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1] 인간은 선과 악 중에서 무얼 선택할까? 성경적으로 말하면 악을 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왜 악을 즐겨 택하는 걸까? 그건 루터의 말처럼 인간 안에 ‘구부러진 마음’(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위험이 초래될 거 같은 상황에선 선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는 이들이 참 많다. 소극적인 죄를 짓는 셈이다. 하지만 누구나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2] 가끔씩 이것을 반전시키는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기도 한다. 전철 안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노인들에게 행하는 막말이나 볼썽사나운 행동이 담긴 영상을 접할 때가 종종 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중학생처럼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욕을 하면서 마구 때리는 영상이 올라왔다. 주변에 있는 누구도 개입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3] ‘아, 내가 저 자리에 있었으면...’하는 생각이 물밀 듯 몰려왔다. 바로 그때 영웅이 나타났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다가와서는 그 남학생을 꾸짖으며 할아버지가 맞지 않도록 온 몸으로 막아준다.

그래도 해결의 기미가 없자 청년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음 정거장에 같이 내렸다. 그 광경을 영상으로 찍으면서 같이 내리던 한 사람이 청년에게 묻는다.

[4]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느냐고? 그때 청년은 울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나서요!”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으나, 그 청년은 유일하게 할아버지가 젊은 애한테 당하는 걸 막아주었다. 이유는 뭘까? 자기 할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와 흡사한 충격적인 실화가 하나 있다.

[5] 2015년 7월, 과테말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열두 살 소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리엘 에스칼란테 페레즈이다. 그는 수업 후 집으로 가던 스쿨버스가 갱단에게 납치되는 사건을 겪는다. 갱단 조직원은 그에게 권총을 주며 버스 기사를 쏘면 살려 주고 안 쏘면 너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소년은 끝내 총을 쏘지 않았다.

화가 난 갱들은 다리로 가서 그를 던져 버렸다.

[6] 135미터 높이의 다리였다. 그는 사흘 뒤 온몸이 부서진 채 발견되었지만, 기적같이 숨은 붙어 있었다. 아리엘은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아버지를 꼭 껴안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5일 후 눈을 감고 말았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

아리엘은 갱들의 위협을 거부하고 자신이 죽는 것을 선택했다. 이럴 경우 압도적인 다수는 제 목숨 살리려 버스 기사를 총으로 쏴 죽였을 것이다.

[7] 과거 미국 유학 시절 대한민국을 온통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지존파 사건’이 떠오른다.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자기들이 만든 살인 아지트에 끌어와서 총으로 쏴 죽여서 불태우는 끔찍스런 일당들에게 한 부부가 잡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학교 선배 교수가 다니던 교회의 신앙 좋은 부부였다. 살인마들은 거기 끌어온 처녀 한 사람에게 총을 주면서 그 부부를 죽이라고 했다.

[8] 어찌 됐을까? 이 처녀는 자기가 살기 위해 두 눈을 꼭 감고 그 부부를 죽였다. 나중에 그녀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살인마 한 명과 병원으로 가던 중 도피해서 경찰에 신고함으로 그들의 전모가 밝혀지긴 했다. 그랬다.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 남의 생명을 살려주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어째서 아리엘은 갱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을까?

[9]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자기 아버지도 버스 기사였다. 자신이 탄 버스의 기사가 아버지라 생각하니 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이 가져다주는 대단한 힘이다. ‘공감’(共感, symphony)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게 없었더라면 누구도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목숨과 바꾸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10] ‘생명경시’의 현상을 사회 전반에서 볼 수 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이 외면되고 있는 현실을 자주 본다. 대상이 내가 싫어하고 혐오하는 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남기신 이유가 뭘까? 제한되고 편협 된 이웃의 개념을 깨기 위해서이다. 피를 섞은 사마리아인이나 창녀나 죄수나 한센씨병 환자나 강도나 살인자나 일본 놈이나 주님 눈에는 모두가 자기 양들이다.

[11] 부모나 형제나 가족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용서 못할 이가 없고, 사랑 못할 이가 없다. 적어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자기 눈앞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만이라도 자기 가족 중 한 사람과 동일시 할 줄 아는 관점이 필요하다. 다른 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차별화 된 용기’는 그럴 때 발휘가 되는 것이다.

빌 2:3~4절의 말씀대로 잘 살아서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12]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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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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