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넘치고 확산 쉬운 환경일수록 사실이 발견되면
후학들이 부담 없이 바로 잡는 학계 풍토로 변화되길“

코로나19가 발발하기 이전 기독교계에서는 알렉산더 A.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피득 彼得) 선교사를 기억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피터스 목사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했고, 우리가 몰랐던 잊지 말아야 할 은인 피터스 선교사의 사역을 재조명하였다. 특별히 그의 구약성경 한글 번역 사역과 문서 선교, 교회 개척 헌신에 대해 널리 알려 한국교회 선교와 교육에 모범을 삼기를 원하는 활동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움직임 이전 2017년 발족된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에서는 피터스 목사 기념비 건립, 그의 설교집 출판, 최초의 구약성경 번역본인 ‘시편촬요’ 및 찬셩시(초기 한국교회 찬송가 책) 영인본 제작, 전기 집필 및 출판, 관련 자료 수집, 피터스 목사 사료실 및 전시실, 기념성서연구원 개원 등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며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참여를 요청한 바 있다.

이와는 별도로 학계에서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피터스 선교사에 관한 연구 성과를 조금씩 내놓고 있었다. 눈에 띄는 연구자를 소개하자면, 『19세기말 서양선교사와 한국사회』를 공저한 유영열·윤정란을 필두로 박용규, 김중은, 고영자, 박정환, 강혜정, 이영미 등이다.

글쓴이 리진만은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 여행기를 발굴하며 그의 첫 번째 제주도 방문기가 실린 『The Korean Repository』 원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1899년 발행 『The Korean Repository』를 발굴하게 되어 이 글을 보내왔다. 이에 본지는 3회에 걸쳐 『The Korean Repository』의 1899년 발행 사실과 피터스 선교사의 첫 번째 제주도 방문 사실에 관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Ⅰ. 들어가는 말

알렉산더 A.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彼得)
알렉산더 A.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彼得)

알렉산더 피터스1) 선교사는 미국성서공회의 첫 번째 ‘매서인’으로 한국에 임명되어 1895년 한국에 와서 한글성경 반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는 한국에 와 한글을 익혀 4년 만에 최초로 구약성경(시편촬요) 한국어 번역을 한 분이다. 1897년부터 그가 매서전도인 사역을 하며 틈틈이 시간을 내어 번역한 『시편촬요』2)로 구약을 한국어로 번역한 선구자가 된 것이다.

피터스는 189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필리핀 사역을 하던 중, 1904년 한국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미국 북장로교회 서울 남부지역 선교구를 맡아 전도와 교회개척, 사경회 인도 등에 헌신했다. 그러던 차에 구약을 번역할 때 히브리어 원전을 잘 읽을 수 있던 그는 번역위원회의 관심을 받았고. 드디어 1906년 10월 3일부터 크램(Willard Gliden Cram)3) 선교사와 함께 공인번역위원회 번역위원으로 선임되어 1910년 공인번역위원회가 구약 한글 번역을 마치는 데 커다란 일익을 담당하고 한국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았다.

그러나 이렇게 헌신적으로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 피터스 선교사에 대해 기독교인 성도들은 물론 교계의 목회자들, 더구나 선교역사 연구자들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필자는 그 큰 요인 중 하나가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선교사들을 많이 파송한 미국과 영국, 또는 호주인이 아닌 비주류 국적의 러시아 태생 유대계 매서인이었고, 더구나 초기 미국, 영국 선교사들이 유복한 가정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했지만 피터스 선교사는 러시아의 빈한한 가정환경과 내세우기에는 초라한 그의 고향의 고전인문고등학교(Classical Gymnasium)를 졸업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로 인해 초기 매서인으로 미국성서공회와 대영성서공회에서 사역 당시 선교 관련 신문, 잡지뿐만 아니라 선교사 사회에서도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던 요인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한국에서 선교사 중 최초로 1898년 구약성경을 번역해 출간했지만, 그가 처음 한국에 도착 한지 거의 10년이 지난 1906년에야 성경번역위원으로 임명을 받은 것이다.

지난해 필자는 ‘매서인’ 관련 책을 발간하며 수십 명의 선교사 사역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교회를 위해 위대한 공헌을 한 ‘매서전도인’이며, 성경번역자이고, 교회개척자인 피터스 선교사에 대해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은 데 대한 죄송함과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순행 기록을 정리하고 번역하는 가운데 필자 역시 제일 먼저 소개한 선교사들은 주로 당시 주류를 이루었던 미국 선교사들(존스, 왐볼드, 아펜젤러)이었음을 고백한다.

