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나는 미국을 방문해 LA를 거쳐 뉴욕에서 1주일 머물렀다. 내가 뉴욕에 간 가장 큰 이유는 몇 달 전부터 계획했던 찬송가의 여왕으로 불리는 패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와의 만남 때문이다. 미국으로 출발하기 오래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그녀는 평생 1만여 편의 찬송가를 쓰고 불렀던 자타가 공인하는 ‘찬송가의 여왕’이었다. 매일 1편씩의 찬송을 쓴다고 해도 30여년을 써야하는 방대한 양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오 놀라운 구세주” “나의 영원하신 기업”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예수 나를 위하여” 등 우리가 잘 알고 부르는 찬양들로 ‘새찬송가’에는 모두 22곡이 실려 있다.

   나는 3일의 여정으로 패니 크로스비의 삶의 무대였던 뉴욕 주의 맨해튼, 롱아일랜드를 비롯해 코네티컷 주의 리지필드, 브루스터, 브리지포트 등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패니 크로스비가 태어난 집과 그녀가 어렸을 때 참석했던 교회와 앞마당, 15세에 입학해 공부했고 졸업 후엔 교사가 되어 자신과 같은 맹인 학생들을 가르쳤던 뉴욕맹인학교, 그리고 그녀의 묘지와 장례식이 열렸던 곳들이다. 나는 약 15년 전 패니 크로스비의 일대기인 『영혼의 찬양 전도자 패니 크로스비』를 쓰면서 그 때 모아두었던 자료를 통해 패니 크로스비의 인생 여정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는 뉴욕을 방문해 잠깐 그녀의 묘지를 찾았었던 그 감동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었다.

패니 크로스비
패니 크로스비

   우리는 패니 크로스비가 아름다운 찬송시를 많이 썼다는 것만으로 그녀를 존경하진 않는다. 그녀는 태어나면서 의사의 실수로 6주 만에 시각 장애인이 되었고, 100여년 평생의 삶 동안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우리 몸의 9할이 눈이라고 할 정도로 눈을 잃어버린 엄청난 절망에도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나는 언젠가 앞을 보지 못하고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시험해본 적이 있다. 눈을 가리고 움직이면서 걷기도 했지만, 두려움과 답답함으로 1분을 움직이며 걷기 어려웠었다. 평생 절망과 고통의 삶을 살아야만했던 그녀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주위 친구들이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아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단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다른 아이들이 하나 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냥 ‘만족’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작은 보석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마음먹었다. 이것은 내 인생에 늘 위로가 되었다. 나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고 단지 앞만을 바라보기로 결심했다. 이후로 나는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실망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패니 크로스비는 여기에 더해 모든 것에 감사한 여인이었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여러 가지 원망으로 가득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은 감사로 넘쳐났다. 감사는 전이되는 것일까? 그녀를 만나는 사람마다 힘든 상황에도 자신의 감사할 환경을 돌아보았으며, 심지어 집회 때에는 회개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갈 때 가장 필요한 것이 ‘감사’라고 한다면 패니 크로스비야말로 진정한 예배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하나님과 늘 소통하며 교제했던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을 보여준 패니 크로스비의 삶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해야할 수 있을까? 그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절망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고난의 길을 걷는다 해도 하나님이 주신 참된 기쁨을 통해 분명의 예배자로서의 진정한 회복을 이룰 것이라 믿는다. 지금의 암울한 팬데믹 상황에서조차 패니 크로스비와 같이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으로 우리의 영혼은 기쁨으로 새로워질 것이다.

올 2021년을 한 달여 앞두고 있는 이 시기에 남은 시간 동안 패니 크로스비의 감사의 삶을 통해 올 한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신앙과 환경을 돌아보기를 소망한다.

패니크로스

   패니 제인 크로스비는 1820년 3월 24일 미국 뉴욕 주 북동쪽 작은 마을 푸트남(Putnam)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존 크로스비이며 엄마는 머시 크로스비였다. 패니 크로스비의 가문은 영국의 오래된 ‘십자가의 마을’이란 뜻의 크로스비 청교도 가문이었으며 패니 크로스비는 후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가문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버드 대학의 설립 자중 한사람이 크로스비 가문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선조들이었음을 많은 자리에게 긍지를 가지며 이야기하곤 했다.
패니 크로스비가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눈이 충혈 되었으며 눈에 이물질이 끼었다. 당시 작은 마을이었던 푸트남은 의사가 없어 조금 큰 도시에서 만 이틀이 걸려서야 의사가 도착해 검진을 받을 수 있었다. 패니를 검진하던 의사는 자신이 만든 약을 눈에 넣었고 심하게 울던 패니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울음을 멈추었고, 이후 패니는 앞을 전혀 볼 수 있게 되었다. 만 6주가 막 지나서였다.

