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가중 하나가 ‘나를 지나치지 마세요, 온유한 구세주여’(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다. 이 찬송가는 전도 집회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많은 영혼의 회심을 가져왔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많이 불린 찬송가 중 하나이기도하다.

나를 지나치지 마세요, 온유한 구세주여,
제 초라한 외침을 들어주세요.
당신이 다른 사람을 부르고 있는 동안
나를 지나치지 마세요.

<찬송가 337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1868년 패니 크로스비는 브래드베리와 함께 사역하는 동안 남편 밴과 함께 뉴욕의 서부 저지대에 있는 배릭 가로 이사 왔다. 그곳은 35명이 살고 있는 공동주택이었다. 패니와 밴은 3층 초라한 작은 방에 세 들었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고 통풍이 잘 되지 않는 곳이었다. 사실 그들은 더 좋은 곳에서 살 여유가 있었지만, 패니 크로스비는 자신의 사명이 가난한 이들과 살면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믿고 그녀의 남편을 설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친한 동역자가 된 돈 박사는 크로스비에게 곡의 제목을 부탁했고 그녀가 이 제목으로 결정했다.

   이후 이 찬송가는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찬송이 되었다. 무디와 항상 대중 전도 집회를 가졌던 생키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 찬송가는 워낙 유명해서 1874년 영국 런던 집회에서 이 찬송가보다 더 잘 불린 찬송은 없었습니다. 그 찬송가는 집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시켰으며, 모든 집회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했으며 은혜로웠습니다.”

   언젠가 패니 크로스비를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뉴어크로 그녀를 초청했다. 그녀는 펜실베니아 역에 도착해 그 도시의 성공한 그리스도인 사업가들과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곳에 참석했던 한 남자가 패니에게 다가와 말했다.

   “당신을 만나 매우 기쁩니다. 꼭 한번 만나고 싶었지만 당신이 무디와 생키와 함께 영국에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패니가 대서양을 한 번도 넘은 적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는 거의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놀라며 말했다.

   “그랬군요, 만일 내가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당신이 쓴 찬송가에 있는 당신의 영혼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요크셔, 리즈에 살고 있는 좋은 부모님을 둔 젊은 사업가입니다. 내가 무디와 생키의 집회에 참석해서 그들이 노래하는 ‘인애하신 구세주여’를 들었을 때 정말 마음 속 깊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 나는 마음을 다해 주님께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정말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가 계속 이야기했다.

   “나는 다음날 밤 집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날도 어제 예배와 같은 찬송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나의 삶을 복종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이 도시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크게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40년 전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며 말했다.

   “이것은 내가 40년 동안 은혜 받았던 당신의 찬송가입니다. 나는 항상 주머니에 그 찬송가를 복사해 넣고 지금까지 다녔습니다.”

   이 말을 끝낸 후 그는 패니의 손에 무엇인가를 주고 떠났다. 그것은 10달러짜리 지폐였다.

   이후 찬송가 ‘인애하신 구세주여’는 여러 나라에 번역되었고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찬송가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대표적인 크로스비의 찬송가중 하나가 ‘예수 품에서 안전한’(찬송가 417장 ‘주 예수 넓은 품에’)이다. 이 찬송가는 1868년 4월 말경, 패니 크로스비와 함께 동역했던 돈 박사가 사업상 철도로 여행 중일 때 크로스비를 방문하여 30분 만에 쓴 찬송가다.

예수의 품에서 안전한
그의 온유한 가슴에서 안전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늘을 드리우고,
내 영혼은 달콤한 쉼을.
들어라! 이 천사들의 목소리를,
내게 노래로 태어나네,
영광의 들판을 넘어서,
푸른 바다를 건너서.

