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1] 좌와 우, 진보와 보수 간의 첨예한 대립이 우리처럼 심각한 나라가 또 있을까? 이념적 갈등이 지나치게 격렬하고 분열적인 한국 사회에서 정작 보수와 진보의 차이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매우 적은 것 같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가 상대를 서로 적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를 부정하고 거부하고 심지어 원수보다도 더 미워하고 저주까지 하는 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2] 무엇보다도 우리가 겪은 역사 때문일 것이다. 1945년 건국에서 1987년 6·10항쟁이 있기까지 우리는 소위 말하는 ‘보수’의 시대만을 살아왔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건국, 전쟁에 이르면서 한국 사회는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동족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공공연히 벌이지 않았는가. 미국의 도움으로 우파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자, 좌파는 설 곳이 없었다. 빨갱이로 낙인찍혀 버리고 만다. 그리곤 사회로부터 철저히 제거된다.

[3] 살기 위해서는 우파로 전향해야 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외자 도입을 통한 경제개발과 산업화가 성공하면서 민주화와 인권, 소득분배와 같은 가치는 철저히 무시된다. 반공은 기득권 세력의 권력 강화 명분이 되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에 일어난 민주항쟁 이후다. 6월 항쟁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와 민주화 운동이다.

[4] 이 운동으로 좌파가 어느 정도 우리 사회에서 자리 잡기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좌파정권이 권력을 장악해서 이젠 진보가 득세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를 위한 역사가 짧았기 때문일까, 우리 사회에 좌우의 대립은 여전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더욱 첨예화한 것 같다. 한마디로 비극이다. 보수는 반공주의에만 집착해 이념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고, 진보 또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보수보다도 더 부패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5]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목회자들과 신학교 교수들마저 극좌와 극우,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서 양분된 정치권을 부추기는데 한 몫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들은 과연 어떤 편에 서서 어떤 내용의 설교를 해야 할 것인지 고민이 아주 많다. 호남 출신의 보수 목사가 호남이 고향인 성도들이 절대다수인 교회에서 좌파 정권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가 상당수의 교인들이 교회를 옮기는 일을 경험하는 것을 보았다.

[6] 그런가 하면 보수색깔의 성도들이 압도적 다수인 나의 대구 모교회의 담임이 좌파 정권을 비호하는 설교를 했다가 장로들의 거센 반발을 산 경우도 있었다. 이쯤 되면 정치적 이슈가 많고 성도들의 최고의 관심사가 정치인 현 상황에서 설교자들은 어떻게 설교해야 할 것인지 망설이고 고민하게 된다. 이때 즐겨 인용해서 설교하는 구절이 하나 있으니 수 1:7-8절 말씀이다.

[7]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참고로 이 본문으로 설교한 한 목회자의 설교 내용을 소개해보자.

[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로 부름 받은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교훈을 주셨고 그 교훈을 따라 여호수아는 한 평생 중심에 서서 흔들리거나 치우치지 않고 나라를 다스렸다. 오늘날 국가 지도자가 갖춰야할 리더십 가운데 중요한 것은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좌로 치우치면 좌는 손뼉을 치겠지만 우는 싫어하고, 우로 치우치면 우는 쾌재를 부르겠지만 좌는 머리를 흔들게 되어 있다.

[9] 그래서 지도자는 한쪽으로 기울어서는 안 되고 양쪽을 조율하고 통제하고 중심으로 이끌어내는 조율사가 되어야 한다. 더구나 주의 종들은 이같이 양분되어 극으로 치다르며 타협도 없고 양보도 없이 자기주장에 빠져, 정작 주변은 망가져 가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누군가의 뜻에도 편승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해서 하나님의 뜻 중심으로 이 사회 구성원들을 이끌어서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 속에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10] 이 목사의 설교 내용을 한 마디로 하면, 수 1:7의 말씀처럼 좌익이든 우익이든, 진보든 보수든 한 쪽으로 치우쳐선 안 되고 중용을 지키라는 것이다. 과연 이 성경구절이 가르치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중용을 지키라는 뜻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백히 “아니오!”이다. 여기서 ‘중용을 지킨다’라는 말은 ‘어느 쪽으로든지 극단으로 치우침이 없이 중간을 유지하라’라는 의미이다.

[11] 때문에 문자적으로 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은 좌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중간을 유지하라는 말씀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문의 의미는 그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수 1:7-8의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실 때 그 기준으로 삼게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우선 찾아봐야 한다.

[12] 그것을 기준으로 좌로든 우로든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거기서 벗어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목표를 하나님과 그 분의 진리 말씀에게로 정했으면 한 눈 팔지도 말고 말씀을 떠나 곁길로 빠지지도 말고, 곧이곧대로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만 따라가라는 뜻이다. 성경 안에서 구체적인 실례를 살펴보면 레 18:3-4를 참조할 수 있다.

[1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서 400년 동안 몸에 배였을 ‘애굽 사람들의 풍속’과 ‘가나안 사람들의 풍속과 규례’가 ‘좌’와 ‘우’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좌익과 우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이다.

[14] 하나님의 말씀이란 정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좌’와 ‘우’가 된다. 창세기 3장에서 사단의 왜곡된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죄가 들어와 사망의 저주를 받게 된 아담과 하와의 행동은 보다 구체적인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가치는 다 한계가 있고 변한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들의 지혜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화되고 만다. 이런 세상에서 인생을 소중히 살려면 무엇을 표준으로 삼아야 할까?

[13]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사 40:8). 그러므로 영영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 인생의 지침이 될 수는 없다. 정녕 “주의 말씀이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 길의 빛이다”(시 119:105). 다른 것에서 해답을 찾으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선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 신앙생활의 표준(standard)인 성경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란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따르고 순종함으로 그분이 기뻐하시는 열매만 주렁주렁 맺히면 좋겠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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