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J. 무나이어 교수
살림 J. 무나이어 교수. ©reconciledworld.net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살림 J. 무나이어 교수의 기고글인 '일치의 남용: 세계 교회를 향한 진리와 정의, 화해의 요청'(The abuse of unity: a call to truth, justice, and reconciliation in the global Church)을 6월 17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살림 J. 무나이어 교수는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 그리고 중동 지역의 다른 분열된 공동체들 사이의 화해를 증진하는 데 헌신해 온 단체 ‘무살라하’의 설립자다. 그는 베들레헴성경대학에서 수년간 학장을 역임했으며, 신학과 화해, 정의를 주제로 한 여러 신학 서적을 저술했다. 현재 무나이어 교수는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산하 평화와화해네트워크(PRN)의 중동·북아프리카 지역 코디네이터로 섬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필자는 다양한 국가와 교단, 사역 단체에서 온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인 대규모 집회에 참석했다. 콘퍼런스 내내 한 가지 주제가 반복해서 등장했는데, 바로 ‘연합(일치)’이었다. 강사들은 연합을 주제로 설교했고, 지도자들은 연합을 촉구했으며, 참석자들은 스스로 교회의 연합에 기여하고 있는지 아니면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라는 도전을 받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역시 그 내용의 상당 부분에 깊이 공감했다. 양극화, 민족주의, 전쟁, 부족주의, 사회적 파편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제자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21)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연합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서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언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콘퍼런스가 진행될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 단상 위에서는 연합이 찬양받고 있었지만, 정작 그곳에 있어야 할 다른 목소리들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마땅히 던져져야 할 질문들은 묻히고, 마주해야 할 현실은 외면당했다. 전쟁, 점령, 난민, 불의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기독교 공동체의 고통은 거의 조명받지 못했다.

연합에 대한 호소는 넘쳐났지만, 애통함과 저항, 예언자적 증언이 설 자리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나는 한 가지 무거운 질문을 품은 채 집회장을 나섰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연합'이란 대체 어떤 연합인가?"

이 질문을 곱씹을수록, 기독교의 가장 아름다운 개념 중 하나가 도리어 가장 심하게 남용되어 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교회사 전반에 걸쳐 연합은 종종 비판을 잠재우고,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억압하며, 제도를 보호하고, 기존의 권력 구조를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것은 화해를 돕기는커녕 때로는 통제의 수단이 되었다. 진리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보다 불편한 대화 자체를 원천 봉쇄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은 더 이상 성령의 선물이 아니라, 현상 유지를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의 무기가 되어버린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불편한 진실을 경험해 왔다. 학대, 부패, 인종차별, 민족주의, 불의, 혹은 리더십의 실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 돌아오는 대답은 늘 비슷하다. "분열을 조장하지 마십시오." 이 말의 이면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연합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무언의 압박이 깔려 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거짓된 평화'에 맞섰다. 예레미야는 불의를 외면한 채 평화를 외치는 지도자들을 정죄했다. 아모스는 정의를 저버린 채 종교적인 제사만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맹렬히 비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보다 제도의 안정을 우선시했던 종교 권력자들과 거듭 충돌하셨다. 진리는 결코 연합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연합은 진리에 의존한다. 진리를 용납하지 못하는 연합은 결코 기독교적 연합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순응(conformity)'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거짓된 연합이 진공 상태에서 스스로 생겨나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대개 권력 문제와 깊이 얽혀 있다. 특정 그룹이 다른 그룹보다 더 큰 영향력이나 자원, 제도적 권위를 쥐고 있을 때, 연합에 대한 호소는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기존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

연합이 왜 이토록 남용되는지 이해하려면, 교회사 속에서 연합과 권력이 맺어온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기독교 역사 전반에 걸쳐 주류 권력과 소외된 공동체 사이의 관계는 종종 식민주의, 경제적 불평등, 제도적 지배의 그늘 아래 형성되어 왔다.

현대의 선교 운동이 복음 전도, 교육, 의료, 교회 개척을 통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구 기독교는 종종 자신들의 신학적·교회론적 모델이 전 세계 교회의 절대적인 표준이라고 착각하곤 했다.

오늘날 기독교 인구의 중심축은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로 이동했지만, 세계 기독교 기구들 내의 막강한 영향력은 여전히 '글로벌 노스(Global North, 북반구 선진국)'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불균형은 신학 교육, 출판, 선교 전략, 재정 지원 등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 결과, 지역의 현장 지도자들은 어떤 의제가 환영받고 어떤 의제가 그 중요한 '관계(지원망)'를 위협하는지 본능적으로 학습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연합에 대한 호소는 종종 '침묵'을 강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러한 역학 관계는 전 세계 교회 안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대변될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결정짓고 있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현실만큼 이를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점령, 추방, 폭력, 고통의 참혹한 현실을 더 넓은 기독교 세계에 알리기 위해 애써왔다. 그들은 신학적 성찰, 권리 옹호 활동, 화해 사역, 생생한 개인의 간증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삶의 처절한 현실과 연결하고자 분투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가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연합'이라는 언어가 종종 '침묵'에 대한 암묵적 요구와 함께 온다는 사실이었다. 정의, 점령, 인권, 정치적 현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그리스도인들은 곧잘 복음을 정치화하거나 분열을 조장한다는 비난에 직면한다. 화해를 외칠 때는 환영받지만, 정의를 요구할 때는 논란거리로 치부되기 일쑤다.