패니의 부모와 패니가 어려서 다녔던 올드 사우스이스트(Old Southeast) 교회의 교인들은 태어난 후 곧 맹인이 된 패니를 안타까워했으며 함께 기도해주었다. 패니의 엄마 머시는 어떻게 해서든 패니의 눈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패니의 아버지는 병에 걸려 점점 집안 살림은 어려워졌고, 패니가 태어난 지 1년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엄마 머시는 어린 패니를 자신의 엄마에게 맡기고 근처 부잣집을 전전해 일을 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 주로 할머니와 보내야했던 패니에게는 사실 좋은 배움의 시간이었다. 할머니는 패니의 좋은 친구이자 선생님이었다. 할머니는 앞이 안 보이는 손녀를 위해 산과 냇가, 들을 다니면서 풀과 나무, 새들의 소리를 듣고 만지게 했다. 패니는 대부분의 나무와 새, 꽃들의 이름을 알 수 있었고, 자연과의 교감, 향기와 소리의 경험은 패니가 찬송가 가사를 쓰는 데 원천이 되었다. 또한 할머니는 패니에게 성경교사였다. 매일 성경말씀을 들려주었으며, 나중에 패니는 성경을 거의 외울 정도로 관심을 가졌고, 패니가 어려서부터 신앙으로 자랄 수 있는 귀한 자산이 되었다. 그녀는 이 때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어머니는 매일 성경을 읽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를 성경으로 깊이 인도해주셨던 분은 할머니셨습니다. 성경이야기는 할머니의 입술에서 나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고, 바로 그곳에 큰 뿌리를 내렸습니다.”

성경과 함께한 순간들이 다른 어떤 순간보다 패니 크로스비의 삶을 탄탄하게 만든 기초였다면, 기도는 그 기초를 굳건하게 다지는 중요한 도구였다. 할머니는 어린 패니를 흔들의자에 앉히고 세상의 모든 인간을 위해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패니는 할머니의 가르침대로 매일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식사하기 전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잠이 들기 전 하루의 삶을 지켜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기도를 배웠다. 그녀가 기도할 때마다 매순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실망하지 마라. 실망하지 마라. 어린 소녀야. 넌 언제가 행복해질 것이고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아주 소중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임 받게 될 것이다.”
패니의 수많은 찬송가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쳐졌다. 이 오랜 습관은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에게서 배운 가르침이었다. 그녀가 영혼의 찬송가를 쓸 수 있었던 것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패니가 태어난 푸트남은 맨해튼에서 북동쪽으로 약 3시간 거리이며, 1시간 정도만 더 가면 보스톤이 있다. 패니가 태어난 집을 찾기 위해 나는 푸트남 박물관과 그 옆에 위치한 지역 공공도서관을 찾아갔다. 안내를 받고 주소를 확인한 후 차로 몇 군데를 수차례 확인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날이 어두워져 근처 호텔에 머문 후, 다음 날 아침 일찍 패니 크로스비의 집을 찾는 것은 포기하고 일정상 그녀의 묘지와 다녔던 교회, 장례식이 열렸던 교회들을 돌아볼 예정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가을의 정취가 느껴졌다. 그러면서 문득 어젯밤 자기전의 생각과는 달리 패니가 태어난 집을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들어 우리나라의 행정복지센터와 같은 푸트남 사무소를 찾았다. 그리고 푸트남에서 관리하고 있는 지역 역사박물관을 소개받았다. 이곳에서 매우 정확한 패니의 집 주소를 얻게 되었다.

기쁜 설렘의 마음을 가지고 살짝 안개가 낀 날씨에 찾아 나섰고 20분 정도 걸려 패니의 드디어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아, 여기가 바로 패니 크로스비가 태어난 집이란 말인가!’ 나는 매우 감동되어 그녀의 집을 여기 저기 들여다보고 감격에 젖었다. 패니의 집은 오랜 시간을 견뎌낸 듯 낡아보였으나, 그래도 원형은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뒤쪽으로는 넓은 마당이 있었고, 100년은 더 된 것 같은 낡은 창고가 집 옆에 있었다.

