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조셉 드수자 대주교의 기고글인 ‘인도는 왜 선교사 살해범을 석방하려 하는가?’(Why is India poised to free a missionary's killer?)를 8월 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조셉 드수자 대주교는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인권 및 시민권 운동가이다. 그는 남아시아의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옹호하며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하는 단체인 ‘디그니티 프리덤 네트워크(Dignity Freedom Network)’의 설립자이다. 또한 인도 성공회 굿 셰퍼드 교회의 대주교로 섬기고 있으며, 전인도기독교협의회(All India Christian Council)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한 살인 사건이 전 세계적인 규탄을 불러왔다. 당시 인도의 K.R. 나라야난(K.R. Narayanan) 대통령조차 이를 인도의 오랜 관용 전통에서 크게 벗어난 사건이라고 규정하며, “전 세계의 검은 만행 목록에 오를 만한 범죄”라고 비판했다.
워싱턴 주재 인도대사관은 이 발언을 널리 알리며 인도 공화국 전체가 해당 사건에 충격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점을 미국 사회에 강조했다.
살해당한 그레이엄 스테인스(Graham Staines)의 아내 글래디스(Gladys)는 남편과 두 아들을 살해한 이들을 공개적으로 용서했다. 이후에도 인도에 남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사역을 이어갔고, 훗날 인도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지금, 당시 폭도들을 이끌었던 주범이 자유의 몸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오디샤(Odisha)주 형량검토위원회는 모범수로 생활했다는 이유로 ‘다라 싱(Dara Singh)’으로 알려진 라빈드라 쿠마르 팔(Rabindra Kumar Pal)의 조기 석방을 권고했다. 대법원은 주 정부에 8월 19일까지 석방 여부를 결정하라고 통보했다.
그는 반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순간적인 격분에 휩싸여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가 실제로 뉘우치고 있을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묻고 싶은 것은 그가 말하는 ‘분노’의 실체다.
순간적인 격분은 누군가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잠든 두 아이가 타고 있는 차량을 군중이 에워싸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불길 속에 가둬버린 행위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서는 한 개인의 충동적인 분노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차량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의 적이라는, 오랜 시간 조작되고 공유된 확신이다. 그 확신의 중심에는 명백한 거짓이 있었다. 인도의 기독교인들이 토착문화를 파괴하고, 사기와 폭력을 동원해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선동이었다.
증거로 무너졌지만 살아남은 거짓
그 주장은 공식 조사 결과 앞에서 무너졌다. D.P. 와드와(D.P. Wadhwa) 판사가 이끄는 사법위원회는 스테인스가 강제 개종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당시 정부는 이러한 거짓 프레임을 분명하게 해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종 문제에 관한 국가적 토론을 촉구하며 살인범들이 내세운 변명을 마치 합리적인 사회적 문제 제기인 것처럼 다뤘다.
그 변명은 범죄 자체보다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오늘날까지도 인도 사회 곳곳에서는 기독교 선교가 문화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주장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 기독교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남부와 북동부 지역을 살펴보면 그러한 주장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언어와 친족제도, 음악과 의복, 음식과 축제 등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는 여전히 살아 있다. 케랄라(Kerala)의 기독교인은 여전히 말라얄리(Malayali)다. 나가 지역의 기독교인은 나가(Naga)인으로 살아가며, 미조람의 기독교인 역시 미조(Mizo)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이들의 민족적·문화적 정체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의 민족문화가 아니라 신앙이자 삶의 방식이다. 지난 2,000년 동안 그리스어와 시리아어, 타밀어와 말라얄람어를 비롯한 수많은 언어와 문화 속에 뿌리내렸지만, 반드시 그 문화를 소멸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악마화의 지적 뿌리
기독교인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는 이러한 악마화에는 사상적 뿌리가 있다. 힌두 민족주의 운동의 두 번째 지도자이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 하나인 M.S. 골왈카르(M.S. Golwalkar)는 1939년 인도의 비힌두교도들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어떠한 특권도 누리지 않는 조건 아래서만 인도에 머물 수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오늘날 해당 단체는 그 저서가 더 이상 자신들의 견해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사상을 무엇으로 대체했는지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형성된 사람들은 사회가 지정한 적에게 분노를 옮기기 쉽다. 처음에는 무슬림이었고, 이후에는 기독교인이 표적이 됐다.
