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교회사)의 논문 ‘조미수호통상조약 140주년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의의’를 연재합니다. 2022년은 조미수호통상조약 140주년입니다.

2. 미국의 아세아 진출정책과 조선의 만남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미국은 19세기 초 대대적인 서부개척을 완료하고, 19세기 후반 태평양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시워드는 진정한 제국은 대양을 장악하는 나라라고 말하며 적극적으로 태평양으로 진출하였다. 미국은 유럽의 여러나라들과 함께 중국에 진출하였고, 1850년대에는 단독으로 일본을 개항시켰다. 그리고 1867년 알라스카를 사들여 미국 서부에서 중국으로 오는 항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런 과정 가운데 미국은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서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외교는 유럽국가들과는 달랐다. 프랑스는 전통적인 제국주의의 정책을 갖고 있었다. 아시아의 프랑스관리들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다. 당시 월남을 식민지로 갖고 있던 프랑스는 조선을 갖게 된다면 극동에서 그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프랑스 본국은 생각이 달랐다. 북미에서 멕시코를 두고 미국과 전쟁을 하고 패배했던 프랑스는 조선정복에 쏟을 힘이 없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프랑스는 병인양요이후에 조선문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이것은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전세계에 수 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영국은 이런 식민지지배가 가져다 주는 부담 때문에 직접 식민지를 만들기 보다는 영국의 상품을 수출할 수 있는 나라를 갖기를 원했다. 아울러서 전세계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던 영국은 중국과의 좋은 관계를 바탕으로 러시아를 견제하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비록 현지 영국외교관들이 러시아의 남진을 염려하여 조선에서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영국정부는 여기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영국은 제너럴 셔만호 사건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단지 실종자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조선문제에 개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가운데 조선에 대해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은 미국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동양진출의 후발국으로서 기존의 유럽국가와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 먼저 미국은 중국에 자신들을 영국과 싸워 독립한 나라로 소개하면서 영국의 행동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하였고, 프랑스가 카톨릭을 강요하는 것과 반대로 종교의 자유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미국은 가능한대로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아시아국가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무력이 아닌 외교적인 방법으로 조약을 맺고자 하였다.

이런 미국의 입장은 조선에 와서 조약을 맺으려는 외교관들의 문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가 “조선 왕을 폐위시키고, 앞으로 조선의 모든 주권은 프랑스 황제에게 있다”고 선언한 프랑스 문서와는 달리, 미국은 조선 주변에서 난파당한 미국배를 도와준 것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문서를 시작하면서 이런 맥락에서 제너럴 셔만호 문제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아울러서 미국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조선과 우의를 유지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은 근본적으로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공동으로 조선에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프랑스와 영국은 조선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려 하였다. 미국 국무장관 시워드는 1867년 3월 워싱턴에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3국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였는데, 다른 나라들은 미국이 조선문제에 대해서 앞장 설 것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조선과 서양국가와의 외교에 있어서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달레의 주장에 의하면 프랑스와 영국은 그 이후 조선에 대해서 결코 주도적인 입장에 서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서양의 여러 국가들 가운데 첫 번째로 조선과 조약을 맺은 나라가 되었고, 미국은 한국이 세계로 나가는 통로가 된 것이다.

3. 러시아의 진출과 극동 아시아의 새로운 전략

한미관계는 사실 중국의 외교정책에서 시작하였다. 원래 중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변화하는 국제관계 가운데 조선이 고립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렇다면 중국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은 조선이 어떤 특정한 국가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소위 균세정책을 통하여 조선을 특정국가에 매이지 않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서 조선을 전통적인 중화질서 속에 매어 놓으려고 했다.

이런 정책을 가장 잘 적용한 것이 바로 병인박해 이후 중국이 영국과 프랑스에 취한정책이다.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중국은 프랑스의 의도를 영국에 알려 영국으로하여금 프랑스를 견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1866년 여름 영국의 배 두 척이 동시에 조선에 와서 무역을 요구한 사건에서 잘 들어난다. 조선과 영국이 상호관계를 맺게 해서 프랑스가 조선을 독점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중국의 이런 정책은 1876년 강화도 조약에도 나타나고 있다. 1873년 일본과 중국이 대등한 조건으로 조약을 맺은 다음 일본은 조선과 조약을 맺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선이 이것을 거부하자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전쟁으로 발전하기 쉬웠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이홍장은 만일 조일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나면 과거 임진왜란처럼 조선은 중국에 도움을 요청할 것인데, 이럴 경우 과연 중국이 조선을 도와 일본과 싸워 이길 수 있는가?를 질문하였고, 결국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조선을 설득하여 일본과 조약을 맺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홍장은 조선을 설득하여 강화도 조약을 맺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다음에 동북 아시아의 판도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1879년 오래 동안 중국의 속방이었던 유구가 일본의 군현으로 편입된 것이다. 중국은 항상 일본, 유구, 조선을 동방의 3국이라고 불렀는데, 일본은 중국과 대등한 국가가 되었고, 유구는 일본의 속국이 되었고, 이제 중국은 조선마저 일본의 영향 아래 들어가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을 서양제국과 손을 잡도록 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조선과 서양제국과의 관계를 주선하여 조선과 여러 나라가 관계를 맺게 함으로서 조선이 일본의 영향 아래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1879년 유구를 일본의 군현으로 편입시킨 다음, 일본은 1876년 맺는 강화도 조약에 근거해서 원산에 항구를 열고자 하였고, 1880년 5월에는 실지로 원산항을 개항하게 되었다. 원산항의 개항은 동북아의 국제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원산개항에 대해서 가장 민감했던 국가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60년대 이후 중국의 최대 위협국가였다. 그런데 1870년대에 중국이 지배하던 신장성 지역을 러시아가 점령하여 인도양으로 진출하려고 하였고, 중국은 이것을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다시금 되찾았다. 중앙아시아에서 인도양으로 나가려는 길을 잃어버린 러시아는 이제 극동에서 새로운 진출구를 찾으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극동에 러시아가 진출하려는 조짐을 두고 이것을 가장 염려한 것은 중국이었다. 그러나 중국 못지 않게 위협을 느끼게 된 것이 일본이었다. 얼마 전까지 조선문제를 놓고 팽팽하게 대립하던 중국과 일본이 이제 러시아를 놓고 급속하게 결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세력은 다같이 조선을 반러의 대열에 끌어 드리려고 하였다. 이것이 1880년 김홍집이 일본에 갔을 때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서양 각국에서도 극동의 이런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원래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고 했던 영국, 천주교의 활동 재개에 관심을 갖고 있는 프랑스도 이같은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회에 조선의 개항에 가장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역시 미국이었다. 미국이 중국으로 가는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조선과의 조약이 중요했다. 그리하여 미국의회는 이것을 결의하였고, 미국 정부는 이것을 슈펠트제독에게 위임하였다.

슈펠트는 먼저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 접촉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여기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결국 중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예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것을 거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중국이다. 미국이 일본을 통해서 조선과 수교하려는 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안 이홍장은 미국에 접근하여 자신이 중개에 나서겠다고 제안하였다. 중국은 미국을 끌어들여 조선을 일본 외에 서양국가들과 조약을 맺게 함으로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식을 막고, 동시에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서 러시아의 위협도 막으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슈펠트는 이홍장에게 미국과 조선 사이를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쓰여진 것이 바로 조선책략이다. (계속)

박명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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