이러한 현상은 가자 지구(Gaza)의 비극 속에서 특히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공동체의 참상을 알리려 할 때, '연합'이라는 명분은 오히려 불편한 대화를 차단하는 도구로 쓰였다.

교회들은 논란을 두려워했다. 선교 단체들은 후원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도자들은 지지자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발언을 주저했다. 그 결과, 폭력으로 가장 직접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목소리를 낮추라는 압력이 가해진 반면, 분쟁의 참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이들이 여전히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여론을 형성해 나갔다.

이런 식의 연합은 병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증언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화해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타인의 고통을 인정하는 일에는 주저할 때, 교회의 신뢰성은 바닥으로 추락한다.

교회가 정의를 선포하면서도 막상 불의의 현장 앞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할 때, 교회의 도덕적 권위는 무너진다. 진리보다 제도의 유지와 관계가 더 우선시될 때, 복음의 빛은 흐려지고 만다.

참된 화해는 '값싼 연합'을 거부한다

거짓된 연합이 문제라면, 그 대안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더 큰 분열이나 끝없는 갈등이 아니다. 진정한 대안은 바로 '진리에 뿌리내린 화해'다.

필자가 수십 년간 화해 사역을 하며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참된 화해와 이른바 '값싼 연합(cheap unity)'을 구별하는 일이다. 값싼 연합은 진리 없는 겉치레 화합을 추구한다. 불편한 대화를 회피한다. 진정한 변화보다 껍데기뿐인 제도의 안정을 중시한다. 정의보다 알량한 평온함을 우선시한다.

하지만 참된 화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화해는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한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애통함, 고백, 책임 규명을 위한 공간을 열어준다. 불의에 당당히 맞서면서 동시에 관계의 회복을 모색한다.

이것은 필자가 속한 무살라하(Musalaha, 1990년 예루살렘에 설립된 신앙 기반의 화해 사역 단체)의 사역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교훈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 사이의 진정한 화해는 현실 부정이나 덮어두기식 침묵을 통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참석자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두려움을 표출하며, 서로의 상처를 인정하고, 솔직하게 서로에게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은 전 세계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불편한 진실을 억누름으로써 유지되는 연합은 결국 그 자체로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연합의 신학'뿐만 아니라 '회개의 신학'일지 모른다. 연합이라는 명목하에 예언자적 목소리를 잠재웠던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제도적 교회를 지키는 일에 연합을 악용했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

연합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통제 기제로 전락했음을 회개해야 한다. 고통받는 이들의 울부짖음보다 힘 있는 자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였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 연합을 핑계로 불의에 맞서지 않고 타협했던 우리의 비겁함을 회개해야 한다.

이러한 회개는 결코 연합을 위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참된 연합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생명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연합의 미래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야 한다. 연합은 이미지 관리가 아닌 진리에 굳건히 뿌리내려야 한다. 정의와 동떨어진 연합이 아니라, 정의와 긴밀하게 결속된 연합이어야 한다.

연합은 마땅히 애통함과 건전한 비판, 그리고 예언자적 증언이 숨 쉴 공간을 내어주어야 한다. 온정주의나 우월 의식이 아닌 동등한 상호 존중에 기반해야 한다.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의 목소리를 그저 마지못해 용인하는 수준을 넘어, 그들에게 온전한 권위와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연합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점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세상의 부서짐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셨다. 고난을 피하지 않으시고 그 한가운데로 직접 뛰어드셨다. 그분은 거짓된 평화를 유지하려 애쓰지 않으셨고, 오직 희생과 진리, 그리고 사랑을 통해 참된 화해를 창조하셨다.

그때 참석했던 집회를 다시금 떠올려 보며, 필자는 교회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연합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확신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그 연합은 결코 누군가의 '침묵'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리' 위에 세워진 연합이었다. 그것은 지배나 통제로 이뤄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성취된 것이었다.

이러한 참된 연합은 겸손과 회개, 그리고 불편한 진실을 기꺼이 듣고자 하는 용기를 요구하기에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하지만 세상을 향한 진정한 증언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처럼 값비싼 연합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은 연합이 중요하냐 아니냐가 아니다. 연합은 분명히 중요하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이해하고 추구하는 연합은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투영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기득권자들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는가?"

연합이 진리와 정의, 겸손과 참된 화해와 하나로 엮일 때에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위해 의도하셨던 강력한 증언이 될 수 있다. 오직 그때서야 세상은 교회를 바라볼 때, 자신들의 덩치를 지키기에 급급한 거대한 이익 집단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는 참된 공동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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