지난 12년 동안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올봄 인도국민당(BJP)이 정권을 잡은 서벵골(West Bengal)에서는 불과 몇 주 만에 기독교 단체들이 잇따른 협박과 공격 사례를 기록했다. 기도회는 습격당했고 성경은 압수됐다. 무르시다바드(Murshidabad)의 한 과부는 사원 건립을 위해 자신의 집을 포기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여성들은 착용한 팔찌를 이유로 신앙을 심문받았다.
지난 6월 27일에는 필자가 속한 교단 운동의 아닐 보우믹(Anil Bhowmick) 주교가 아람바그(Arambagh)의 기도회에서 밖으로 끌려 나와 폭행당했다. 그의 옷은 찢겼고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는 강제로 뜯겨 나갔다. 그러나 폭행당한 그가 경찰서로 끌려갔고, 오히려 가해자들로부터 강제 개종을 시도했다는 고발을 당했다.
그들은 사기나 강압을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발 그 자체가 무기였기 때문이다.
법이 집행되기 전부터 시작되는 폭력
현재 인도의 10여 개 주에는 이른바 개종금지법이 존재한다. 폭력은 이러한 법률이 실제로 집행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복되는 선동적 언어 속에서 이미 시작된다.
이 법률들은 한 개인이 내릴 수 있는 가장 내밀한 선택 가운데 하나인 종교적 양심의 문제에서 입증 책임을 사실상 당사자에게 돌린다. 그러나 아직 법원은 이러한 법률을 전면적으로 폐기하지 않았다.
‘제노사이드 워치(Genocide Watch)’는 2002년부터 인도에서 집단학살로 이어질 수 있는 초기 단계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해 왔다.
설립자 그레고리 스탠턴(Gregory Stanton)은 인도에서 집단학살이 이미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사태가 벌어진다면, 국가기관이 직접 주도하기보다는 폭도들이 실행 주체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거듭 경고했다.
필자가 진정 우려하는 곳은 북인도의 작고 가난한 교회들이다. 그곳에서는 경찰이 이미 팔짱을 낀 채 공격과 협박을 방관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 사법부는 개종금지법의 위헌 가능성과 기독교 수녀, 학교, 병원을 겨냥한 연이은 공격 보고에 대해 직권으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헌법적 쟁점은 결코 모호하지 않다. 이 시점에서의 지연은 중립이 아니다. 방치는 사실상 가해자에게 보내는 허용의 신호가 될 수 있다.
마노하르푸르에서 확인되는 양심의 자유
마노하르푸르(Manoharpur)에 관한 마지막 사실 하나를 덧붙이고자 한다. 스테인스가 살해당했을 당시 이 지역의 기독교인은 약 22가구였다. 오늘날에는 약 50가구로 늘어났다.
누구도 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다고 해서 돈이나 사회적 특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인도에서 기독교 신앙을 선택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스스로 신앙을 선택했다. 그것은 자유인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다. 바로 양심의 자유다.
인도 헌법 제25조는 모든 국민에게 양심의 자유와 종교를 자유롭게 고백하고 실천하며 전파할 권리를 보장한다. 이는 국가나 폭도들이 임의로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이다.
다라 싱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회개 가능성은 부정해서는 안 된다. 형벌과 석방의 문제 역시 법적 기준과 교정의 원칙에 따라 검토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살인자로 만들어낸 사회적 극단주의와 거짓 선동은 여전히 살아 있다.
다라 싱 한 사람의 반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독교인을 국가의 적으로 만들고, 근거 없는 개종 의혹을 폭력의 명분으로 사용하며, 피해자를 가해자로 뒤바꾸는 사회적 구조가 함께 회개하지 않는다면 같은 비극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살인범의 석방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살인을 가능하게 했던 거짓이 단 한 번도 제대로 심판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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