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슬람의 여성 인권유린

꾸란(5:5)에 보면 무슬림은 기독교 여성과 결혼을 허락하고 있지만, 이교도 여성과 결혼하는 것보다 이슬람 노예와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가르친다(2:221). 반대로 기독교 남성들과 무슬림 여성들의 결혼은 허용되지 않는다.

성경보다 700년 후의 기록인 꾸란이 여성에 관해 언급한 것을 마태복음과 비교해 보자. 예수께서는 여성을 낮추어 본 적이 없는데, 무함마드는 노골적으로 여성을 낮추어 본다.

꾸란

꾸란은 여성보다 남성이 위에 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특히 알라가 서로 간에 우열을 붙인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이슬람에서는 남성이 영원히 여성 위에 서있다.(꾸란 4:34) 꾸란 2장 187절도 ‘남성은 여성의 위에 서있다’고 말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예수에게 데려왔다(요 7:53-8: 11). 그들은 모세율법이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에게 어떻게 할지 간교하게 물었다. 예수께서는 남녀를 모두 죄인이라는 관점에서 동등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여성만 정죄할 수 없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가진 선한 양심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꾸란에서는 간음한 여인을 사람들에 무함마드에게 데려오자 “뱃속에 아이가 있느냐?”고 묻는다. 여인이 겁에 질려 “그렇습니다”라고 답하자, 무함마드는 “아이가 젖을 뗄 때에 다시 데려오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2년 후에 여인은 아이를 붙잡고 무함마드 앞에 다시 선다. 그러자 무함마드가 “간음한 여인을 골짜기에 데려다가 목이 차오르도록 흙에 묻고 난 후에 돌로 치라”고 판결한다.

꾸란은 간음한 사람에 대해 백 대씩 때리라고 말하지만(24:2), 사실상 남성에게 내리는 형벌보다는 대부분 여성에게 내려진다. 이슬람 사회를 지탱하는 법인 샤리아는 사랑과 용서보다는 형벌을 강화함으로써 남성이 여성보다 위에 있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남녀가 모두 지은 받은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꾸란이 남성에 관해서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마음에 드는 여성 2명, 3명, 혹은 4명과 결혼해도 좋다’(꾸란 4:3)면서 일부다처제를 두둔할 때, 21세기의 일부일처제와 양성 평등사상에 어긋나는 이중적인 가르침이다.

바까라에 남성에게 유리하고 여성에게 불리한 조항들이 있다. 무슬림의 결혼은 전적으로 남성 위주다. 남성은 결혼할 뜻을 여성에게 쉽게 비친다거나 때가 되기 전에 혼인 절차를 굳혀서는 안 되고(꾸란 2:235), 여성에게 지참금을 주기 전에 이혼해도 죄가 안 된다(꾸란 2:236). 증인채택에서 남성 한 명에 여성 두 명이 필요하다고 함으로써 여성을 남성의 절반에 해당하는 가치로 간주한다(꾸란 2:282). 여성 한 명이 잘못 증언하면, 다른 한 사람이 그 증언을 보충해주기 때문이다. 이로써 여성 증언 자체를 평가절하한다. 남성 한 사람에게 할당된 재산도 여성 두 명에게 할당된 금액과 같다(꾸란 4:176). 특히 ‘바보’에게는 재산을 분배해서는 안 되는데(꾸란 4:5), 바로 그 ‘바보’가 꾸란의 전후 문맥상 여성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무함마드가 여성을 경멸하는지 그 단면을 보여준다. 꾸란은 여성에게 불리한 재산분배 원칙을 이슬람법으로 못 받고 있다(꾸란 4:11). ‘바보’를 뜻하는 아랍어 수파하와 관련하여 922년에 죽은 알 타바리(Al-Tabari)가 남긴 꾸란 해석인 타프시르(Tafsir)에 의하면 “바보 중에 가장 바보가 여성”이라고 비하한다.

니사아에 간음과 쾌락의 선에 대한 모호한 가르침이 있다. 자기 아내 이외의 여성과 간음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 정상적인 쾌락을 얻으려면 돈을 주고 그 쾌락을 얻을 수 있다(꾸란 4:24). 더구나 재산이 부족하여 신분이 좋은 여성을 얻을 수 없을 때는 하녀로 대신할 수 있다(꾸란 4:25). 이렇게 남성의 간음에 관하여는 구제책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해서는 간음하지 말라고 단정 짓는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여성은 조건 없이 남성에게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꾸란 4:34). 아랍어로 부인이 남편의 권위에 항거한다는 뜻인 누수즈는 이슬람법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반역과 같은 행동이다.

문화는 현대인에게 옷과 같은 것이라면, 종교는 인간에게 마음과 같다. 옷이 그 나라의 문화를 표현한다면, 마음은 한 인간이 가진 종교를 표현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옷차림에 민감한 것처럼, 남성보다 여성이 더 종교적이다. 옷이 문화라면 종교는 삶이기에, 남성보다 여성이 옷에 신경을 더 쓰는 것처럼 종교에도 더 열심이다. 근본주의 이슬람이 평화를 가장하고 문화의 옷을 입고 한국 사회에 다가온다는 사실을 중시하여, 우리는 이슬람이 여성을 비하하며 낮추어 보며 더 나아가서 여성을 경시하는 문화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을 고발해야 한다.

한 마디로 이슬람은 여성을 경멸한다. 그런데도 한국 여성들이 무슬림의 애정 공세에 넘어가서 3천 쌍이나 넘게 결혼하였다. 왜 결혼했느냐고 물어보면 결혼하면 남편과 시댁을 구원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답을 한다. 그러나 속아서 결혼한 것이다. 한국 여성이 무슬림과 결혼하여 인권유린을 당한 사례가 너무나도 많다. 정신 차리고 이슬람의 거짓 실체를 깨달아야 한다.

소기천 교수
소기천 교수

이슬람 사회에서 자주 거론되는 명예살인도 여성을 철저히 유린한다. 근본주의 이슬람은 여성이 옷에 향수를 바르거나 남성이 모인 곳에 지나가는 것조차 창녀와 같다고 여긴다. 이러한 편견이 여성을 단순하게 속박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 인권을 짓밟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법인 샤리아에 따라 명예살인도 벌이는 끔찍한 범죄로 이어진다. 이 점에서 이슬람법인 샤리아는 21세기의 보편적인 가치인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도 초월하기에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꾸란은 “간음한 여인을 집안에 감금하고 죽음이 그녀를 데려가든지 알라가 구원의 길을 열어 줄 때까지 감금하라”(4:15), “나쁜 짓을 한 자는 임종의 순간에 회개해도 아무 소용없다”(4:18)라고 가르친다. 예수께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대하는 이야기와 또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쪽 강도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야기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이슬람은 인권을 짓밟는 종교이기에 21세기 문화와는 그 옷매무새가 다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 이슬람이 문화의 옷을 입고 다가오고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와 배꼽춤 열풍으로 우리의 안방까지 위협하고 있다. 문화의 이면에 인권유린의 발톱을 감추고 있는 이슬람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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