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교리의 시대

1) 부끄러운 혼란

소기천 교수
소기천 교수
1938년 2월 평북노회가 가장 처음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나면서 혼란은 시작되었다. 드디어 1938년 9월 9일에 제27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열리게 될 때, 이미 당시 23개 노회 중에서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상태였다. 이 때에 일본순사가 총회석상에 난입해 있던 상황에서 강압적이고 불법적인 절차에 의해 “당국에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식이라 선언하니 우리 총회도 신사참배하기를 경정함이 가합니다.”라고 선포되었다.

이 부끄러운 일로 신학교는 무기휴교를 선언하게 되었고, 이 여파로 1939년 3월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 13명이 서울에서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939년 9월에 제28차 최회의 인준을 받아 설립하게 된다. 그러나 총회신학교육부는 평양신학교를 서울에 있는 조선신학교가 대신할 수 없다고 인식하여, 1940년 2월에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개교하게 되고, 이것이 후에 감리교의 성화신학교와 통합되어 기독신학교로 재편되고 1950년에 첫 졸업생을 내고 문을 닫게 된다.

1949년 9월에 제35회 총회는 총회신학교를 신설하고 교장에 박형룡 박사를 인준하면서 앞서 1940년에 개교한 조선신학교와 합동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두 신학교가 합동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이미 1946년에 신사참배를 반대한 목사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신학교를 기초로 1952년에 고신교단이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2) 한국전쟁 전후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3시에 북한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남침을 강행하였다. 민족상쟁의 아픔과 혼란 속에서도 부산 중앙교회에서 특별위원회가 모여. 1951년에 제3의 신학교가 대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란 이름으로 개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0년에 이미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원을 중심으로 신학교를 운영해온 김재준 박사는, 드디어 1953년 6월에 기장교단으로 분리해 나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1959년에는 소위 3천만환 사기사건이 터지게 되면서 박형룡 박사가 사임하게 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 일이 화근이 되어서 통합교단과 합동교단이 분리하게 되었다.

3) 1937-1959년의 교과과정

신사참배와 전쟁의 혼란기를 겪던 시기이므로 거의 모든 자료가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신학교는 개교목적을 “복음적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신학을 연구하여 현조선교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이 두고 있었다. 그러나 1937-1950년까지 조선신학교는 실제로 신학적 혼란기를 거치는 관계로 제대로 된 신학교육을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1951년에 전쟁 중에 임시 교사를 대구에서 마련하여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는 총회신학교로 약칭하면서 출범되었는데, “총신은 바울, 어거스틴, 칼빈의 신학정로를 계승하여 온다.... 총신의 목적은 많은 소리의 혼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려는 남녀를 양성하는 것임을 밝히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상, 참길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방향을 정하였다. 이때부터 신학교는 1년에 2학기제로 운영되었다.

당시 조선신학교에 운영되던 신약학 교과목은 신구약석의, 신약신학, 신약석의, 신약원전강독 등이 있었다. 특히 혼란기이었기 때문에 전공 선택과 필수가 구분 없이 교수되었다. 1952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의 교과목에는 필수와 추가필수가 구분되어 교수되었는데, 당시 신약학 필수과목으로는 공관복음, 헬라어, 신약총론, 신약사, 공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갈엡석의(원어사용), 빌골빌석의(원어사용), 목회서신, 보통서신, 계시록 등이 교수되었으며, 선택과목으로는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고린도후서가 교수되었다.

이 시기에 성경교육은 성경 전체를 각 권별로 모두 가르쳤다는 점에서 성경중심의 교육과정이었다. 특히 성서신학을 구약학과 신약학으로 엄격하게 구분하여 가르친 것이 특징이다. 이런 교과 과정에서 개론과목들과 필수과목들이 구분되었으며, 선택과목들도 개설되어 학생들에게 성경과목을 비중을 높였다.

5. 재건의 시대

1) 장로회신학대학교

1961년 4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대학이 설립인가를 받았고, 1962년 3월에 문교부에 의해 4년제 정규대학으로 정비되면서 대학원 설립인가도 받았다. 1966년에 신학석사 과정에 성서학 과정으로 대학원 인가를 받았다.

1974년에 교수회의는 성서신학의 교수률을 34%로 정하고 필수과목을 수를 감축하고 감축된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우선적으로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성서학 과목에 대한 교수률 34%는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1901년 평양신학교가 개교된 직후인 1903년에는 성서과목의 비중에 22.2%, 1904-1915년에는 51%, 1916-1919년에는 45.5%, 1920-1924년에는 42%, 1931년에는 55%, 1952년에는 51%, 1961년에는 44.%, 1966년에는 45%, 1972년에는 25%, 1979년에는 38.4%, 1986년에는 38%, 2009-2010년에는 30%이었다. 이러한 수치는 한 번도 체계적인 성서학 과목에 관한 연구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성서학 수업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1903년에 22.2%로 저조하게 시작된 성서학 과목이 1931년에 55%나 이르던 성서학 과목의 비중이 2023년 장로회신대학교에서 10% 미만으로 떨어진 것은 신학교육이 성경에 기초하기보다는 이념이나 이론 신학에 편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격적이다. 1974년에 장로회신학대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성서학 과목을 34%로 유지하자는 결의는 현재 각 전공 교수들의 과목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스스로 성경에 근거한 신학교육을 무너뜨린 지 122년의 역사 가운데 벌써 50년이 되었다. 50년 동안 허물어진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성서학 과목의 위기를 바로 잡기는 현재 교수들의 자기 전공과목의 밥그릇 지키기의 실상을 미루어 볼 때 불가능한 현실이다.

재건의 시대에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약학으로 가장 공헌을 많이 남긴 분은 박창환 학장이고 그가 평생 가르친 과목이 신약학이기에 다음과 같이 항목을 따로 하여 기술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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