다행히도 필자는 미공개된 아펜젤러의 순행일기를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제주도를 첫 번째로 방문한 피터스 선교사의 여행기록 영인본을 유니언신학대학 아카이브에서 발굴하게 되었다. 이에 더해 그의 글이 최초로 실렸던 1899년 발행된 『The Korean Repository』를 연세대 중앙도서관에서 발견하게 되었고, 또한 2013년 제주 우당도서관에서 발간한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을 번역한 고영자 박사를 통해 피터스의 견문록 후반부 번역본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접하게 된 개신교 선교사 피터스의 첫 번째 제주도 방문에 관해 앞선 발표 자료들과 그의 글이 처음 실렸던 『The Korean Repository』에 관한 글을 보며 몇 가지 의구심을 가지던 차에 선행연구 자료들 몇 군데에서 오류를 발견하게 되어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코리안 리포지터리
『The Korean Repository』, A Visit To Quelpart, Vol.1, No.10,11,12, April, 1899. 『The Korean Repository』는 1898년 11월 호에서 1년간 정간한다고 공지를 올렸으나, 실제로는 1899년 2월 9일부터 6월 1일까지 매주 목요일 8페이지 분량으로 총 17회 발행됐다. 이 자료는 학계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피터스의 제주 방문기는 1899년 4월 13일 자로 발행된 『리포지터리』에 실렸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물론 피터스 선교사에 관한 자료가 빈곤한 가운데 내놓은 그들의 자료에서 몇몇 오류가 나타나고 있지만, 피터스의 사역과 특별히 그의 제주도 방문기를 연구한 선행연구자들의 노고에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선행연구자들이 성과를 낸 과정에서 남긴 몇 가지 오류에 대해 공론화하고 바로잡아야 오류에 대한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특별히 필자가 발견한 오류들은 지금까지 피터스 관련 책과 논문을 발표한 한국 기독교 역사학계의 저명한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자료에 있는 것이다. 이분들의 유명세와 학계의 권위, 그리고 신진 세대들의 한국적 겸양지심으로 후학들은 선행연구 자료를 무한 신뢰하며, 가끔 원전 확인도 없이 재인용해 2차 자료를 생산했다. 더구나 요즘처럼 정보가 넘치고 확산이 쉬운 환경일수록 사실(fact)이 발견되면 후학들이 이를 부담 없이 바로 잡는 학계의 풍토로 변화되기를 원한다. 기존 자료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더 나은 자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람에서 필자는 피터스 선교사에 관한 기술과 그의 첫 번째 제주도 방문 기록인 알렉산더 피터스의 ’켈파트(Quelpart)섬 방문‘을 게재한 『The Korean Repository』 소개에 관한 기존 연구 자료에서 발견되는 오류들을 함께 고찰해 보고자 한다.

본 소고에서 필자는 주로 위 연구자들이 기술한 피터스 선교사와 그에 관한 연구의 저본으로 사용한 『The Korean Repository』 영문 잡지, 그리고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도 방문 기록 연구물에 나타난 오류에 대한 수정 자료를 제시할 것이다.

Ⅱ. 알렉산더 A.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彼得)의 켈파트섬 방문 “A Visit To Quelpart” 전거 및 1차 자료

2-1. 1899년 피터스에 의해 기록된 제주 방문기 영인본, UTS, Burke Library Archive
2-2. 『The Korean Repository』, A Visit To Quelpart, Vol.1, No.10,11,12, April, 1899.
2-3. 『The Korea Review』, A Visit To Quelpart, Vol.5. No.5~6 / May and June, 1905.
2-4. Kenmure, 「Pioneering in Korea」, The Bible Society Reporter, July, 1899, p.168.
2-5. 「New Ground」, British & Foreign Bible Society, 1900, p.277.

두루 의사와 전킨 선교사의 군산 첫 선교지 표지석.
두루 의사와 전킨 선교사의 군산 첫 선교지 표지석. ©군산시 공식 블로그

피터스의 켈파트섬 방문 기록의 원전인 위자료 2-1. 유니언신학대학 버크 라이브러리 아카이브(Burke Library Archive)에서 필자가 발굴한 피터스의 켈파트섬 방문 기록(일기)에는 저자 표시도 없이 글의 내용 중 그냥 1인칭 “I”로만 쓰여 있었다. 대학 아카이브의 설명에도 기록 연대는 18XX년으로 표기되어 그들도 이 자료의 저자와 작성 연대가 언제인지 특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제주 방문기 첫날 부분에 제주도를 향해 켄뮤어(Mr. Kenmure)4)와 함께 제물포를 출발한 날짜가 1899년 2월 18일이었고, 첫 기착지 군산에 도착한 날짜가 일요일이라 군산 선교부에 있는 두루(Dr. Drew) 의사와 전킨(Mr. Junkin) 선교사와 함께 현지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는 기술이 있어, 만년력을 통해 피터스가 제주여행을 한 해가 1899년임을 특정할 수 있었다.

위자료 2-2. 『The Korean Repository』 (이하 『리포지터리』)는 미국 북감리교회 한국선교부에서 배재학당 내 미이미활판소에서 발행한 영문 잡지다. 1892년 1월 창간호를 발간했고, 여건이 여의치 않아 2년간 발행을 멈추었다가 1895년에야 아펜젤러와 존스에 의해 1898년까지 월간으로 Volume 5.까지 발행되었으며, 1899년에는 2월 9일부터 주간으로 그해 6월 1일까지 매주 목요일 총 17회 발행되었다.

