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평양신학교 재건의 갈등

소기천 교수
소기천 교수
다음에 소개되는 평양신학교 재건에 관한 내용은 2013년 5월에 네 주에 걸쳐서 진행된 “역사와의 대화”에서 박창환이 직접 밝힌 생생한 증언이다.

박창환은 일제 강점기에 미국북장로교회가 평양과 황해도, 서울, 그리고 충청도와 부산까지 이르는 대각선 방향으로 전도에 힘쓰며, 평양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신학교육을 장려하는 일을 하였다고 평가한다. 이와 달리 미국남장로교회는 함경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런 전통은 1930년도에 북장로교 지역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인 박형룡, 백남준, 윤하영, 한경직, 김재준, 송창근, 최윤관, 윤인근 등은 프린스톤으로 유학을 가고, 함경도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원산에서 평양으로 가는 철도가 없었기 서울로 가서 곧바로 일본으로 넘어가서 동경신학교, 청산학원, 동지사대학, 관서학원, 고베신학교 등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 유학을 간 사람은 모두 성경이란 용어 대신에 성서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복음동지회를 만들어서 활동을 하였다. 이들과는 달리, 중국에 가서 신학을 졸업한 사람들로 전재선 이하경 이대영 홍대위 김경도(김중은 전총장 부친) 등이 있다.

공부를 마친 후 한국인 최초로 신약학 학위를 받은 남궁혁 박사는 1925년대에 평양신학교에 교수가 되었지만, 한경직은 신의주 교회로 가고 박형룡은 조직신학 교수가 되지만 김재준은 평양신학교의 교수가 되지 못하고 숭인상업학교의 성경교사가 된다. 같이 공부하고서 하나는 조직신학교수가 되고 하나는 중학교 성경교사가 되었으니 얼마나 그 갈등이 심하였을까?

1938년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에 박형룡은 그의 제자들을 모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박형룡은 신사참배 결의 후에 신학교가 문들 닫자 동경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떠난다. 그러나 다시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신학교는 문을 열어야 된다는 흐름이 일어나서, 15명의 위원을 세워서 채필근을 중심으로 신의주 총회에서 신학교 문을 여는 의논을 한다. 당시 채필근을 일본 제국이 인정을 해주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신학교의 문을 열자는 의견이 모여지게 된다. 그러나 윤인구 송창근 김재준 등이 서울 신학교를 의논을 하지만, 도리어 함평양도(평안도와 함경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신학교의 재건 운동이 다시 고개를 들어서 이인식과 김승길이 총회장을 지낸 터라 일본 역사와 역대 왕을 다 외우고 있던 채필근을 내세워 평양에서 다시 신학교를 개교한다. 그러나 다시 문을 연 평양신학교는 탄력을 받지 못하던 터에, 1945년 해방 이후에 소련 강점기에 평양신학교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게 되자 서울에서 신학교를 열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다시 일어났다.

한편, 평양까지 가지 않고 신학을 하자는 움직임이 서울을 중심으로 전필순, 김정로, 김광연, 유호준 등의 기호지방과 호남지방과 경상도 지방의 사람들은 일본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해방이 되자, 한상동, 이기선, 주남선 등의 옥중 지도자들이 신사참배 한 목사들에게 몇 달간 근신하라고 선포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자 진해 이학신이 시무하는 진해교회로 가서 고려신학교를 세우는데 박윤선 한상동 주남선 등이 핵심을 이룬다.

다른 한편, 1946년 4월 총회에서 조선신학교가 인가를 받고, 총회 직영 신학교가 된다. 이로써 평양신학교, 고려신학교, 조선신학교로 3분화된다. 조선신학교는 동자동의 천도교 건물에 신학과 영문과를 두어 남성들을 가르치는 조선신학교를 시작하고, 여자신학교는 영락교회가 시작된 영락정 인근에 있는 천도교 건물에서 신학을 하였다. 이때 김재준이 조선신학교에서 신신학을 가르치게 되자, 박형룡의 “신학난제선평”이란 졸업논문을 통해 역사비평을 반대하고 당시 모든 신학을 비판한 연구를 읽은 학생들이 1947년 봄에 천호동에서 김재준에게서 배운 최문환이 설린촌을 만들어서 “이상촌”이란 책을 써서 안식일지라고 농번기에는 새벽기도 후에 농촌에 나가서 일하자 신학교에서 논쟁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51명의 주동 학생들이 모두 퇴학처분을 받게 된다.

이들 중에서 40여명이 신앙동지회를 만들어서 노량진에 가서 합숙을 하는 중에, 고려신학교가 신양에 있는 박형룡을 1947년 9월에 모셔오자 창덕궁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한 후에, 진해로 신앙동지회의 회윈들이 모두 따라 내려갔지만, 서울에서 신학교를 해야 한다는 열망이 높아져서 1948년 6월 9일에 남산에서 일제 신사자리의 별관 중에 북쪽에 있는 건물하나를 얻어서 장로회신학교를 열게 된다. 이미 그 자리는 김양선이 성도교회로 모이고 있었다. 이것으로 평양신학교의 후예라는 정통성이 이어진 것이다. 이때 신앙동지회 회원들은 한 달 공부한 후인 7월 9일에 제1회 졸업생이 되고, 1949년 총회에서 이북에서 온 노회를 승인하면서 장로회신학교도 총회 직영인가를 받는다. 이로써 총회 직영 신학교가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따로 존재하게 되고, 1950년 총회에서 두 신학교를 합동하는 안을 총회에 헌의여 한경직이 주도하여 진행하지만, 임원에게 맡겨서 잘 해결하려고 청주에서 모여 노회에 승인하는 일을 임원회가 가결하였지만, 625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부산 대천동의 부산총회에서 1951년에 신학교 합동안이 나와서 조선신학교도 아니고 장로회신학교도 아니라, 총회신학교로 하자고 하여 감부열이 학장을 맡게 되고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열고, 2대 학장에 킨슬러가, 3대 학장에 박형룡이 맡게 된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이런 합동안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김재준을 학장으로 계속 주장하기에 이르러서 그를 중심으로 그대로 남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에 남산으로 교사를 다시 옮긴 총회신학교에서 박형룡이 적산 신궁자리를 교사로 사자고 하는 중에 남산 신궁터에 국회의사당을 지으려는 국가의 결정을 모르고 잘못 계약하여 선교사들이 준비한 당시 3천만 원이 사기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김양선 김규당 강신명 등이 사표를 종용하여 박형룡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미묘한 통합과 합동 사이의 갈등이 일어난다. 소위 정통 신학은 자기들의 교리를 성경보다 앞세우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곧 정통신학이 교리를 성경보다 위에 놓는 잘못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정통신학을 가르치는 조직신학 교수가가 가장 높이 평가되는 상황에서 ‘박형룡 밖에 없다’는 인식이 확대된다. 그래서 합동은 3천만 원 사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낸 박형룡을 구명하는 운동을 벌이게 되고, 그를 다시 불러서 신학교를 이어가자는 운동을 하게 된다. 신복윤 조동진 박창환 등이 복음주의자들로서 에큐메니칼과 NAE를 동시에 당시 한국교회가 잘 받아들이는 전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형룡을 밀어낸 통합이 에큐메니칼파요 용공주의자라는 거짓말을 퍼트려서 박형룡을 보호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이와는 별개로 김치선이 개인적인 야심으로 남대문교회에서 대한신학교를, 김규당이 후암동에서 시작한 신학교를 새문안교회로 옮겨 강신명을 중심으로 한 서울장신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계속)

소기천(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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