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요환 목사
김요환 목사

오늘날 행위주의가 신앙이 만연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이 믿음의 지표라는 생각은 목회적 관점에서 필요합니다. 또한 이 땅에서의 공공선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실천적 삶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땅히 부과되어야 할 신앙적 가치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수양이나 공로를 통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종교가 아니고, 은혜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행위가 중심이 되는 신앙은 기독교의 차별성을 약화시며 다른 여타의 종교 수준으로 기독교를 격하시킵니다. 특히 정치적 이슈와 사회적 정의의 문제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의 행위를 이끌어내는 것은 설교가 아니고 선동에 가깝습니다. 본래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은 정치적 행위가 아닌 신앙적 행위여야 합니다.

성도들은 매일 일터로 힘겹게 발걸음하며 복음 앞에 바로서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목사, 전도사, 신학생으로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자기 이권과 특정한 한쪽 진영 편에 서서 불필요한 싸움을 붙이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싸움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끼워 팔면서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행위주의 신앙이 이데올로기에 끼여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정말 정의로우신 예수님 마음을 품는다면 복음의 가치부터 다지는 것이 시급합니다. 점점 세상은 악해져 가고, 분별 의식은 무너져 가고, 이단들이 판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행위와 공로 쌓기에 급급하다면 오늘 우리는 중세의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너무 믿음만을 강조하고, 행함이 없어서 작금의 문제가 발생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문제 원인은 행함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꾸준히 지역사회를 섬기고 불우이웃을 돕고 사회참여를 통해 불의를 지적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세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우리가 다른 근본적인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없으니 위선으로 행하고 자기 욕심과 자기 의를 위한 운동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지구 살리기 운동에 전념을 다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보전하고 청지기적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옳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명분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나 최종 목적인 것으로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것은 행위주의 신앙입니다.

본래 환경 운동은 복음주의권에서 먼저 이야기되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와 같은 학자들이 신자의 청지기적 삶을 선제적으로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 환경운동이 진보 기독교의 상징처럼 되었고, 그들만의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가 지역사회도 돌보고 생태계도 돌볼 수 있습니다. 이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칭찬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생태운동이야말로 교회의 존재 이유인 양 주장하고, 대부분의 교회가 개인 구원에만 초점이 놓여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행위만을 영웅화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태도입니다.

환경운동과 생태운동은 환경단체도 합니다. 여성인권운동은 여성단체도 합니다. 정치권 비판 운동은 시민단체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한 말과 행동은 오직 교회와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시민단체들도 할 수 있는 일을 앞장서서 함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행위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행위주의의 비극은 자신들이 실천한 행위를 타인이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행위주의 신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심을 기억하고, 그것이 심비에 새겨진 사람이라면 믿음의 범주 안에 행함은 부분집합으로 작동되기 마련입니다.

믿음이라는 거대한 집합에서 행함이라는 가치를 분리시켜 사회정의를 말한다면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행함이 행함되기 위해선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믿음 없는 행함은 공공선이 아니라 이기적 욕심의 투영입니다. 오직 믿음에 근거한 행함만이 유효합니다.

둘째로, 행위의 동기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받았기에 거룩한 삶을 실천할 수 있고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의 행위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조명받고 점검받아야 합니다. 행위의 동기가 나의 분노나 신념에 의한 것인지, 받은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인지 점검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활동할 때 교회는 분열됩니다.

특히 정치적 이슈를 교회 안에 끌고 와서 좌파와 우파가 분열되어 싸우는 것은 그릇된 행위주의의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자기의 의로움을 앞세워 타인을 정죄하는 행동은 은혜가 부재한 사람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행태입니다.

셋째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공로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존재들입니다. 십자가 공로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들이기에 그 어떤 행위도 내세울 수 없습니다.

행위가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에서 이뤄가야 할 거룩한 행실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모든 행실에 대해서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한다면, 감격에 따라 공공선을 행하고, 감격에 따라 겸손하게 됩니다.

앞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제는 ‘행위주의’ 신앙과 작별하고 ‘은혜주의’로 돌아서서, 복음의 본질을 사수하고 처음 마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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