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김형석 목사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지난 회에서 가평 전투와 호크고지 전투에 참전한 캐나다 소년병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그런데 국군에서도 그들에 필적할 주인공이 학도의용군이다. 며칠 전 필자는 육군 본부로부터 5통의 서류를 전달 받았다. 6.25전쟁에 참전한 국가유공자로 지금은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선친 김신규 대위에 관한 병적 기록이었다. 1950년 6월 대학 재학 중에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였다가, 육군 장교로 임관한 후 전선을 누빈 선친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기록된 병적 서류 사본 3장과 그 서류를 정리한 2장의 거주표(병적 카드)였다.

6.25의 기적들⑩ - 어느 서울대생 학도병의 이야기
육군본부로부터 받은 선친(김신규 대위) 병적 자료들 ©김형석 교수 제공

육군 자료에 의하면 선친은 1930년 9월 6일 출생하였으며 본적은 경남 마산이다. 1944년 4월 1일 서울공업중학교(현. 서울공업고등학교 전신)에 입학하여 1949년에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에 입학하였다. 1950년 10월 29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3군단사령부 정보과로 배속되었다. 이후 공병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54년 12월 제36육군병원에 입원하였고, 이때부터 병원과 공병학교를 왕래하면서 군 생활을 계속하다가 1958년 4월 5일 제15육군병원에서 의병 전역하였다.

6.25의 기적들⑩ - 어느 서울대생 학도병의 이야기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서울공업고등학교 본관(1939년 건립) ©김형석 교수 제공

이상의 기록은 내가 어린 시절에 선친에게 듣던 얘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하자가 발견된다. 바로 선친의 인생에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학도의용군에 관한 기록이다. 육군본부 담당자에게 전화로 물었더니, 학도의용군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가 않다는 대답이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6.25전쟁 초기에 가장 위험한 전투에 투입되어 생사를 건 전쟁을 치루고도 국가로부터 인정 받지 못한 집단이 학도의용군이다.

내가 들은 기억으로는 선친은 6.25가 일어나던 해 서울대학교 공대에 입학하여 태릉 캠퍼스 부근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했다는 소문을 듣고, 용산으로 왔더니 이미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마포 나루 부근에서 헤엄을 쳐서 한강을 건넜고, 남으로 피난가던 중에 수원에서 학도의용군에 참가한 것이 평생토록 학업을 중단한 계기가 되어 버렸다.

6.25의 기적들⑩ - 어느 서울대생 학도병의 이야기
한강다리(인도교)가 폭파된 모습(1950.6.28) ©김형석 교수 제공

<서울대학교 60년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개교한 지 4년에 불과하던 서울대학교는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은 전쟁 발발 3일만에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한강 다리가 끊기면서 대학의 피난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 미처 피난하지 못한 많은 수의 학생들은 '의용군'이 되었다. 남쪽으로 피난한 학생들의 경우에도 적잖은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전투에 참전하고, 그 중에서 22명의 학생들이 전사하는 등 그 피해가 컸다. -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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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에 있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캠퍼스(1946-1975) ©김형석 교수 제공

선친의 증언과 <서울대학교 60년사>의 기록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학적부가 열람이 불가능하고, 학도의용군에 관한 병적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 같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따라서 필자는 학도의용군에 관한 연구(양영조, <6.25전쟁과 학도의용군의 역할>, 국가보훈처, 2021)에 기초하여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였다.

6.25의 기적들⑩ - 어느 서울대생 학도병의 이야기
군번도 계급도 없던 학도의용군 ©김형석 교수 제공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자 전세는 더욱 위급하게 되었다. 6월 29일 수원에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모임을 통해 발족한 '비상학도대'가 학도의용군의 기원이 되었다. 이날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수원 '사슴표' 성냥공장에서 조직된 비상학도대는 3개 소대로 편성되어 노량진 전투와 안양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7월 3일 수원도 함락되자 비상학도대 대원들도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남하하던 중에 7월 4일 대전에서 국방부 정훈국의 지도 아래 '의용학도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전세가 악화되자 이들은 대구로 이동하였다.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는 대구에서 통합하여 7월 19일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하고, 이에 소속된 학생들은 '학도의용군'으로 출정했다. 이들은 낙동강 전선을 따라 다부동, 기계, 안강, 영천, 포항, 창녕전투 등의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조국 수호를 위해 몸바쳐 싸웠다. 이때 선친은 국군 제1사단에 배속되어 다부동전투에 참전했다고 한다.(이에 관한 내용은 <김형석의 역사산책>에 실린 「현충일 - 당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참조)

