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와 찬송가 이야기
    패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어린 아기였을 때부터 맹인이었고 성인으로서 그녀가 본 유일한 빛은 하나님의 빛이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녀를 떠 바쳐왔다. 1905년 3월 24일에, 그녀는 85세가 되었고, 뉴욕의 교회들은 그 날을 패니 크로스비의 날로 할 것을 결정했다. 3월 26일 주일에 미국 전역의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녀의 찬송가를 부르기 위해 교회마다 가득했다. 패니 크로스비의 음악이 ..
  •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와 찬송가 이야기
    패니는 낮에는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며 영혼구원에 힘썼고, 집으로 돌아온 밤에는 영감의 시들을 써나갔다. 몸이 두개라도 모자랐다. 아침이 되면 바로 밤이 되었고 잠깐 집에 들어온 뒤 다시 거리로 나가야했다. 워터 스트리트 선교회에서 사역을 열심히 감당했던 제리 매컬리가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죽었다. 이후 샘 해들리가 ‘워터 스트리트 선교회’를 맡았고, 패니는 이때 샘의 동생인 헨리 해리슨 해들..
  •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와 찬송가 이야기
    평생 앞을 보지 못했던 찬송가의 여왕 패니 크로스비의 삶에는 5가지 특별한 특징이 있었다. 첫째로 그녀는 매우 부지런한 일꾼이었다. 패니 크로스비는 매우 열심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느 곳에 있든지 그냥 앉아 있었던 적이 없었다. 늘 움직이거나 말을 하거나 무엇인가를 했다. 그리고 친구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작은 가방과 뜨개바늘을 선물로 주었다. 그녀는 뉴욕 맹인학교시절 훌륭하게 배운..
  •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와 찬송가 이야기
    패니 크로스비는 특별히 헬렌 켈러의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헬렌 켈러가 자신보다 60여년 뒤에 태어났지만 많은 고통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모습에 패니는 세대를 뛰어 넘어 매우 절친한 친구 같은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내 삶의 이야기,’ ‘내가 사는 세계,’ ‘암흑세계서 벗어나,’ 그리고 작은 책 ‘낭만주의,’ 등 헬렌 켈러의 모든 책을 읽었다. 패니는 헬렌 켈러가 그렇게..
  •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와 찬송가 이야기
    1870년 대 초반 패니 크로스비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돈 박사와 계속 함께 동역했고, 그는 그녀의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아주 재능이 많은 작곡가들이 그녀의 아파트를 찾았다. 그들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가를 원했다. 1875년에 복음전도자 드와이트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와 아이라 생키..
  •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와 찬송가 이야기
    당시 많은 어린이들이 교회 주일학교에 다녔다. 교회 주일학교는 브래드베리의 찬송가의 영향이 크게 미쳤다. 브래드베리는 교회와 주일학교 사이를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로 음악을 사용했다. 시대적인 환경도 주일학교를 활성화시키는 한 부분으로 작용했다. 주일학교 찬송의 보급을 쉽게 할 수 있는 철도의 확충과 싼 펄프 종이의 발명과 제본, 인쇄술의 발전 등도 주일학교 찬송을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대중성..
  •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와 찬송가 이야기
    1874년 언젠가 패니 크로스비의 동역자인 돈 박사는 그녀에게 찬송가 ‘내 삶보다 더한 구세주’(찬송가 424장 ‘나의 생명 되신 주’)의 곡과 제목을 보내왔다. 그리고 찬송가에 그 제목을 쓸 것을 그녀에게 요청했다. 이 찬송가는 그녀의 가장 슬픈 순간에 기쁨과 위로를 주었다. 패니는 그 찬송가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믿음이 더 강건해지고 소망이 타오르며 주를 향한 사랑이 넘쳐남을 느꼈다. ..
  •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와 찬송가 이야기
    찬송가 ‘주 예수 넓은 품에’의 간증은 바다건너 여기저기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1887년 아프리카의 레이크 빅토리아의 해안에서 있었던 영국국교회 주교였던 제임스 해닝턴의 간증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해닝턴의 자서전에는 찬송가 ‘주 예수 넓은 품에’와 관련된 간증이 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나를 땅으로 내던지고 때렸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나는 땅에 다리를 ..
  •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와 찬송가 이야기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가중 하나가 ‘나를 지나치지 마세요, 온유한 구세주여’(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다. 이 찬송가는 전도 집회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많은 영혼의 회심을 가져왔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많이 불린 찬송가 중 하나이기도하다. 나를 지나치지 마세요, 온유한 구세주여, 제 초라한 외침을 들어주세요. 당신이 다른 사람을 부르고 있는 ..
  •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와 찬송가
    돈 박사와의 동역이 크로스비를 따뜻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로 이끌었다면 피비 파머 냅(Phoebe Palmer Knapp, 1839-1908)과는 사회활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피비 파머 냅은 전형적인 감리교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녀는 16살 때에 23살의 사업가이자 독실한 감리교인인 조셉 페어 차일드와 결혼했다. 피비의 남편은 사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이루어 ‘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회사’를 ..
  •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와 찬송가
    패니 크로스비의 가장 가까운 모든 이들은 그녀가 가장 많은 일을 할 때 죽었다. 브래드베리가 죽은 후, 로우리 박사의 죽음은 역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30년 후 그가 뉴저지 주 플레인필드 그의 집에 누워 있을 때, 패니는 유람선을 타고 강을 건너 그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그들은 함께 동역하고 사역했던 세월들을 기억하면서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 가는 길에 친구를 위해..
  •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와 찬송가 이야기
    패니 크로스비가 일생동안 사역하면서 가장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윌리엄 브래드베리(William Bradbury, 1816-1868)다. 로웰 메이슨이 크로스비의 음악적 기초를 다지고, 조지 루트와의 동역이 크로스비를 대중적인 인기인으로 만들었다면, 브래드베리는 그녀를 본격적인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끌어낸 인물이었다. 브래드베리는 패니 크로스비가 본격적인 하나님의 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