하에 허위조작 정보 신고센터를 운영하며, 국민들의 항의의 표시에 대해서는 기사의 댓글 하나 하나까지도 색출하여 고발하고, 반대로 이재명 후보는 자기 마음껏 표현의 자유를 누리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비록 국민들의 댓글이 과장되거나, 정치인들의 심기를 좀 불편하게 한다 할지라도, 국민들을 섬기기 위해 권력을 부여 받은 정치인들은, 그것을 나라를 위한 쓴소리로 생각하고, 국민들이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도록 해야 하는 것이, 정치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까?
그런 국민들에 대해서는 카톡까지 검열하여 고발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정작 자신은 국민들의 표를 도둑질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일삼는 이런 이율배반적인 거짓된 정치인의 오만함을, 이번 대법원의 판결이 바로잡아 준 것입니다.
자신의 권력에 눈이 멀어, 가는 곳마다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명령은 눈에 뵈지도 않았던 사울, 그리고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거짓말도 서슴치 않았던 이 아말렉 청년. 이 땅의 거짓된 정치인의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두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절망적인 이스라엘의 상황 속에서, 마치 어두운 밤 하늘의 빛나는 별과 같은 한 인물이, 우리의 눈 앞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탁월한 영성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진정한 정치인”이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우리 민족에게도 이와 같은 정치인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번 미스바광장기도회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이런 정치인이 우리나라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지금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우리 나라에 다윗과 같은 정치인이 없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정치인을 알아볼 수 있는 국민들이 부족하다는데, 지금 이 나라가 처한 정치적 위기의 본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면 뭐합니까? 은 30냥에 팔아, 십자가에 처형 해버리는데. 예수님이 이 땅의 왕으로 오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데.
그 나라의 수준은 그 나라의 “정치가”의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고, 그 나라의 정치가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승만과 김일성을 두고, 이승만은 “민족의 원흉”이요, 김일성은 “민족의 영웅”이라고 날뛰면, 그런 나라는 그냥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니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겠다는 대통령을 쫓아내고, “우리 민족끼리”라는 미명 하에, 북한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대한민국의 정당들,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고 “쉐쉐 거리며 날뛰는 사람”을 기어이 대통령의 자리에 앉히겠다고 하면, 그런 나라는 그냥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라도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말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가장 저급한 인간의 지배를 받는다.”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말은 “정치에 무지하다”는 말입니다. 국민들이 “정치에 무지하면, 그런 국민들은 가장 저급한 인간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치에 무관심하고, 정치에 무지한 국민들의 죄값입니다.
한 나라의 정치적인 위기는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국민들”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치학적으로 말할 때, 모든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과 같은 정치인을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다윗과 같은 정치인을 알아볼 수 있는 국민들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그리고 복음 전파와 이 땅의 영적 부흥을 위해, 이 땅의 국민들과 성도들이 다윗과 같은 정치인을 알아볼 수 있는 정치적, 영적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쳐 주고 인도해줘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누가 사울이고, 누가 다윗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사울과 다윗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어두운 밤 하늘을 비추는 달빛처럼 선명하게 가르쳐주고 인도해 줘야 할, 사무엘이 감당했던 그와 같은 “선지자적인 책임”이, 대한민국의 모든 영적 지도자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민족이 처한 정치적인 위기는, 한국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바로 이와 같은 선지자적인 책임을 회피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들부터가 정치에 대해 무관심했고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과 성도들이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지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너무 편협한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복음은 단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복음의 진정한 의미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인 참여를 희석시키는 방식으로 악용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저주이고 사망입니다. 인간의 죄는 개인의 삶은 물론 인간 세계와 자연세계 그리고 우주세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 세계 가운데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한 죄 사함은 단순히 한 개인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세계와 자연세계 그리고 전 우주세계가 인간의 죄로 인한 저주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적인 구원”에 국한된 소식이 아닌, 모든 나라와 민족, 모든 인간 세계와 자연세계를 포괄하는 “우주적인 구원”에 관한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만 용서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육체적인 질병 또한 고쳐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의 영적인 삶과 육체적 삶 모두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존재는 영육의 연합체로서, 사람들의 육신을 고치는 것은 영적으로도 유익한 것이요, 그 사람의 영적인 구원은 곧 육체적인 구원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에 육체적인 부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의 육체적인 삶을 개선하기 위한 모든 정치 사회적인 활동은 매우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며, 따라서 지극히 영적인 활동인 것입니다.
