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합동총신 총회장 최철호 목사
예장 합동총신 총회장 최철호 목사 ©합동총신

표현력이 풍부한 한글과는 달리 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인 헬라어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 단어가 많다. ‘페이라스모스’란 단어도 그 중 하나다. 이는 ‘유혹temptation’이란 뜻과 함께 ‘시험, 연단test, trial’이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전체 문맥을 잘 살펴야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작용이 혼재한다.

2019년 연말에 발생한 코로나는 세상을 시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험에 사람들은 집단최면 현상까지 보인다.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 백신을 맞으면 절대 안전을 보장받으리라는 착각의 믿음, 전염과 확진을 최소화하기 위해 초법적 행위마저 서슴지 않는 정부, 그리고 이에 순응하는 일반 백성 등등 말이다. 이 부분에 있어 교회도 전혀 예외가 아니다.

코로나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게 하였다. 인간의 보편적 본성은 어떤 것인가? 양육강식의 동물세계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생존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보다 많은 것을 향유하기 위해 인간은 윤리도덕과 양심마저 팽개친다. 국가라는 체계와 법질서는 이러한 것들을 통제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공존해 나가기 위한 ‘자연 질서’이다. 그리고 영적 영역에서 인간의 본성을 정의할 때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라고 한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의 본성을 지닌다.

코로나가 발병한 시점은 유의미하다. 미국과 중국이 현대적 개념의 전쟁인 무역 분쟁이 극을 향해 달려가던 시점에서 중국 한 복판인 우한에서 발생하였다. 그리고 온 세상에 신속히 퍼져나갔다. 이것을 대처하는 각국의 노력은 눈물겹다. 하지만 여기에는 항상 정치적 계산과 선택이 따랐다. 하긴 인간의 존재 형태 자체가 정치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한국의 경우, 집권자들은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발원 국가의 국민에 대한 국경 출입을 초기에 방치한 것, 백신의 조기 구입을 등한시한 것, 교회를 타깃으로 삼은 것 등 말이다.

재작년 10월, 지금의 정권으로서는 위기의식을 갖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조국 사태로 빚어진 국민의 분노는 10월 3일이 기발점이 되었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일부에서는 동원된 골수보수태극기부대라고 폄훼하였지만)은 연말이 다가와도 식을 줄 몰랐다. 그 중심에 교회(작은 교회들의 목사와 성도들)가 있었다. 그 기세가 계속 이어진다면 정권이 흔들릴 참이었다. 그 기세를 꺾어 놓은 것이 코로나였고, 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힌 신천지의 집단 발병은 좋은 공격 대상이었다. 한 국가의 정보력을 감안할 때 우한의 신천지 근거지와 본국의 교인들 사이에 교류한 경로와 상황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천지의 집단감염은 국민 모두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고, 정통 교회들은 속으로 “이단이 설쳐대더니 고소하다”는 심리로 내내 외면하고 침묵하였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의 눈에는 정통과 이단의 구별 없이 모두 똑같은 교회일 뿐이다.

이후 교회는 1년이 훨씬 넘도록 방역을 내세운 정부의 조치에 속절없이 전적으로 순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비대면 예배’라는 신조어가 생기면서 대형교회들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수많은 작은교회들은 조심하면서 전통 예배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 있어 어느 교회에서 확진 환자가 발생하면 전체 교회가 공격을 당하고 비난 받았다(물론 사회생활을 하는 신자가 다른 곳에서 전염된 것이다). 이윽고 어느 교단의 총회장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외벽에 “교회가 죄송합니다”란 현수막을 내걸었다. 왜 교회가 죄송해야 하는가?