하지만 『리포지터리』는 1898년 11월 호에서 1년간 정간을 한다고 공지를 올렸다. 이로 인해 1899년 발간된 『리포지터리』를 보지 못한 많은 후대의 연구자들은 1899년 2월부터 6월까지 주간으로 발행된 『리포지터리』의 존재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필자가 소개하는 피터스의 첫 번째 켈파트섬(이하 ‘제주도’) 방문기를 게재한 1899년도 발행 『리포지터리』 소개가 잘못된 정보라고 판단했을 듯하다.

대영성서공회 총무 켄뮤어의 제주 여행 보고
2-4. Kenmure, 「Pioneering in Korea」, The Bible Society Reporter, July, 1899, p.168. 대영성서공회 총무 켄뮤어의 제주 여행 보고. 켄뮤어는 대영성서공회 부총무 피터스와 1899년 2월 18일부터 3월 25일까지 제주도를 함께 여행했다. ©대한성서공회 성서학도서관

1차 자료 중 마지막으로 피터스의 제주도 방문 기록을 재수록한 『The Korea Review』 (이하 『코리아 리뷰』)는 1901년 헐버트(H. B. Hulbert)가 관립한성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창간한 매체이다. 『코리아 리뷰』 Vol.5. No. 5.에서는 글 서두에 왜 『코리아 리뷰』 편집진들은 피터스의 제주도 방문기를 재수록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아래와 같이 한 후 피터스의 제주도 방문기를 싣고 있다.

“켈파트섬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1899년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소개되었다. 그 기사를 쓴 이는 A. A. 피터즈 목사로 그 섬을 방문했던 몇몇 외국인 중 한 사람이다. 편집 규정으로 우리는 이미 발행된 글을 반복 게재하는 것을 삼가고 있다. 그러나 그 소식지의 기사와 주제에 흥미를 느끼고 읽은 독자가 거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번에 과감히 재수록하기로 했다.”

하지만, 1905년 『코리아 리뷰』 편집인들은 피터스의 제주도 여행기를 재게재하며 무슨 연유에서인지 기존 『리포지터리』 Vol.Ⅰ. NO.Ⅹ.(1899년 4월 13일 자)에 첫 페이지부터 무려 4면에 걸쳐 소개된 ‘제주 섬 방문기’를 싣지 않았다. 여기에는 여행 출발 날짜 등이 나와 있고, 또한 제물포 출발 후 첫 기착지 군산에서 만난 군산선교부의 두루 의사와 전킨 선교사와의 만남과 한국인 교회 주일예배 참석 등이 실려 있다. 이러한 정보가 누락된 제주 섬 방문기 후편만을 『코리아 리뷰』 자료에서 본 사람들은 피터스 선교사가 언제 제주도를 여행했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1905년 발행된 『코리아 리뷰』에 켈파트섬 방문기에 대한 전거 설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021년 4월까지 학계와 교계 연구자들의 피터스 자료에 1899년도에 발행된 『리포지터리』 존재에 대해 언급한 것은 거의 없었다. 다만, 감리교신학대 역사박물관에서 2009년 발행한 『감리교신학대학교 고서도서목록집』에 “1899.6. 廢刊” 이렇게 간단히 한 줄 소개된 것이 전부였다. 이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리포지터리』의 관련 자료를 장서원 박사와 함께 찾던 중, 1899년 발간된 『리포지터리』가 ‘연세대 국학자료실’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이 자료를 소개하게 된 것이다. <계속>

새로운 성경반포 지역에 대한 1900년 대영성서공회 연례보고서
2-5. 「New Ground」, British & Foreign Bible Society, 1900, p.277. 새로운 성경반포 지역에 대한 1900년 대영성서공회 연례보고서. 277쪽. ©대한성서공회 성서학도서관

[미주]
1) 피터스 선교사는 1871년 러시아(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 Dnipro 지역)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했다. 1895년 4월 일본에서 피터스(Albertus Pieters)로부터 세례를 받고 개명했으며, 본명은 이삭 프룸킨(Itzhak Frumkin)이다. 출처: “한인교회는 피터스 목사를 잊지 않았습니다.”,(http://www.newsm.com) 2018.11.18.

2) 『시편』이 1906년 언더우드에 의해 번역되기 이전 피터스가 시편 150편 중 62편을 골라 1898년 발간한 개인역 본이다.

3) 크램(Willard Gliden Cram, 奇義男)은 피터스와 함께 1906년 성서번역위원회 번역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번역위원으로서 잠언, 삼상·하, 말라기, 전도서 등의 번역을 도왔고, 개인적으로 레위기를 번역하였다. 대한성서공회사Ⅱ. 75쪽.

4) 1895년 10월 입국한 켄뮤어는 대영성서공회 총무로서 이듬해 5월 한국지부를 공인받고 성경반포사업에 큰 역할을 했다. 1898년에는 미국성서공회 매서인 활동을 하던 피터스를 대영성서공회 부총무에 임명해 함께 사역했다. 그는 1905년 4월 20일 밀러가 임시 총무로 선출될 때까지 총무로 근무했다.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외부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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