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수 교수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는 어느 곳에서나 긍정적인 여인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평생의 삶 속에도 고통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늘 용기를 주고 밝게 살 것을 권면했다. 그녀는 항상 삶의 밝은 면만을 바라보고자 노력했으며 가정과 교회를 비추고 있는 밝은 것들을 사랑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엄마는 그녀에게 늘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주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언제나 웃고 하늘을 바라보라.’ 그녀의 가슴 속에 있는 이 긍정적인 마음은 그녀의 모든 시와 찬송가에 잘 나타나있는 주된 주제이기도하다. 그녀의 찬송가가 비록 부드럽지만 힘이 넘치는 것은 할머니를 통해 어린 시절 읽었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패니 크로스비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녀가 앞이 안 보이는 것에 놀랐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웃는 낯으로 기쁘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더욱 놀랐다. 이 세상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언젠간 돌아간다는 소망의 밧줄을 늘 마음에 잡고 살았던 그녀의 삶은 천국의 삶 그 자체였다.

패니 크로스비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나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실 때 언제나 동역자를 붙여서 일하시도록 하신다. 패니 크로스비에게도 많은 동역자가 있었다. 어린 시절 그녀의 할머니가 동역자였고, 그녀의 엄마가 동역자였다. 그리고 영혼의 찬송가를 써가면서 하나님은 많은 동역자를 세우시고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하셨다. 수많은 동역자가 그녀 곁에 있었지만 그중 그녀에게 영향을 주고 함께 했던 몇 명의 동역자가 있다.

교회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웰 메이슨(Lowell Mason, 1792–1872)은 비록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찬송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만들어주었다. 미국 음악의 개척자로써 로웰 메이슨을 꼽지 않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힘이 음악이며 그것을 최고의 가치와 영향력으로 여겼다. 그는 음악은 단순히 우리를 즐겁게 하거나 만족시키는 것을 뛰어넘어 우리의 삶 자체를 바꾸며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가치관조차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메이슨은 조지 루트와 윌리엄 브래드베리와 더불어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을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고 알린 사람이었다.

로웰 메이슨
로웰 메이슨, Lowell Mason, 1792–1872

로웰 메이슨은 크로스비와 마찬가지로 메사추세츠 주에 뿌리를 둔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의 조애가 깊었던 그는 어린 시절 성가대원으로 노래했으며, 음악교사와 지휘자로 그의 능력을 발휘했다. 1812년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 사바나의 한 독립장로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와 오르간 연주자로서 음악사역을 꾸준하게 감당했던 그는 독일 음악을 연구하여 작곡과 화성을 통달했고 곧 독일 음악들을 모은 찬송 곡 집을 완성했다. 많은 사람들은 사바나의 독립장로교회를 방문하여 메이슨의 성가대와 오르간 연주에 감탄을 하기도 했다.

메이슨이 찬송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이유는 찬송가의 깊이에 있었다. 찬송의 가사가 깊은 선율 속에서 사람들에게 들려질 때 진정한 예배가 된다고 확신한 메이슨은 교회음악의 6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교회음악은 너무 엄숙하거나 어려운 것 보다는 단순해야한다.
둘째, 곡은 가사와 깊이 있게 잘 어울려야한다.
셋째, 교회에서는 찬송가가 많이 불려야한다.
넷째, 좋은 악기와 오르간 연주가 수반되어야한다.
다섯째, 어린이에 대한 음악교육이 선행되어야한다.
여섯째,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있어야 감동이 있다.

메이슨의 이 6가지 원칙은 크로스비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녀의 찬송 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패니 크로스비가 뉴욕 맹인학교에 있으면서 들었던 많은 찬송가들은 메이슨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메이슨은 보스턴으로 이주하여 세 교회의 음악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14년간 머문 메이슨은 교회의 음악과 찬송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게 되었다. 변화는 노력과 무한한 연습 없이는 오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메이슨은 그의 열정과 노력을 교회음악의 발전에 쏟았다. 보스턴에서 비처 목사를 만난 메이슨은 그와 교회의 찬송을 개선시키려는 원대한 비전을 공유하게 되었다. 무겁고 어두운 찬송가 가사를 좀 더 풍성한 은혜를 느낄 수 있는 깊은 가사를 만들어내기로 마음먹었다. 비처 목사는 메이슨의 음악사역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말했다.

“그는 정말 훌륭한 교회음악사역자이다. 그는 열정이 있으며 풍성한 영적 마인드가 있다. 그의 찬송은 한편의 설교보다도 영향력 있고 성도들에게 감동이 있다.”

1832년 로웰 메이슨은 미국의 최초의 어린이 음악학교인 ‘쥬비나일 사미스트’를 만들어 한 차원 높은 음악교육에 도전했다. 메이슨은 모든 어린아이들이 충분한 교육으로 노래를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음악학교의 어린이 성가대는 보우도인 거리에서 연습도 하며 찬송을 불렀다. 어린이 성가대의 찬송을 들은 수많은 어린이들이 음악교육을 받기 위해 몰려왔다. 파크 스트리트 교회에서 어린이 성가대는 자주 찬송을 불렀으며 2,500여명이 넘는 인원들이 어린이 성가대와 함께 찬송했고 그것은 장관이었다.

