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니 크로스비
패니 크로스비

패니는 낮에는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며 영혼구원에 힘썼고, 집으로 돌아온 밤에는 영감의 시들을 써나갔다. 몸이 두개라도 모자랐다. 아침이 되면 바로 밤이 되었고 잠깐 집에 들어온 뒤 다시 거리로 나가야했다. 워터 스트리트 선교회에서 사역을 열심히 감당했던 제리 매컬리가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죽었다. 이후 샘 해들리가 ‘워터 스트리트 선교회’를 맡았고, 패니는 이때 샘의 동생인 헨리 해리슨 해들리를 만났다. 헨리는 남북 전쟁 시에는 뛰어난 대령이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술로 인해 변호사 일을 못하게 되었고, 그 후 뉴욕에서 신문을 시작했다. 패니는 그에게 알코올 중독에 반대하는 설교를 담은 수 십 편의 시를 보냈다. 대령은 그것들을 신문에 실었지만, 그것들은 그에게 거의 소용이 없었다. 형의 ‘워터 스트리트 선교회’에서, 헨리는 음주가 얼마나 나쁜가에 대한 많은 설교를 들었고, 그녀는 마침내 그에게 진지한 금주에 대한 기도를 하게 만들었다. 치료는 성공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일어나서 결코 한 방울의 술도 건드리지 않았다. 헨리는 거리의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돕는 구제 선교회를 설립했고 20년도 안되어 그 수는 100여개로 늘어났다. 그는 곧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패니의 뛰어난 친구들 중의 하나인 독일인 게르하르트 쉴링은 선교사역을 위해 버마에 갔었다. 뉴욕에 도착한 이후에, 그는 신학교에 들어갔고, 곧 거리의 선교회 중 한곳에서 패니를 만났다. 비록 쉴링은 패니보다 40살이 젊었지만 그들은 함께 거리에서 영혼구원 사역을 하며 훌륭한 동역자가 되었다. 그는 일요일과 수요일마다 그녀를 자신의 마차에 태워 함께 교회에 갔다. 그는 그녀의 찬송가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녀의 모든 사역을 사랑했다. 1894년에 쉴링은 선교사로 버마에 다시 돌아가기로 했고 그의 갑작스런 결정을 설명했다, “버마로 돌아가라는 성령의 감동이 패니 크로스비로부터 왔습니다.” 그는 이번에 머물면서 성경과 기독교의 찬송가를 버마 토착어로 번역하는 위대한 영혼구원의 사명을 감당했다.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신체적인 접촉은 패니에게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언어였다. 그녀는 여동생인 캐리와 줄리처럼, 또는 그녀의 많은 수백의 친구들처럼, 거리의 술주정뱅이와 바워리의 건달들을 쉽게 껴안았다. 그녀의 찬송가는 ‘주 예수 넓은 품에’와 ‘인애하신 구세주여’처럼 신체적인 접촉과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찬송가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에서 그녀는 썼다.

그러나 저는 믿음의 품 안에서 일어나기를
그리고 당신에게 더 가까이 끌려지기를 갈망합니다.
축복의 주님, 저를 당신께로 가까이 더 가까이 이끄소서,
당신이 죽으신 십자가로.

<찬송가 540장>
믿는 맘으로 주께 가오니 나를 영접 하소서,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심지어 그녀의 초기 시에서 이 같은 접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할머니의 흔들의자”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그녀의 사랑스런 팔로 그녀는 나를 안고,
그리고 그녀의 참을성 있는 돌봄 아래,
나는 꿈의 나라로 태어났네,
그녀의 소중하고 낡은 흔들의자에서.

패니 크로스비에게 접촉은 중요했다. 버림받은 많은 사람들을 그녀의 팔로, 가슴으로 안아주는 것만큼 더 큰 위로와 소망은 없었다. 패니 크로스비는 거리에서 그리고 빈민가에서 남들이 돌보지 않는 버려진 많은 사람들을 마음을 다해 가슴으로 나가갔다. 그리고 수많은 선교회와 교회에서 가능한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사역했다. 70세가 된 이후에도 빈민가의 거친 거리는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의 육신은 점점 지치고 힘들어갔으나, 그녀의 마음과 영혼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오를 산이 더 있었고 구원될 영혼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1884년 3월 24일, 비글로 & 메인 출판사는 패니 크로스비가 이십년 동안 헌신한 공로로 첫 번째 파티를 열었다. 그 동안 그녀는 3,000곡 이상의 찬송가를 썼다. 많은 친구들이 참석했고, 그녀의 사역을 축하해주었다. 파티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재치가 넘치는 시들을 보냈는데, 모두 복음 찬송가로 노부인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들은 패니가 그들 대부분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얼마 후 그녀의 친구 그루버 클리브랜드가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그녀는 활기가 넘쳤다. 대통령 임기를 끝내고 메디슨으로 돌아와 패니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함께 뉴욕 맹인학교에서 보냈던 시절을 회상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패니는 아직도 클리브랜드를 키 크고 마른 장난꾸러기로 기억했다. 하지만 그는 가는 머릿결에 덩치가 크고, 강건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하면서 보냈던 훌륭한 유머 감각과 많은 행복한 순간들을 생각하면서 더 새로워진 우정을 즐겼다.