<찬송가 417장>
주 예수 넓은 품에 나 편히 안겨서
그 크신 사랑 안에 나 편히 쉬겠네
영광의 들을 지나 저 푸른 바다 건너
천사의 노래 소리 내 귀에 들리네

   돈 박사는 당시 세계적으로 알려진 위대한 작곡가가 아니었으며 특별히 뛰어난 음악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기독교 사업가였다. 그의 삶 동안 그는 2,300편의 찬송가의 곡을 썼고, 그 찬송가의 반은 패니가 시를 썼다. 모든 말은 성령의 임재와 감동으로부터 온다고 믿었던 패니는 찬송가를 쓰기 전 항상 먼저 무릎 꿇고 하나님께 영감을 구했다.

   돈 박사가 어느 날 황급히 크로스비를 찾았다.

   “기차 안에서 막 작곡한 찬송가 곡에 붙일 가사를 부탁하려고 왔습니다. 그 곡을 위해 가사를 써줄 수 있겠어요?” 그리고 또 말했다. “지금부터 정확하게 신시내티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까지 단지 40분의 시간밖에 없습니다. 가기 전에 그 곡에 붙일 가사를 줄 수 있겠어요?”

   돈 박사의 말이 끝난 후 크로스비는 제목을 ‘주 예수 넓은 품에’로 생각했고 15분 만에 돈 박사가 허밍으로 불러준 그 곡에 가사를 붙이게 되었다.

   크로스비가 말했다. “축복의 성령님께서 저에게 감동으로 말씀해주셨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 가사를 암송했다. 시를 들은 돈 박사는 기뻐했으며 곧 찬송가 집으로 출간되었다.

   뉴욕에 있는 화이브 스트리트 장로교회의 유명한 목사였던 존 홀 박사는 어떤 다른 찬송가들보다도 ‘주 예수 넓은 품에’는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에게 특히 위로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찬송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유명하게 되었고 외국어로 번역된 미국의 최초의 찬송가 중 하나였다. 이 찬송가에 대한 많은 간증들이 있다. 많은 영혼들에게 위로를 주었으며 슬픔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패니 크로스비는 하나님께서 이끄는 대로 살았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주기 위해 찬송가를 썼다. 그녀는 선교 일을 감당하면서, 빈민가에서 방황하던 길 잃은 영혼들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생키가 언젠가 말했다, “당신은 인생의 고속도로에서 수만 번 기쁘게 걸을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나중에 그가 해외 방문에서 돌아 온 후에 그녀에게 “주 예수 넓은 품에” 찬송이 영국에서 수 천 권 교회로 보내졌다고 말했다.

   뉴욕 빈민가 선교 시설에서 불리는 그녀의 찬송가는 수 천 명의 거리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삶을 가져다주었다. 패니는 예배 중에 술 취해 비틀대던 가난하고 배고픈 젊은이를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찬송이 끝났을 때, 그가 패니에게 와서 말했다.

   “난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 넓은 품에’를 만났고 그 찬송가가 나를 구했습니다. 그 찬송가를 부를 때 내 마음은 감동했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패니는 그 젊은이를 껴안고 선교 모임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를 끝냈을 때쯤, 그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렀다. 이와 같은 광경은 매일 밤 일어났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희망을 찾은 길 잃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패니는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종종 그들이 주의 일을 감당하는 선교 일꾼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새롭게 선교 일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이 더 많은 신앙의 일군들을 이끌게 되었다. 한 구원받은 영혼이 수백 명의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고, 패니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인 선교일꾼이 되었다.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갈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갈(Frances Ridley Havergal)

1907년 9월에 한 부인이 패니 크로스비를 만나기 원했다. 이 부인은 영국의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갈(Frances Ridley Havergal, 1836-1879, 우리 찬송가에 10편이 실려 있음)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녀는 2년 전 하나님의 품으로 간 자신의 아들 윌의 간증을 말해주었다.

