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남궁혁 박사의 나라사랑

소기천 교수
소기천 교수
남궁혁은 한국의 본회퍼와 같은 신학자이다. 본회퍼가 나치 정권에 맞서서 신학자의 살아있는 양심을 유감없이 발휘한 인물이라면, 남궁혁은 구한말에 의지할 것 없던 민심을 달래고 조선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3.1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침한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어 금식 기도를 하던 중에 순교한 위대한 신앙의 위인이다.

남궁혁의 나이가 약관 16세이던 1898년 4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 변혁이 있었는데, 구한말에 친러시아 정책을 쓰던 민비(閔妃)를 일본 자객이 살해하고 한일 의정서(韓日 議政書)를 성립시켰다. 그 후에 일제는 고종 황제를 위협하여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민족적으로 위태한 때에 남궁혁은 한국초기교회가 민족이 당면한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남궁혁이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마침 방학 중에 광주에 머물러 있던 남궁혁은 이 일을 주도하게 되었다. 남궁혁은 자신의 가옥 앞에서 양림동 일대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현재 광주시는 사회단체의 제안으로 남궁혁을 기리는 조형물을 설치하여 오고 오는 세대에 3.1 정신을 전하고 있다.

남궁혁의 3.1 만세운동에 광주 양림교회 성도들이 대거 참여하자 일제는 북문안의 교회당 터를 몰수하였다고 한다. 광주의 3.1 만세운동은 양림동의 남궁혁의 집에서 양림교회 성도들(김강, 최병준, 황상호, 강석봉, 한길상, 최영균, 최정두, 서정희, 김태열, 홍승애 등)과 비밀 독서모임 회원들(정상호, 김복수, 박팔준, 김용규, 한길상, 최한영, 강석봉, 김태열, 강생기 등)을 주축으로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 서정희는 시민들을, 김강은 양림교인들을, 홍승애는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을, 최병준은 숭일학교 학생들을, 김태열·최영균·김용규 등은 시내 각 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맡았다. 최한영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국가 등의 인쇄를 맡았다. 자금동원은 이기호가 맡았다. 드디어 3월 10일에 만세운동의 물결은 본정을 거쳐 광주법원을 지나 광주경찰서까지 진행하였다. 이런 와중에 100여명이 체포되고 이 가운데 12명이 양림교회 성도로 확인되었고, 그 중 김철·최병준·김강·최한영·황상호·김철주·홍승애·박애순 등은 실형을 선고 받았다. 후에 소록도 나환자촌과 광주 기독청년회(YMCA)를 설립해 성자로 불렸던 장로 최흥종도 서울에서 만세시위 중 일제에 체포되었다.

남궁혁의 나라사랑은 그의 후손에게도 그대로 연결되어 1990년부터 아시아 소사이어티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남궁건(미국이름 토니 남궁)은 지난 20년 가까이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양자 간에 대화의 다리를 놓아온 숨은 공신의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남궁건은 UC 버클리대학의 스칼라피노와 함께 처음 북한을 방문, 미·북 간 첫 고위급회담을 주선했고, 이후 여러 차례 북한과 미국을 연결하는 비공식적 고리 역할을 해 왔다. 몇 년 전부터는 미국 내 대표적 북한통으로 알려진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의 아시아 문제 상임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남궁건은 한국 기자들에게 “북한은 저를 믿을 만한 중재자(honest broker)로 봅니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일한다고 신뢰하죠.”라고 자신의 역할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남궁건은 독립운동가 남궁억의 증손자이며, 한국인 최초로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신약학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평양신학교 교수를 지낸 남궁혁의 손자다. 남궁건은 자신의 조부가 일제의 박해를 피해 이주한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자 그의 가족은 1950년 홍콩으로 옮겨갔고, 그후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일본에 머물면서 외국인학교를 다닌 그는 미국 대학으로 진학했고, UC 버클리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반도 전문가 로버트 스칼라피노와 함께 동아시아 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남궁건이 남긴 다음의 말이 그의 조부인 남궁혁의 나라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일본에 살 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증조할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조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수천 번은 들었을 겁니다. 한반도 전문가가 된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3) 남궁혁의 신학