메이슨의 “주일학교 찬송 집”이라는 제목의 어린이용 찬송가가 나왔는데 이 찬송 집은 기존에 있던 찬송보다 더 밝고 따라 부르기 쉬운 곡조로 만들어졌다. 메이슨은 교회음악에 복음주의의 깊은 가사를 접목시키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보스턴에 있는 동안 유럽식 음악과 교육이론에 대한 그의 헌신은 커져갔다. 유럽식 음악교육은 당시 페스탈로치의 교육이론으로 외워서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닌 능동적인 음악활동으로 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독일 책 번역을 도왔고 어린이 성가대의 무료공연 등으로 그의 이론을 알렸다.

메이슨은 이후 1833년부터 1840년까지 퍼킨스 맹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이 학교의 설립자 호우는 맹인들에게도 음악교육을 받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메이슨은 맹인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체계를 고안해냈다. 그의 맹인교육에 대한 열정은 크로스비에게도 영향을 미쳐 크로스비가 뉴욕 맹인학교에서 음악교육을 받을 때 메이슨의 음악교육 방법이 사용되었다. 1838년 유럽에서 돌아온 메이슨은 보스턴 공립학교의 음악교육 최고 책임자가 되었는데, 그는 음악교육의 최고 책임자로서 많은 능력을 발휘했고 교육의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동료 호레이스 만은 그의 지도력을 이렇게 평가했다.

“메이슨 박사의 강의를 듣기 위해 10마일의 거리를 교사들이 걸어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의 강의는 단지 음악에서의 정보나 교육만이 아니라 음악의 기초를 진실하게 가르치는 사명과 헌신이 있었다.”

그의 음악교육은 가는 곳마다 인기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먼 곳에서 그의 강의를 들으러 오곤 했다. 메이슨의 찬송가는 우리 찬송가에 모두 18편이 있으며 그중 지금까지 많이 불리고 사랑받는 찬송가는 레지날드 헤버의 “저 북방 얼음산과”(찬송가 507장), 아이작 와트의 “주 달려 죽은 십자가”(찬송가 149장), 레이 팔머의 “못 박혀 죽으신”(찬송가 385장), 사라 아담스의 “내 주를 가까이”(찬송가 338장)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찬송하는 소리 있어”(찬송가 19장), “만입이 내게 있으면”(찬송가 23장), “즐겁게 안식할 날”(찬송가 43장), “지난 이레 동안에”(찬송가 44장), “지난밤에 보호하사”(찬송가 58장), “우리 구주 나신 날”(찬송가 121장), “날 구원하신 예수를”(찬송가 262장), “어둔 밤 쉬 되리니”(찬송가 330장), “맘 가난한 사람”(찬송가 427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찬송가 550장)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기쁘다 구주 오셨네”(찬송가 115장)를 비롯한 “주 믿는 형제들”(찬송가 221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찬송가 258장), “내 평생 소원 이것뿐”(찬송가 450장) 등은 그가 편곡한 곡들이다.

메이슨은 교회에서의 음악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크로스비의 음악적인 자세와 찬송에 대한 기본적인 방향을 잡아주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이슨의 찬송이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신앙의 자세에 중요성을 두었던 것처럼 크로스비의 찬송 시도 그 바탕이 되게 했다. 메이슨은 크로스비의 또 다른 동역자인 조지 프레드릭 루트와 윌리엄 브래드베리에 영향을 미쳤다.

로웰 메이슨은 조지 루트(George Frederick Root, 1820-1895)의 재능을 발휘하게 만든 촉매 역할을 했다. 패니 크로스비는 조지 루트가 사역을 시작할 초기에 만났으며 그녀의 서정시가 대중의 인기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만일 조지 루트가 없었다면 패니 크로스비의 시는 아마도 대중성을 띠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조지 루트는 크로스비보다 몇 달 뒤인 1820년 8월 30일 메사추세츠 쉐필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 회중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그의 부모들과 형제들은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음악가족이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루트는 좋은 음악가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조지 루트
조지 루트, George Frederick Root, 1820-1895

루트는 보스턴 아카데미의 합창단이 되어 성가대로 자리 잡았고 그곳에서 성악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성악에 실력이 있었던 루트는 메이슨에 눈에 띄어 학교에서 교사교육을 받게 되었고, 음악회나 오케스트라의 공연에 성악가로 초대되기도 했다. 메이슨과 마찬가지로 루트는 맹인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이 이 땅위에서 해야 할 일정부분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1845년 크로스비와 첫 만남을 가진 후 1851년부터 본격적으로 동역하게 되었다. 루트는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과 시적인 상상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크로스비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1845년에 루트는 크로스비의 뉴욕 맹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트는 학교에 자주 오지 않았기 때문에 크로스비는 그를 거의 만날 수 없었다. 1854년의 어느 날 그녀는 그가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는 소리를 들었고, 지금 막 작곡했다는 것을 알았다.