패니 크로스비
패니 크로스비가 태어난 집

   그리고 감사한 것은 푸트남 박물관에서 패니의 집을 알려줬을 뿐만 아니라, 패니가 어려서부터 다녔던 올드 사우스이스트 교회를 담당하는 일흔을 넘긴 캐롤 베일리(Carol Bailey)라는 분을 소개 받았다. 그 분이 약속이 잡혀있는 일정 중에도 갑자기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패니 크로스비에 대해 관심을 갖고 멀리서 찾아온 한국 사람이라는 소식을 들어서일 것이다.

   이 분은 패니 크로스비가 어려서부터 다녔던 올드 사우스이스트(Old Southeast) 교회를 관리하면서 매년 3월 전후에 열리는 패니 크로스비 시와 음악제를 오랫동안 개최해오고 있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열리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열리기를 희망하면서 감사하게도 나를 초청하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패니 크로스비
패니 크로스비가 어렸을 때 다녔던 올드사우스이스트 교회

   패니의 엄마는 뉴욕 맨해튼의 유명한 안과 최고 전문의사인 모트 박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패니의 눈을 치료할 수 있을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갖고 있었고, 드디어 맨해튼 안과를 가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차로 3시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당시 맨해튼으로 가는 길은 굉장히 험하고 긴 여행이었다. 허드슨 강까지 마차로 7시간이 걸리고 허드슨 항에서 뉴욕 맨해튼으로 가는 배로 갈아타 하루 이상을 가야만하는 거리였다.

   모트 박사로부터 진료를 받은 패니는 시신경이 손상되어 앞으로도 전혀 앞을 볼 수 없단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술비를 위해 지난 5년간 돈을 모은 패니의 엄마 머시는 매우 낙담했다. 먼 길을 다시 돌아온 패니와 엄마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여만했다. 패니는 이 여행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할머니가 가르쳐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욱 믿고 신뢰했다.

   패니의 엄마가 집에서 약 6마일 정도 떨어진 리지필드(Ridgefield)에 가정부로 가면서 패니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홀리 부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가 맹인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성경을 암송하며 신앙을 훈련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중에 패니는 홀리 부인과의 수년의 만남이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예비해주신 선물이라고 말했다. 홀리 부인은 패니에게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말해주면서 깊이 묵상하면서 성경을 읽도록 권면했다.

패니 크로스비
패니 크로스비가 성경 공부하던 올드사우스이스트 교회의 주일학교 교실

홀리 부인은 패니의 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어린 나이에 벌써 많은 시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홀리 부인은 패니의 엄마를 통해 그 중에 몇 개의 시를 가까운 시인들에게 부쳤고 즉시 관심 있는 많은 후원자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패니의 수많은 찬송가는 어린 시절 배운 성경과 시를 통해 완성되었다. 할머니의 격려와 홀리 부인의 어린 시절 가르침은 패니의 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여호와이레! 주님이 예비 하신다.”를 힘차게 부르며 격려하던 것을 기억했다. 이 찬송가는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이자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저자인 존 뉴턴이 1779년 쓴 것인데 홀리 부인의 앞에서 이 시를 암송하면서 자랑하기도 했다.

   얼마 후 패니의 할머니 유니스 크로스비는 “저 높은 곳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할머니와 다시 만나자구나”라는 말을 패니에게 남기며 하늘나라로 떠났다. 할머니는 패니 크로스비의 최초의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패니의 엄마와 홀리 부인과 함께 세심한 교육과 많은 실질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할머니는 특히 패니에게 믿음을 심어주었다. 비록 앞이 보이진 않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부어주었다. 패니는 할머니의 가르침으로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제공되는 모든 것들과 최선을 다해 만났다. 어린 시절 밖에서 아이들과 열심히 뛰어 놀았고 들과 산과 강을 따라 자연의 모든 아름다움을 만났다. 그 자연에 익숙하도록 만들어 준 것은 바로 할머니였다.

패니크로스비
드 사이스이스트 교회에서 오랫동안 섬기고 있는 캐롤 베일리 (왼쪽 가진수 교수)

할머니의 깊은 관심으로 나중에 그녀가 시인이 되었을 때, 모든 자연을 마치 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패니의 할머니는 그렇게 위대한 찬송가 시인의 어린 시절을 만들었다. 그녀는 패니 크로스비가 언젠간 훌륭한 시인이 되어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믿음’이었다.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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