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 정병준)는 최근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을 통해 제441회 학술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발표회에서는 근대 한국 여성교육의 형성과 유신체제 시기 한국 개신교의 반공주의 양상을 주제로 한 두 편의 발표가 진행됐다.
이날 △김성은 교수(대구한의대)는 ‘룰루 프라이(Lulu E. Frey) 서신을 통한 일상과 내면의 재구성; 여성교육의 실천’을 △한강희 교수(한신대 연구교수)는 ‘유신체제 시기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선교 자유 문제와 개신교 반공주의 분화’를 각각 발제했다.
◇ 룰루 프라이 서신을 통해 본 근대 여성교육의 현장과 내면의 기록
김성은 교수는 발표를 통해 룰루 프라이(Lulu E. Frey, 1868~1921)를 근대 한국 여성 고등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개척자이자 이화학당의 정신적 설계자로 평가했다. 그는 “프라이는 1893년 20대의 젊은 나이에 조선에 입국해 1921년 별세하기까지 약 30년간 이화학당 교사이자 제4대 당장으로 헌신하며 생애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조선에서 보냈다”고 했다.
김 교수는 “1893년부터 1921년까지 작성된 120통의 프라이 서신을 분석하며, 이 편지들이 낯선 땅 조선에서 여선교사가 겪어야 했던 신체적 고투와 정서적 고립, 그리고 이를 교육적 소명으로 승화시켜 나간 주체적 정체성 형성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며 “해당 서신들은 단순한 개인 기록을 넘어, 여성 선교사가 근대 교육의 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재구성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 자료로 평가됐다”고 했다.
◇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프라이, 공적 사명으로 승화된 개인의 고통
김성은 교수는 프라이 선교사의 첫 번째 역사적 의의로, 그를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한계를 공적 사명으로 치환한 ‘전문직 여성(Professional)’로 규정했다. 김 교수는 “프라이는 낯선 풍토와 열악한 환경이 주는 감각적 피로와 질병을 회피하지 않았으며, 몸이 보내는 고통의 신호를 ‘과로’ 혹은 ‘선교사의 의무’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김 교수는 “제 일이 여기 있으니”라는 프라이의 고백이 향수병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적인 자아를 ‘이화의 선교사’라는 공적 자아로 전이시킨 결정적 선언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프라이의 엄격함은 단순한 개인적 성향이 아니라, 조선 여성을 주체적인 지도자로 길러내기 위해 자신과 제자들에게 동시에 부과한 교육적 표준이었다”고 설명했다.
◇ 여성 연대와 파트너십에 기반한 리더십의 형성
두 번째 의의로 김성은 교수는 “프라이 선교사의 리더십이 ‘여성 연대의 힘’과 ‘인간 존중의 파트너십’에 기반하고 있었다”며 “프라이는 정동 이화학당을 중심으로 독신 여선교사들이 형성한 ‘유사 가족(Pseudo-family)’ 공동체를 통해 정서적 방어기제를 구축했다”고 했다.
특히 “한국인 조력자 김란사를 단순한 보조 인력이 아닌 학생들의 ‘어머니이자 큰 언니’로 인정하며 총교사의 권위를 부여한 점이 주목됐다”며 “이러한 서구적 비전과 한국인 주체성 간의 전략적 동맹이 이화학당 대학과 설립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 외형보다 내실을 택한 근대 교육 설계자
이어 김 교수는 “세 번째 의의로는 프라이 선교사가 외형적 확장보다 지성적 내실을 우선시한 근대 교육의 설계자였다”며 “프라이는 대학 전용 건물을 짓기 이전, 제한된 예산을 활용해 고학력 교수진을 영입함으로써 교육의 질적 수준을 선점하는 전략을 택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록 프라이는 ‘프라이 홀’로 불린 대학 전용 건물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구축한 인적·제도적 토대는 이후 앨리스 아펜젤러와 김활란으로 이어지는 리더십 승계를 가능하게 했으며, 오늘날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한 이화의 근간이 됐다”고 했다.
◇ 격동의 근대사 속 관찰자이자 행동가로서의 룰루 프라이
김성은 교수는 “프라이 선교사가 조선에 머문 시기가 한국 근대사의 가장 격동적인 시기와 맞물려 있다”며 “프라이는 제국주의의 파고와 식민지의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한 인물이었으며, 제암리 사건 등 고통의 현장에 직접 뛰어든 행동가이기도 했다”고 했다.
서신 자료집에 약 12년간의 공백이 존재해 그의 전 생애를 완전히 복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도 평범한 여성이 역사적 소명과 조우해 비범한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고 김 교수는 밝혔다.
◇ 유신체제 시기 개신교 반공주의의 분화와 선교 자유 문제
이어 발표에 나선 한강희 교수는 1970년대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가 단일한 이념으로 획일화될 수 없으며, 신학적 경향에 따라 분화된 양상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한 교수는 “반공이 보수 개신교만의 이념적 전유물이 아니었으며, 진보 개신교 역시 반공 혹은 승공을 통해 독자적인 선교 이념을 구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보수 개신교는 반공 이념을 통해 유신체제와 유착하며 국가 권력으로부터 다양한 선교적 혜택을 확보하는 전략으로 활용한 반면, 진보 개신교의 반공은 유신체제에 저항하고 정치신학인 인간화 선교를 구현하며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지향하는 이념으로 작동했다”고 분석했다.
◇ 보수 개신교의 공생형 반공주의와 체제 순응
한강희 교수는 “보수 개신교의 반공주의를 ‘공생형 반공주의’로 규정했다. 이는 국가 안보를 강조하는 유신체제의 기조 속에서 공산주의를 무신론적 유물론으로 인식하고, 이를 교회와 정부가 함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인식 속에서 보수 개신교는 유신체제의 반민주적 구조에 대한 비판 없이 정부 기조에 순응했으며, 반공을 신앙의 수단으로 설정해 복음 전파와 국가 안보를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였다”며 “그 결과 유신체제를 종교·정치적으로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평가했다.
◇ 진보 개신교의 생존형 반공주의와 그 한계
또 “반면 진보 개신교, 특히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반공주의는 ‘생존형 반공주의’로 규정됐다”며 “이는 반공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에큐메니컬 신학에 기반한 인권과 자유의 확보라는 탈정치적 가치에 근거해 체제 비판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 교수는 이러한 생존형 반공주의 역시 시대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장이 인권과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냉전적 체제 경쟁과 반공주의의 인식 틀 안에 머무른 사례가 적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선교가 반공 혹은 승공의 하위 개념으로 축소될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끝으로 한 교수는 “1970년대 개신교 반공주의가 획일적인 흐름이 아니라, 신학적 성향에 따라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됐다”며 “이러한 반공주의의 분화는 유신체제라는 독재 정부를 인식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낳았고, 유착 혹은 저항이라는 상이한 여정을 형성하게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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