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33회 학술발표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33회 학술발표회 진행 사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줌 영상 캡처

한국기독교역사학회(정병준 회장)가 5일 제433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줌을 통해 개최했다. 이날 이형식 교수(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가 ‘조선통 세키야 데이자부로(関屋貞三郎)와 조선통치: 선교사, 신사참배 문제를 중심으로’이라는 주제로 발제하고, 김승태 목사(생명평화교회)가 논찬했다.

◆ ‘조선통’ 세키야 데이자부로

이형식 교수는 “일본YMCA 총주사 사이토 소이치(斉藤惣一)는 생전의 세키야에 대해 조선인들과 교류가 많았고, 특히 가난한 유학생들을 도왔고, 만년에는 기독교신자가 되었다고 회상하고 있다”며 “여기서 등장하는 세키야는 대만총독비서관, 관동주 민정서 사무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즈오카현 지사, 궁내차관, 중앙조선협회 이사, 중앙협화회 이사장, 귀족원의원, 추밀고문관을 역임해 다이쇼, 쇼와 초기의 궁중관료로 대표적인 ‘조선통’의 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어 “무단통치 시기에는 약 10년간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으로 식민지 교육정책을 입안, 실행했다”며 “1926년부터 1946년까지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OB들이 도쿄에서 조직한 식민지협회인 중앙조선협회 이사를 장기간 역임했고 궁내차관을 그만두고 나서는 전문이사에 취임하여 사실상 협회를 이끌면서 신사참배, 창씨개명, 동아일보 폐간, 일본어 상용, 참정권 문제, 패전 후 재조일본인의 귀환문제 등 통치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했다.

더불어 “1939년부터는 재일조선인의 통제단체인 중앙협화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재일조선인 정책에도 깊이 관여했다”며 “나아가 세키야는 궁내차관, 귀족원의원, 일본은행 고문, 추밀고문관 등을 역임하는 등 ‘조선통’ 가운데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지만, 궁내차관 시기의 정치사상과 정치활동을 다룬 연구와 세키야가 관여한 조선인 참정권 문제를 다룬 논문 이외에는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부족하다”고 했다.

◆ 세키야와 기독교 문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33회 학술발표회 개최
이형식 교수가 발제를 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줌 영상 캡처

그는 세키야와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해 “세키야는 아내를 통해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고, 목회자가 된 아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며 “하지만 천황의 최측근이었던 만큼 세키야에게서 기독교는 구국제민(救國濟民)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어 “기독교 신앙을 개인의 자유로 인정하면서도, 조선 기독교도들의 집단적 저항 가능성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며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보였으나, 윤치호가 미나미에게 굴복하고 장로교도 신사참배를 결의하면서 이후에는 문제 제기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세키야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재임 시기에는 식민지 교육을 통해 조선인의 '동화'를 낙관했으나,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현실에 부딪히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며 “이후 궁내차관으로 승진하면서 조선과 거리를 두었지만, 전무이사로 다시 중앙조선협회에 복귀하며 조선 문제에 재차 관여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40년 동아일보 폐간과 창씨개명 강요를 둘러싸고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과 갈등을 빚었다”며 “세키야는 황민화 정책의 급진적 추진이 제2의 3·1운동을 유발할 수 있다며 점진적 시행을 주장했지만, 미나미는 이를 무시하고 정책을 강행했다”고 했다.

이 교수는 황민화 정책이 본격화된 시기를 “저항과 협력의 접점조차 사라진 숨 막히는 정치 공간”이라며 총독부 정책의 하향 강압적 이양과 민중의 억압감 증대라는 구조적 문제를 지적했다.

아울러 “‘차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일부 해석은 지나치게 확대 해석된 측면이 있으며, 실제 조선군과 총독부 내부에서도 강제성을 인정한 바 있다”고 했다.

한편, 이날 이어서 서동준 박사(에든버러대)가 ‘한국 로잔운동 수용사(1974-1988)’라는 주제로 발제하고, 최형근 교수(서울신대)가 논찬했다.

◆ 한국의 로잔운동 수용 두 가지 방향에 대해

서 박사는 “1974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의 로잔운동 수용 양상을 분석한 결과,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의 수용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며 “먼저, 주류 복음주의권을 중심으로 한 수용으로, 이들은 세계복음화의 긴박성 한국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로잔운동을 해석하고 수용했다”고 했다.

이어 “둘째로 1980년대 새롭게 등장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수용으로, 이들은 로잔언약을 통해 사회적 책임의 신학적 정당성을 발견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다”며 “한국에서의 로잔운동 수용은 단일한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각 수용 주체의 세대적 배경, 그리고 그들이 더욱 중요하게 여긴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다양성은 칼 헨리가 지적한 ‘교회의 사회정치적 참여를 둘러싼 현대 복음주의 내의 갈등과 모호성’이 한국적 맥락에서 어떻게 표출되었는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아울러 “로잔 언약 자체가 가진 복합적 성격은 국제무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에서 또한 복음주의 내의 다양한 목소리와 입장들이 공존하면서도 갈등하는 양상을 보였다”며 “이는 복음주의 운동이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해석과 실천이 경합하는 역동적인 장(場)임을 확인시켜 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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