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막상 전도해야 한다고 할 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된다. 일단 전도를 한다고 하면 입부터 떨어지는 것이 쉽지 않다. 입 안에 침은 마르고, 가슴은 두근거린다. 복음을 전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두렵다. 이것이 전도하는 대부분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사람은 그렇다. 그래서 교회는 저마다 전도 매뉴얼을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매뉴얼이 4영리나 전도폭발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성경은 과연 이렇게 도식화된 전도를 권장하는지 의문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전도를 매뉴얼처럼 가르친 부분은 없다. 왜냐하면 전도는 인격이 인격에게 인격적인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매뉴얼화 된 전도는 무인격적이라는 점이 문제다. 상대방의 고민과 생각엔 관심이 없다. 일방적으로 내가 훈련한 메시지를 기계적으로 전도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성경을 보면, 전도는 전도 받는 사람과 인격적 납득 관계 안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전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도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전도에 대해 몇 가지를 정리해 보자.

첫 번째로 내가 만난 하나님을 간증하는 것이 성경적 전도의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바울은 특별한 사례가 아닌 이상 주로 간증을 사용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전했다. 자신이 과거에는 기독교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 놀라운 변화를 맞이했다고 전한다. 바울은 복음이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사건을 전했다. 이것을 바울은 “나의 복음”이라고 표현하곤 했다(롬 2:16; 16:25). 바울에게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그래서 “나의 복음”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나의 복음이 있어야 한다. 남의 다리 긁는듯한 남의 복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복음이 틀려서가 아니라, 거기엔 불도, 힘도, 생명력도 확신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하는 것은 의외로 기술적으로 되기보다는 전하는 사람의 확신과 불 때문이다.

예전에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사촌 누님을 전화로 전도한 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는 대로 자연스럽게 복음을 이야기했다(필자는 주로 이런 식으로 전도한다). 복음을 접하는 사촌 누님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복음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별 거부감 없이 복음에 귀를 기울였다. 이 가운데 사촌 누님의 반응이 의외였다. “너는 네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확신이 있구나~~?” 사촌 누님은 전도의 내용보다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촌 동생의 태도에 충격적으로 반응했다.

전도는 이렇게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전도는 일상의 삶과 대화 속에 나의 복음이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복음에 대한 흥분이 있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산다면, 복음은 자연스럽게 전파된다. 지난 칼럼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우리 삶의 삶이 ‘보이는 말씀’이 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전도의 수단이 된다. 내가 과거에 만난 하나님만이 아니라, 현재 내가 만나고 있는 하나님을 나누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도가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모습 속에서 불신자들은 복음의 실용성을 보게 된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복음에 무관심한 이유가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기 일상, 혹은 현재의 필요와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복음이라면 죽기 전에 믿어도 늦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전도는 일상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복음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면서 전파된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이 우상에 미혹되는 이유는, 우상이 그들의 삶에 가장 실용적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7:21을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한다. 이는 우상숭배나 철학이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에 관심을 둔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우상이나 철학을 따르는 것보다 더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얼마나 더 실재적인 분인지 입증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관하시며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의 일상을 다 주관하시는 분임을 논증했다(행 17:26-28). 그리고 크고 두려운 심판과 구원에 관해 설명했다.

두 번째로 성경적인 전도는 복음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것을 사도행전에서는 ‘preaching’(설교)이라고 한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전도에는 ‘preaching’(설교)이 많이 언급된다. 사도행전 5:42을 보면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tech)와 전도(preach)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가르침과 설교를 지속했다.

세 번째로 관심 가져야 할 전도 성경적 전도 방식은 ‘토론’이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의외로 전도에 자주 사용된 방식은 ‘토론’이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쉬제테오’라고 한다. 영어로 ‘dispute’ 혹은 ‘debate’로 번역되기도 한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의 확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증거나 선포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복음에 대해 반대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논리적인 토론을 하기도 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변증을 통해 전도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려면 당연히 성도들은 성경과 교리에 눈이 밝아야 한다. 성경과 교리에 눈이 어두우면 도리어 세상 사람들에게 설득되고 만다. 이 문제가 오늘날 전도가 잘 안 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아니 세상에 전도 당하는 상황이 됐다. 세상 사람들은 철학과 사회 과학, 진화론 등으로 우리의 신앙을 흔든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싸울 수 있는 신학적, 성경적, 교리적 무기를 끊임없이 제공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무방비 상태다. 신약 성경을 보면 사도들은 성도들이 삶 속에서 오는 다양한 도전에 대처하도록 도왔다. 헬라 신화와 철학에 의한 도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르쳤다. 단순히 방어적 목적만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전도의 수단으로 삼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실제로 사도들은 복음을 방어하는 상황을 전도의 기회로 삼아 많은 사람을 복음에 초대하기도 했다.

결론으로 들어가자. 복음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 가운데 인격이신 주님을 전하는 것이다. 인격을 전하는데 인격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인격적인 주님을 전하는 방식도 중요하다. 우리가 불신자들의 삶과 고민에 관심을 두고 성경적인 길을 제시하면서 전도가 된다. 더 나아가 프란시스 쉐퍼의 가르침처럼 불신자들의 정직한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한 답변을 하는 것(debate)이 전도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실제로 쉐퍼는 이런 방식을 통해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했다. 반면 부정을 위한 부정직한 질문은 답변의 가치가 없다. 정말 알기를 원하는 질문에만 답변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답변은 복음에 대한 모독으로 갈 수 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전도 대상으로 삼는 것은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누가복음 4:18-19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복음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를 대상으로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 당시에도 복음의 대상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율법사들처럼 교만하고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자각하고 심령이 가난해진 세리와 창기들의 몫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아픔과 딜레마를 복음으로 해석해 주시면서 전도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 포로 된 자들의 하나님, 눌린 자들의 하나님, 고아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셨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표현하기도 하셨다.

우리 주변에 자녀 양육으로 마음이 가난해진 사람들, 부부 생활의 어려움으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 경제적으로나 인간관계의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복음의 대상이다. 요즘처럼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황폐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성령의 말하게 하심과 능력을 구하면서 전도해야 한다. 우리의 인간적인 프로그램이나 전략을 사용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신 것처럼 성령의 능력과 인도를 따라 자연스럽게 내 삶을 변화시킨 하나님, 나의 가정을 변화시킨 하나님, 나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면 그것이 전도가 된다. 그 가운데 교리적 설명이 필요하고, 신학적 토론도 사용하기도 한다. 전도란 나에게 먼저 ‘도’(복음)가 있어야 전할 수 있다. 나에게 도가 없다면 전도라고 하는 행위가 미끼(?)를 던져 교회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이것이 오늘날 전도가 이 성경적으로 가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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