한편 육군 군사연구소 남보람 소령은 「1950년 7월 5일, 그날의 학도병들」(<육군> 2017.7)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학도의용군은 1950년 6월 29일 노량진전투에서 처음 활약했고, 이후 수원에서 비상학도대로 조직되었다. 상황이 급박한 가운데 이들이 전선에 투입된 사연은 각기 다르나, 이들이 가장 먼저 한 말은 '총쏘는 법 좀 알려주세요'였다. 학도의용군들은 처음 전장에 투입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흥분되어 나누어 준 주먹밥도 먹지 않고 군가를 불렀다. 또 두려움과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지만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자는 신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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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의용군 입소를 위해 대구 농림중학교로 집결하는 학생들 ©김형석 교수 제공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1950년 8월 4일부터 9월 14일까지 낙동강을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이다. 국토의 95%를 뺏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낙동강 160㎞와 동해안 산악지역을 이은 80㎞를 연결하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북한군 13개 사단의 파상공세를 막아내고, 전쟁의 판도를 수세에서 공세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엔군의 지속적인 증원과 학도병들의 뜨거운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필자의 선친처럼 학도의용군으로 다부동전투에 참여한 박성출(1933년생)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육군은 8월 11일부로 낙동강 방어선을 축소하였다. 이에 국군 제1사단은 강변전투를 끝내고, 12일 야간에 철수를 개시하여 다부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다부동 유학산을 공격해 올라가던 중이었다. 그때 우리에게도 최후의 작전명령권이 하달되었다. 분대장에게 즉결권이 떨어졌다. 즉결권은 분대장 지시 사항에 불응할 시 언제든지 즉결처분(사살)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 (경상북도, <나라를 구한 영웅 학도병>, 2012,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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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전투의 현장 ©김형석 교수 제공

또 다른 학도병 출신 정철화(1929년생)는 이렇게 증언한다. "다부동전투에는 학도병 출신들이 많이 투입되었는데, 대구에서 모집된 군번 없는 학도병들이 수없이 쓰러져갔다. 한 중대가 8부 능선 쯤 올라가면 이미 반 이상은 없었다. 우리가 올라가면 미군은 비행기 지원사격으로 적들을 쓰러뜨렸다. ... 그러나 낮에 어렵사리 고지를 점령하고 나면 비행기 폭격을 할 수 없는 밤에는 인민군들의 반격이 이어졌다. 다부동 골짜기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비린내가 진동해서 '피의 골짜기'를 이루었다." - (위의 책, p.167)

이런 상황에서 어린 학생들이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개인 화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전쟁을 치루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어린 나이에 곁에서 죽어가는 전우들을 지켜보는 것도 고통스럽고, 전투를 치루면서 며칠 씩 밥을 굶는 일도 다반사였다. 최후에는 백병전이 전개되자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게 되었다. 당시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어느 학도병의 일기를 살펴보자.

"1950년 8월 10일. 목요일.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 사이에 두고 10여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 적병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 <학도병 이우근의 수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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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6세이던 학도병 이우근의 모습 ©김형석 교수 제공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살아서 돌아가겠다던 학도병 이우근은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피에 저린 교복 상의에 이 수첩이 꼭 접힌 채로 발견되었다. 이날 전투에서 전사한 48명의 시신은 포항여중 화단가에 가매장되었다가, 이후 1955년 국립 서울현충원으로 옮겨져 '무명 용사의 묘'에 안장되었다. 이렇게 허다한 젊은 청춘들의 희생으로 낙동강 전선을 지켜냈지만, 이때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필자의 선친 역시 학도병 시절에 다부동전투를 치룬 것으로 인해 평생토록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이런 사례들처럼 6.25전쟁에 참전한 학도병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한 '역사의 영웅'이다. 군번도 없이, 교복을 입은 채로,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총 한 자루 움켜쥐고 전쟁터에 뛰어든 10대와 20대 학도 의용군들의 눈부신 활약은 한국전쟁 초기 급박한 전황에서 북한 정예부대들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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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으로 이동하는 학도병들(미 국립문서관리청 소장) ©김형석 교수 제공