북한과 한국의 차이를 생각해보십시요. 북한의 억압적인 정권의 박해로 인해 수백만명의 북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본 적도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눈 앞에는 구원의 대로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대로를 거부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북한에서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이 나라를 북한과 같은 나라로 만들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을 유지하고 싶으십니까? 여러분들은 당신의 자녀들이 어떤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대한민국과 같이 중국공산당과 북한공산당에 둘러싸여, 전 세계 선진국 가운데 가장 치열한 체제전쟁, 이념전쟁을 펼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교회가 정치적인 중립을 지켜야 한다구요?” “교회는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말라구요?”
이런 “기생 오래비” 같은 설교를 하고 있는 설교자들 때문에, 지금 이 나라가 지금과 같은 정치적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도둑을 보고도 짖지 못하는 개를 어찌 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2:1-4)
좋은 정부는 사람들이 평화롭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돕고, 악한 정부는 그것을 방해합니다. 정부는 교회가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협조적일 수도 있고, 반대로 법을 통해 그것을 강제로 막을 수도 있습니다. 정부는 살인자와 도둑, 음주운전자와 아동 착취자, 마약사범들을 막아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이 사회를 위협하고 생명을 파괴하도록 허용할 수도 있습니다. 정부는 결혼을 장려하고 보호할 수도 있고, 아니면 반대로 결혼제도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정부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의 모든 공직은 바로 성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에 더 많은 선한 정부가 나타나도록 마땅히 기도하고, 우리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선교인 것입니다.
1880년 10월20일, 네덜란드의 목사이자 나중에 네덜란드의 총리가 된 아브라함 카이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야 할 영역은 단 한 뼘도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정치 영역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정치 영역을 간과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정치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 “교회는 중립을 지켜야 해”라는 식의 가스라이팅을 당한 결과입니다. 그와 같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교회가, 이 중요한 정치 영역에 대해 침묵하는 틈을 타고 들어와, 결국 사탄 마귀가 이 중요한 정치 영역을 완전히 집어 삼키게 된 것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그와 같은 마귀의 역습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영역과 마찬가지로, 정치 영역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생육하고 정복해서 다스려야 할 영역입니다. 우리가 그곳으로 들어가 진리로 빛을 발하지 않으면, 그곳은 어둠의 영역에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삼키고 성도들을 삼키며, 이 나라를 삼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성 감옥의 사형수였던 청년 이승만은 1903년 28살의 나이에 자신의 감방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정치는 항상 교회 본의로서 딸려 나는 고로 교회에서 감화한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정치의 근본이 스스로 바로 잡히나니, 이같은 교화로서 나라를 변혁하는 것이 제일 순편하고 순리된 바로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정치만 고치고자 하면 정치를 바로잡을 만한 사람도 없으려니와, 설령 우연히 바로 잡는다 할지라도, 썩은 백성 위에 맑은 정부가 어찌 일을 할 수 있으리요. 반드시 백성을 감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한 후에야, 정부가 스스로 맑아질지니, 이 어찌 교회가 정부의 근원이 아니리요.”
그렇습니다, 정부의 근원은 교회입니다. 정치의 새로운 물줄기는 오직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나라와 정치와 법과 제도를 도외시하는 그런 비겁한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슈도 정치적인 이슈 나름입니다. 지금 이 나라가 처한 정치적인 위기가, 성도들의 정치적인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정치적인 중립을 지키고 있어야 할 그런 태평한 상황이었으면 저도 너무 좋겠습니다.
지금 이 민족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자유민주주의냐 아니면 공산주의냐를 두고 펼쳐지고 있는 체제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같은 정치인을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국민들부터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내 남편과 아내를 흔들어 깨워야 하고, 내 자녀와 내 부모를 흔들어 깨워야 하고, 우리 교회 목사와 우리 교회 성도들을 흔들어 깨워, 정치적인 무관심과 정치적인 무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그들을 계몽 시켜야 합니다. 정치적 계몽운동. 이것이 바로 지금 이 시국에, 복음전도와 함께 한국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성경적 보수주의 운동을 통한 국민 사상 개조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리바이벌 코리아가 감당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국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맑은 정부의 근원은 바로 맑은 교회입니다. 한국교회가 바로 서면 나라도 바로 섭니다. 한국교회로부터 대한민국 정치의 새로운 물줄기가 흘러 나오게 될 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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