“오, 루트 씨, 참 훌륭한데 그것을 발표하지 그러세요?”

작고, 턱수염이 있는 루트는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이 노래는 아직 가사가 없고 그것을 살 처지도 안 됩니다.”

“아, 그래요? 그럼 우리 같이 해봐요.” 말이 끝나자마자 그 음악에 맞춘 시를 즉석에서 암송했다.

오, 푸른 숲으로 오세요, 자연이 미소 짓는,
푸른 숲으로 오세요, 너무나 사랑스럽고 즐거운,
부드러운 음악이, 당신의 영혼을 위로하는,
부드러운 음악이, 당신의 슬픔을 날려주는.

루트는 그녀의 암송에 거의 할 말을 잃고 소리쳤다.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출 수가 있는 것이지요? 너무 잘 맞아요! 저를 위해 가사를 써 주시겠어요?” 그는 그녀가 꼭 해주기를 바라면서 물었다. 패니 크로스비는 잠시 동안 생각하다가 동의했다. 하지만 크로스비는 그에게 학교 일로 너무 바쁘기 때문에 여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 동안, 난 수 백 편의 시가 있어요. 당신을 위해 새 시를 쓰는 대신, 내가 이미 쓴 것에 음악을 넣어 주시겠어요?”

그 이후로 3년 동안 패니는 루트와 함께 일했고, 좋은 메시지가 있는 인기 있는 노래들이 학교의 음악 홀을 채웠다. “귀향의 기쁨,” “자랑스러운 세계여, 안녕,” 등이 루트에 의해 곡조에 붙여졌다. 수 천 권의 낱장 악보와 소책자가 뉴욕에서 캘리포니아의 음악 홀로 건너갔다. 그 후 조지 루트와 패니 크로스비는 함께 50여 곡 이상을 작곡했다.

크로스비가 루트와 협력해 만든 첫 번째 곡은 “꽃의 여왕”이라는 칸타타였다. 이 작품은 여왕에 의해 선택된 꽃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 칸타타는 겸손과 봉사를 주제로 한 도덕적인 곡이었다. 루트는 보통 줄거리와 리듬을 얻기 위한 약간의 허밍을 발전시켰다. 바로 다음 날 패니는 두 편이나 세 편의 시를 준비했다. 루트는 그러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를 고르고 음악을 작곡했다. 칸타타 표지에는 크로스비를 서정시인으로 묘사했으며, 뉴욕 맹인학교를 졸업했다고 기록했다. 크로스비는 처음 공연한 맨해튼에 두 번 참석했는데 그 칸타타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공연 끝에 크로스비는 마지막 성악가에게서 꽃을 받는 장면을 연출했다.

첫 번째 칸타타의 성공으로 두 번째 칸타타를 만들게 되었는데 제목은 1855년에 발표한 “순례자의 선조들”이었다. 이 칸타타는 미국의 복음주의 역사를 잘 보여주었고 역시 이 칸타타에서도 크로스비를 서정시인으로 불렀다. 특히 동양에서 인기가 많았던 첫 번째 칸타타 “꽃의 여왕”과 두 번째 칸타타 “순례자의 선조들”은 당시 칸타타의 표준이 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이후 많은 음악학교에서 이 곡들을 교재로 사용할 정도로 영향을 미쳤다.

칸타타 이외에도 크로스비와 루트는 이후 많은 대중적 인기를 끈 노래와 우아한 전통적인 발라드를 만들어냈는데, “헤이즐 델”이 첫 번째 공연을 한 작품이었다. 2년 후 1855년에는 세대를 뛰어넘어 인기 있는 “초원의 꽃 로잘리”를 발표했다. 그 후 1857년에 발표한 “세상에는 음악이”라는 곡은 최고의 4인조 합창곡으로 20세기까지 고등학교 합창의 표본으로 남아있었다. 보통 루트는 크로스비에게 시마다 2달러에서 3달러를 주었다. 그는 곡들의 인기로 많은 이익을 남겼으나 크로스비에게는 큰 이익이 돌아오지 않았다.

조지 루트는 크로스비가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게 하는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패니 크로스비라는 이름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성악가로 그 당시 가장 뛰어났던 루트는 크로스비와 함께 동역하면서 그 꽃을 피웠다. 그녀가 시를 발표할 때 가끔 맨해튼에 있는 브로드웨이 예배당에서 콘서트를 하던 동역자 윌리엄 브래드베리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하지만 브래드베리가 패니를 마침내 만날 때까지 10년이 더 흘러야 했다. 크로스비와 루트의 동역은 커다란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이었다.

그의 찬송가는 잘 불리는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524장)를 비롯해 우리 찬송가에 모두 6편이 실렸으며 ‘사망을 이긴 주,’(172장) ‘세월이 흘러가는데’(485장) ‘기쁜 일이 있어 천국 종 치네,’(509장) ‘형제여 지체 말라,’(537장) ‘예수께서 오실 때에,’(564장) 등이다.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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