다부동전투가 끝난 후 선친은 장교 양성요원으로 선발되어 9월 1일부로 대구 고산초등학교(경북 경산군 고산면)에 설치된 공병훈련소에 입소했다. 당시 상황은 간부 요원의 수요가 증가하자 단기 사관 형태의 초급 장교와 하사관을 양성하는 과정이 난립하였는데, 선친은 공병 5기로 참여하여 8주간의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10월 29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이상의 사실은 선친의 동기생인 장해상 예비역 대령으로부터 확인한 내용임)

첫 부임지는 제3군단사령부 정보과 소속이었고, 배속된 후 공병부로 보직을 받았다. 필자가 선친에게서 들은 기억을 더듬어보면, 3군단사령부 정보과에 배속된 것은 그 시기에 미군 부대로 파견되어 화염방사기를 비롯한 신형 무기를 다루는 교관 요원으로 훈련을 받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산악전투가 많은 한국 지형의 특성상 녹음이 우거질 때면 화염방사기가 매우 중요한 무기였는데, 서울대학교 공대 재학 중에 입대한 선친은 이 신형 무기를 다룰 수 있는 교관 요원으로 적임자였다. 따라서 선친은 군 생활의 대부분을 공병학교와 보병학교의 교관 요원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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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서 화염방사기를 사용하고 있는 유엔군(1951.5) ©김형석 교수 제공

1951년 5월 26일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현리전투 패배에 따른 책임을 물어 국군 제3군단을 해체하였다. 이에 따라 선친도 제1군단 산하 제1801기술공병단으로 전속되어, 8월 14일부터 발생한 향로봉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때 전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부상을 당해 제1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결국 선친께서는 학도의용군 시절을 제외한 7년 8개월의 군 생활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군 병원에서 보냈다. 더욱이 1954년 7월 1일 대위로 진급하고 결혼식까지 치룬 선친은 그해 12월 13일 제36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얼마 후 제15육군병원으로 전원 조치되었다. 그리고 남편을 간병하기 위해 여수로 온 어머니는 그곳에서 나를 출산하였다. 경상도 부모를 둔 내가 전라도에 태를 묻게 된 사연이다. 이후 선친은 공병학교와 육군병원을 오가다가 1958년 7월 31일부로 전역하였다.

6.25의 기적들⑩ - 어느 서울대생 학도병의 이야기
<월간조선>(2008.7)에 실린 제15육군병원 장교 병동 - 필자의 선친과는 무관함 ©김형석 교수 제공

필자가 어렸을 적에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김 대위"라고 불렀다. 우리가 살던 경남 진양군 일반성면 농촌 마을은 외가의 본거지였다. 남편이 군에서 '의가사 제대'하자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어머니는 사표를 내고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에서 포목상을 시작하였다. 문제는 평소에 한없이 자상하던 아버지는 화가 나면 참지를 못하고 동네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 학창시절에 갑작스럽게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나가서 적군과 생사를 건 백병전을 치루었던 아버지가 트라우마에 시달린 탓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늘 천식에 시달렸다. 시골 병원에서 결핵과 기관지 약을 처방해주었으나 차도가 없었다. 6.25가 끝나고 50년이 가까워질 무렵 정부에서 '훈장 찾아주기'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찾아 준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부산국군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고서야 폐 주위를 감싼 파편 가루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후 부산국군통합병원에서 종합 검진을 받은 결과, 군의관의 말이 "CT를 찍어보니 폐 표면에 검은 점이 새까맣게 붙어있는데 전쟁터에서 파편가루가 몸속으로 들어와 폐에 붙은 것으로 보인다. 조금만 더 건강하시면 그 부위를 수술로 떼버리면 되는데, 지금은 몸이 너무 쇠약해서 수술을 감당하기가 힘들 테니 그대로 지내시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힘들게 사시던 아버지는 2007년 2월 24일 77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6.25의 기적들⑩ - 어느 서울대생 학도병의 이야기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선친의 묘 ©김형석 교수 제공

그래도 아버지는 전쟁 중에 간부후보생으로 선발되어 장교로 임관한 덕분에 국가로부터 참전 공로를 인정받았지만, 군번도 없었던 탓으로 참전 사실조차 인정 받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다. 이 분들에게 국가의 보훈은 '그림의 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의 주요한 순간 마다 빛을 발한 학도병들의 고귀한 희생은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견인차였다고 역사는 평가할 것이다.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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