   “그는 정말 교회의 귀여운 성가 대원이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그 아들이 병에 걸렸고, 병원에 갔지만 희망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2주가 지나 병원에서 그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나의 아들은 당신의 찬송가를 사랑했으며 병원에서 계속 그 찬송가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함께 있던 환자들에게 ‘축복받은 확신’(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이라는 찬송가를 통해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는 항상 침대 곁에 무디와 생키의 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의 아들이 죽은 날 밤은 멋진 황혼으로 물든 저녁이 지난밤이었습니다. 그날도 윌은 하루 종일 건강하게 보냈습니다. 마루에서 윌의 지팡이 소리를 들었을 때까지도 나는 집에 홀로 있었습니다. 내가 침대 곁에 이르자 그 아이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엄마, 내 곁을 떠나지 마세요. 저에게 찬송가를 주세요. ‘주 예수 넓은 품에’를 부르고 싶어요.” 그 아이는 계속 찬양했고 ‘천사의 노래 소리’ 가사에 이르렀을 때 나의 사랑하는 아들은 책을 떨어뜨렸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은 “엄마 거기 천사가 있어요. 그곳에는 영광의 들판이 있어요. 그곳에는 빛이 나고 있어요. 엄마, 그곳에는 푸른 바다가 있어요.”를 말하면서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그녀를 위로해주었고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1910년 패니의 나이 90세가 되었을 때, 그녀의 친구들 거의 대부분이 죽었다. 심지어 그녀의 친구들의 아이들조차 늙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또한 죽었다. 사람들이 패니를 보았을 때, 그들은 그녀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몸은 거의 걷지 못할 정도로 구부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였을 때, 갑자기 젊은이처럼 보였고, 목소리는 전혀 쉬거나 떨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놀라운 이야기를 그녀로부터 듣기 좋아했다. 어느 날 저녁 집회에서 패니 크로스비는 ‘주 예수 넓은 품에’와 관련한 이야기를 간증해주었다. 많은 군중들이 모여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언젠가 친구 목사와 마차를 타고 달렸습니다. 내가 탄 마차의 마부는 우리들을 못 알아본 것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에 관해 토론을 했고, 앞으로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한참을 달렸을 때 친구 목사가 그 마부의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말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찬송가 작사가 패니 크로스비이십니다.’ 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 마부는 ‘패니 크로스비!’라고 소리쳤고 곧 마차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마차 문을 열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이미 눈물로 적셔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말하기를 ‘크로스비 부인, 저는 결코 당신을 만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찬송가가 나에게 의미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를 것입니다. 이 때문에 당신에 대해 늘 알기를 바랐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당신의 찬송가를 부르는 동안 예수님께 영접되었고 술을 끊었습니다.’ 나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소년이여, 당신이 이렇게 고백하는 모습에 사랑하는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곧 그 마부는 기차에 도착하자마자 경찰관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이 분이 패니 크로스비이십니다. 이분들을 기차까지 안전하게 인도해주세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 경찰관은 놀라 소리쳤습니다. ‘패니 크로스비? 당신이 바로 ‘주 예수 넓은 품에’를 쓴?’ 그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우리들에게 말했습니다. 옆에 있는 친구 목사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곧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겪은 일들을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중에 바로 그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우리는 내, 내 어린 사랑하는 딸의 장례식에서 그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는 아직도 그 슬픔을 잊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주며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위로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마음에 축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어린 딸이 주 예수님의 넓은 품에서 영원히 평안할 것이라고 말해주세요.’”

   그녀는 이 이야기를 수많은 군중들과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때때로 한번에 5,000명의 사람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모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에 많은 감동을 받으며 소중한 은혜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감이 임하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들은 눈물을 흘렸다.

 

가진수 교수
가진수 교수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가 ‘주 예수 넓은 품에’는 특별히 그녀가 많은 애착을 가졌던 찬송가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찬송가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찬송가는 많은 곳에서 풍성한 은혜 속에 불려졌다. 1890년 뉴욕타임즈 신문은 “어떤 다른 찬송가들보다 ‘주 예수 넓은 품에’ 찬송가만큼 세계를 많이 항해한 찬송가는 없을 것이다.”고 보도했다. 이 찬송가는 1881년 9월 25일 죽은 미국 가필드 대통령의 추도 예배 때 클리브랜드에 모인 수많은 군중들과 함께 불려졌다. 그리고 1885년 8월 10일 그랜트 대통령의 장례행렬이 지날 때 이 찬송가를 연주했다. 세계적으로도 이 찬송가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했으며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님께로 이끌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가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