남궁혁은 한국 신학의 선구자이다. 한 시대를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실한 믿음으로 살았던 남궁혁은 한국 신학의 초창기에 대들보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남궁혁은 두 차례에 걸친 미국 유학을 통하여 1924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27년에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가 공부한 것은 성서학이었다. 귀국 후에 평양장로회신학교의 교수직을 수행하는 동안에 그는 성서 번역 사업과 성서 주석 발간과 『신학지남』의 편집과 같은 많은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글을 남겼다. 그가 신학지남에 남긴 글을 종합하여 보면, 필자가 보기에 그의 전공은 신약신학임이 틀림없다.

남궁혁의 로마서 강해는 2004년에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최초의 신학자 남궁혁의 로마서 강해』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의 글이 모든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서 오늘 한글세대가 읽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모두에게 알기 쉬운 한글로 풀어서 출판한 것이다. 로마서 강해 외에서 그는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와 골로새서에 관한 강해 설교를 『신학지남』에 연재하였다. 이 점에서 그의 연구는 주로 바울 신학에 중점을 두고 전개되었다. 그가 바울 전공 신학자라는 사실은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예수와 바울의 신학,” “예수의 신학과 바울의 신학,” “에베소 서신에 보인 영복,” “바울의 생애 관,” 등의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남궁혁의 신학은 결코 이론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온 몸으로 노력하였으며, 그 가르침을 실생활에 실천하고자 전심전력을 기울였던 인물이다. 이 같은 노력은 그가 전개한 기독교 정화운동을 통해서도 꽃을 피웠다. 그는 “조선 교회는 겨우 반세기도 지나지 못한 기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늙을 대로 늙고 상할 대로 상하여 그 가련한 병적 상태는 가히 눈으로 보기 어려울 만치 되었다.”라고 한탄하면서 정화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삶을 변화를 지향하고 있는 그의 신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교훈을 주었는데, “일하러 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일심단합,” “그리스도의 일꾼인 우리,” “그리스도를 평범한 생애에서 봉사하자,” “도끼날 잃은 일꾼,” “영생 얻는 회개” 등의 설교들은 당시 할 일 많은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대사회적 사명감을 일깨우고 청년들로 하여금 사회봉사에 매진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남궁혁의 신학은 개혁신학의 원리에 충실히 서있었다. 그는 개혁신학자로서 자신의 신학적 근거를 칼빈에게서 찾았다. 이를 위해 그는 칼빈을 단지 교회적 신앙생활의 기초 위에서만 그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고, 그 범위를 정치생활과 과학과 예술과 인간 삶의 미래 전반에까지 넓혀서 이해하였다. 그는 이러한 개혁신학의 원리를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서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 바울 다음으로 중심적 인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꼽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바울의 뒤를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 사상을 체계화하였으며, 그 영향력이 중세를 이어 종교개혁의 시대에 까지 내려왔다고 평가하였다. 여기서 그가 기독교 사상을 중심 주제로 삼은 것이 성서의 정경론과 삼위일체론이다. 그는 이런 정통신학에 입각하여 기독교 이단에 관한 연구도 병행하면서, 단성론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남궁혁은 오늘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것과 거의 일치하는 통합적 신학을 추구하였다. 그가 오랫동안 『신학지남』의 주간으로 있는 동안에, 다양한 사람들의 글을 실어주었다. 비록 그 자신은 칼빈의 정통신학에 입각한 개혁신학에 서있었을지라도, 당시에 근본적인 신학의 경향성을 가진 분들이나 혹은 그 반대로 급진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신학의 경향성을 가진 분들에게도 집필의 기회를 주었다.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기품이 있는 유교적 전통가정에서 성장하여 자연스럽게 중용의 도에 익숙한 그의 인격에서 우러나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포용과 수용의 덕을 갖추고서 당시 신학계가 좌와 우로 나누어져서 논란을 벌이던 시절에 과감하게 대화와 토론의 장을 제공하였다. 그는 신학적 독선과 아집을 경계하면서 오히려 상호 존중이라는 큰 인격의 틀 속에서 한국 신학이 통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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