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자이면서도 가장 가슴 뜨거운 복음의 현장을 가진 설교자였던, 헬무트 틸리케는 질병에서 오는 고통으로 몸부림쳤던 시간이 있었다. 삶의 끈을 놓아 버리고 싶은 그 순간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기적과도 같은 치유를 경험했다. 이것은 그를 매우 실존적이면서도 복음주의적인 신학을 고수하게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슈투트가르트 예배당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설교와 가르침을 계속했으며, 수많은 독일 성도들이 그의 설교로 큰 위로와 힘을 얻었다. 특히 당시의 그의 설교는 전운 속에 힘겨워하는 독일의 영혼을 사로잡았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그는 독일 대중이 깊이 사랑한 설교자였고 ‘스펄전 이후 최고의 설교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저자는 책 속에서 “현대인의 진짜 문제는 두 가지 종류로 나타난다. 과거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과거에 대한 두려움은 실존주의자들이 반복한 주제였다. 내 뒤에 있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난단 말인가? 내가 했던 결정들, 그 중에는 옳은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고, 어느 경우든 바꿀 수 없고, 이제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들이다. 내 뒤에 있는 죄책감, 이제는 무마될 수 없는 그 죄책감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난단 말인가? 시간은 미래로 가는 일방통행로와 같아서 과거 내 삶의 상화으로 돌아가서 고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내 과거에 갇힌 죄수이며, 과거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과거는 나를 결정된 존재로 만들 뿐이다”고 했다.
이어 “그렇다면 어떻게 나 자신을 과거의 얽힌 그물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 어떻게 내 삶의 고삐를 다시 내 손에 쥐고, 내 뜻대로 이끌며, 그 억제되지 않는 힘에서 무력하게 끌려 다니지 않을 것인가? 이 질문을 주제로 하여 얼마나 많은 우리 시대의 드라마들이 있으며, 우리는 삶과 삶의 염려라는 주제만 나오면 얼마나 귀를 쫑긋 기울이는가! 나와 미래의 관계도 깨졌다. 인간이 빛나는 유토피아를 그리며 첨단기술과 사회정의가 인류를 낙원의 회복으로 이끌 것이라고 여기던 때는 지나갔다. ‘미래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산상수훈에서는 그 말이 얼마나 다르게 들리는지 모른다. 두려움이 놀랍게 안심으로 변화된다! 여기서 의미하는 미래는 무엇인가? 다시 말하거니와, 그것이 우리가 이 책에서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미래가 이미 시작되어서 우리가 그 안에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현재의 순간과 옛날의 단조로운 근무일과 주일의 지루한 일상에 흡수되지 않는다. 미래의 이름으로 우리는 파격적이고 절대적으로 똑바를 수 있다. 그래서 힘의 대각서이나 지그재그 코스에 밀려다닐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서, 미래가 우선 온다. 그리고 나서 무조거적인 요구, 직선, 올바른 경로가 온다. 그 반대 순서가 아니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이 책의 기원과 내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전후 최악의 시대이던 1946-1948년에 슈투트가르트의 성 마가 교회에서 했던 산상수훈 설교의 설교집의 제4판이다. 그 시대는 여러 모로 인간의 허무, 유혹, 절망, 궁핍을 심오하게 보여주는 전형적인 때였다. 인간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평상시보다 인간의 취약점이 더 노출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의 취약점이 덜 방어되던 한계 상황잉ㅆ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가 어려워질 때마다 우리 삶이 그러한 장으로 이따금씩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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