그녀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패니는 여전히 가난했다. 그녀의 엄마가 죽은 이후 남은 약간의 재산을 캐리와 줄리에게 넘겼다. 뉴욕의 거리에서 모든 이들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여전히 몸에 맞는 낡은 옷과 1840년대부터 써 온 넝마 같은 모자를 쓴 작고 등이 굽은 부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바워리 거리 근처에서 운영되는 많은 선교 시설에서 설교를 했고 아마도 그녀의 옷 일부는 기부에서 얻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또한 여전히 비글로 & 메인 출판사와 계속 일을 했고 가끔 스웨니와 커크패트릭과도 일을 했다. 80세를 바라보는 맹인으로서 그녀는 여전히 자신보다 20년 젊은 사람들보다 더 활동적이었고 예배를 수행하면서 YMCA 철도 지부에서 강연을 했다.

패니는 그녀의 긴 생애의 대부분을 열정적으로 주님께 봉사했다. 그녀는 자신의 복지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항상 하나님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기도할 때 그녀는 더 큰 필요한 것을 위해 자신의 필요한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패니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비록 필요했을 지라도 돈을 빌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주님이 패니에게 들리셨고 도움을 위해 그녀의 친구들을 불렀다. 아이라 생키, 하워드 돈, 존 스웨니, 로버트 로우리, 그리고 비글로 & 메인 출판사는 모두 패니의 찬송가 때문에 부유한 음악가나 출판업자가 되었다. 그들 중 건강이 좋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제 하나 씩, 그들은 자신에게 왜 패니가 자신들처럼 편안하고 부유하면 안 되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각각은 그 자신의 방법으로 그녀를 돕기 시작했지만 가급적 보이지 않게 도왔다.

무디 씨는 또 다른 “영적 대각성”을 열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이제 기독교의 부활에 관심이 없었다. 거리의 선교 시설은 여전히 집 없고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지원은 떨어졌고 일부 선교 시설들은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무디는 도시의 교회들에게 불만을 나타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오르간 앞에 몇 시간동안이나 앉아서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가 ‘후일에 생명 그칠 때’를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흐를 때까지 불렀다.

언젠가 은현이 끊어지고,
더 이상 지금처럼 노래하지 않겠지
그러나 아, 깨어날 때 그 기쁨이란
왕의 궁전 안에서!

<찬송가 608장>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성부의 집에 깰 때에
내 기쁨 한량없겠네.

복음 전도사로서 무디의 생은 그 끝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패니에 대한 큰 사랑은 다시 한 번 비글로 & 메인 출판사로 가게 했다. 그녀에게 각각의 찬송가에 대해 2달러를 지급하는 대신, 비글로 & 메인 출판사에게 일주일에 8달러의 월급을 주자고 제안했다. 크로스비는 1년에 400달러 이상을 벌어 본 적이 없었으므로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녀에게 항구적인 수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 패니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이 기간에도 한 번 그녀는 심장마비를 겪었고, 부분적인 혼수상태에 빠졌었다. 이에 비글로 & 메인 출판사는 무디의 의견에 동의했고 그녀가 살아 있는 한 일주일에 8달러씩의 항구적인 월급을 주기로 했다. 패니는 곧 회복했고 다시 또 18년을 살았다.

이 기간 동안에 이제 늙고 귀가 먼 로우리 박사도 패니의 복지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는 비글로 & 메인 출판사의 창고에 그녀의 수 백편의 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오래 전에 쓴 시집 3권을 알고 있었다. 새 찬송가는 잘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로우리는 비글로 & 메인 출판사에게 패니의 시가 있는 서류함을 찾아보도록 했다. 이전에 그녀가 쓴 3권의 책에 몇 개의 엄선된 곡을 추가함으로써, 비글로 & 메인 출판사는 패니의 가장 훌륭한 시를 ‘저녁 종소리’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그것은 모두 224페이지이었고 한 권에 50센트에 팔렸다. 여러 해에 걸쳐, 비글로 & 메인 출판사는 몇 판을 팔았고 모든 이익을 패니 크로스비에게 주었다.

또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도우러 왔다. 패니의 가장 오래되고 부유한 친구 중의 하나인, 피비 파머 냅은 종종 그녀에게 돈을 주려고 했지만 크로스비는 항상 극구 사양했다. 피비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패니 크로스비의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몇 권의 책의 저자이며 ‘에브리 웨어’ 잡지사의 편집자인 윌 칼리톤에게 갔고, 그에게 패니를 만나 그녀의 초기 삶을 이야기로 써보라고 촉구했다. 칼리톤은 패니를 평소 항상 존경해왔기 때문에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연속물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가 그녀가 사는 가난한 브룩클린 근처의 방이 하나인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가 사는 곳의 초라함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곧 그녀에게 각각의 기사에 대해 10달러를 지급하는 데 동의했고, ‘에브리 웨어’ 지는 연속물을 실었다. 1903년에 칼리톤은 ‘패니 크로스비의 삶의 이야기’를 책의 형태로 냈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그것을 인쇄했다.