그동안 대형교회 내지 대형교단 지도자들이 보여 온 반응과 태도는 새삼 이 자리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물론 전체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교회가 정부에 대해 예배 인원 확대를 구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일에 앞장선 사람들은 지금도 자기자랑에 여념이 없다. 이제 세상은 아무도 교회를 코로나 진원지로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실상이 다 드러나 더 이상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코로나로 인해 ‘믿음’을 시험받았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선진들은 믿음을 어떻게 모범으로 보였던가?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 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는 예수님의 말씀을 2천년 동안 외쳐 왔고, 지금도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외치는데, 막상 코로나가 들이닥치자 대다수 교회가 어떻게 하였던가?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역병을 포함한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의사가 포기한 환자도 고쳐주신다는 그런 믿음이 연기처럼 사라지지는 않았는가?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이웃을 위해 조심하면서도 끝까지 예배를 충실히 믿음으로 드려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코로나를 통하여 우리의 이 믿음을 시험(test)하신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10:52).

코로나는 교회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를 시험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인가? 인간이 지닌 공통적인 ‘탐욕’에 대하여. 코로나 백신 회사들은 이에 관한 상징적 대상이다. 흔히 백신은 10년 이상의 오랜 연구개발과 실험을 통하여 시판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스트라제네카, 화이자, 모더나 등 백신은 6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작년에 출시된 백신들이 코로나를 예상하고 10년 전부터 개발해 왔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것들은 급작스럽게 마련한 의약품이다. 그러다 보니 부작용이 속출하고, 건강하던 사람들이 백신 접종 후 죽어나간다. 우리는 백신을 ‘목숨 걸고’ 맞는다. 하지만 정부, 사회, 그리고 그렇게 떠들기 좋아하는 수많은 시민단체 중 어느 하나 나서서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신을 맞은 후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그냥 역학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발표로 덮어버린다. 죽은 사람과 그 가족만 불쌍하다. 하지만 아무도 적극적인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물론 나라마다 백신 접종 거부 운동을 전개하는 곳이 있다. 그래도 맞지 않는 것이 맞는 것보다 국민 전체로 볼 때에는 백 번 낫고, 실제 통계도 그렇다. 결론은 코로나 앞에 인간은 무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잘난 체 하면서 까불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탐욕은 이 과정에서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독감예방 주사는 일 년에 한 번 맞아도 족한데, 코로나 백신의 항체 수명이 짧은 것은 3~4개월이란다. 따라서 2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수없이 맞아야 한다. ‘목숨 걸고’ 말이다(접종 후 죽지는 않았을지라도, 무력감과 몸살을 비롯한 수많은 증세의 후유증을 겪어야 한다).

그런데 애써 표정 관리하면서 좋아하는 곳이 있다. 바로 백신회사다. 발표에 의하면 그동안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고, 그 수익은 앞으로도 계속 증가하면서 지속될 것이다. 인류가 당면한 대재앙에 대하여 인류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천문학적인 수익을 거두면 안 된다. 가난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제조원가는 아니더라도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함으로써 아픔을 같이 나누어야 한다. 인간의 대재앙 앞에 천문학적 수익을 독점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죄악이다. 코로나는 인간의 탐욕에 대해 시험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피조물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주면서 역사와 함께 공존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 숱한 전염병들 중 중세의 페스트를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발병 시기와 기간 그리고 행태 및 그것이 가져다 준 변화 등을 말이다. 이 병이 발병하였을 때 역학적 명칭을 성경의 ‘온역’(페스트런스pestilence)에서 가져온 듯하다. 그 병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종교개혁(1517년)은 페스트가 발생한지(1347년) 한참 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칼빈을 소환하여 코로나 방역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고난을 극복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백신뿐인가? 아니면 개발 공급될 치료제? 아니다. 근본 해답은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것이 당신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수단이라고 명명백백하게 기록해 두셨다(겔 14:21). 그런데 교회는 코로나 발병 후 얼마나 적극적으로 그리고 엄밀히 선포함으로써 성도들을 깨우치고 세상을 깨우쳐서 온 세상에 가득한 죄악으로부터 돌아서도록 촉구하였는가? 이제야 겨우 “우리 이제 회개합시다”라고 하는 것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 늦었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최철호 목사(예장 합동총신 직전총회장, 한교연 공동회장 및 바른신앙수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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