패니의 이야기를 쓰면서, 칼리톤은 비글로 & 메인 출판사가 그녀에게 결코 충분히 지급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칼리톤의 요구로 인해, 피비 냅도 같은 결론을 냈고 패니의 시를 출간하는 출판사들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다. 패니 크로스비가 자신의 선택으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이해하는 그녀의 친구는 거의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지라도, 패니는 항상 자신이 그 돈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움의 손길들을 통해 많은 돈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 돈들을 모아 자신의 여생을 위해 쓸 수도 있었지만, 모든 돈을 대부분 선교시설로 보냈다.

1898년에 패니는 폐렴에 걸렸고 그녀의 건강은 위기에 다다랐다. 그녀의 여동생, 줄리와 캐리가 브룩클린으로 달려왔고 그녀를 브리지포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줄리는 그녀의 여생 동안 그녀를 돌보았다. 그리고 캐리는 패니의 비서가 되었지만 오래 살지는 못했다.

패니는 다시 조금 회복되자마자 쉼 없이 찬송가를 쓰고 전도하며 강연하는 사역을 시작했다. 그녀가 다시 많은 사람들에서 말할 때 사람들은 항상 그녀의 강한 목소리와 침착한 영혼에 감동받았다. 비록 등이 굽고 아주 늙었지만, “가스펠의 여왕”에게는 뭔가 젊은 것이 있었다. 그녀의 존재와 태도, 음악적인 목소리, 그리고 감동의 영적 메시지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설자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그녀는 할일이 있고 바쁘게 일하는 한 늘 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하나님이 사명을 다하는 날 하늘나라로 데려가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것은 그녀에게 사명이 있다는 증거였다. 아마도 그녀가 일을 포기한다면, 그녀는 일년도 살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다시 활기차게 다니는 모습은 많은 친구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그녀가 혹 슬픔에 잠겨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 또한 상심했다.

아이라 생키가 시력을 잃었을 때, 그는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숨기려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일을 더 악화시켰다.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들었고 더 이상 일하려고 하지 않았다. 패니는 종종 방문해 그의 영혼을 위로하며 즐겁게 만들어주려고 했다. 그는 여전히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함께 앉아 화음을 맞추며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했다. 그러나 패니가 떠나자마자, 그는 자신의 의자로 돌아가 죽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동역자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존 스웨니는 발작으로 고통 받다 1899년 4월에 사망했다. 로우리는 그해 11월에 사망했고, 무디도 한 달 뒤 사망했다. 그리고 시력을 잃어가던 생키는 아주 눈이 멀었다. 한 세기가 바뀌면서 그녀의 사랑하는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패니 크로스비는 살아있었다.

많은 그녀의 동역자들이 하늘나라로 갔지만 패니 크로스비는 아직도 남아 있는 힘이 있었다.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데려가지 않으셨다. 아직도 사명이 있었고, 할일이 이 세상에서 더 남아있었다. 새로운 작곡가들이 나타났는데, 경쾌한 리듬의 음악을 추구하는 찰스 가브리엘이나 그녀의 평생 친구의 아들인 아이라 알렌 생키 같은 사람들이었다. 아이라 알렌 생키는 생키의 아들로 비글로 & 메인 출판사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패니는 이 두 사람과 찬송가를 썼다. 그리고 다른 몇 명의 작곡가들과도 일했는데, 그들 중의 몇 명은 선교 시설에서 연주하던 오르간 연주자로서 그녀가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알렌 생키가 비글로 & 메인 출판사에 왔을 때, 패니는 다시 한 번 찬송가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패니 크로스비의 일부 노래에 매우 깊은 감동의 곡을 붙였다.

가진수 교수
가진수 교수

패니의 찬송가는 그녀가 인생을 어떻게 보는지를 반영했다. 알렌 생키와 함께 그녀는 마지막으로 잘 알려진 찬송가 ‘결코 굴복하지 마라’를 썼다. 패니는 몇 년 전 한 교회에서 알렌 생키가 곡을 붙인 ‘할머니의 흔들의자’를 독창곡으로 들었었다. 그 곡을 들은 패니는 그를 달콤한 가락과 곡의 표현, 조화에 있어 아버지를 능가하는 아들로 인정했다. 같은 날 밤 집회에서 그녀의 찬송 ‘결코 포기하지 말라’를 노래하였는데 ‘99세’를 유명하게 만든 사람의 아들답게 그의 능력이 훌륭하게 나타나있었다. 패니는 그날 밤 사람들이 그녀의 찬송가를 노래하였을 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그의 능력을 바라볼 수 있어서 기뻤다.
결코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마라
만약 당신이 믿음이 있다면,
은혜를, 당신의 의무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께 묻고 받으라.

(합창)
결코 포기하지 마라, 결코 포기하지 마라,
당신의 슬픔에 결코 굴복하지 마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들을 벗어나게 할 것이니.
주를 믿으라, 주를 믿으라,

당신의 시련이 가장 클 때 노래하라,
주를 믿고 마음을 다하라.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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