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1] 지난 겨울 방학 때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의 대학교 근처 아파트에서 3주 가량 머문 적이 있다. 추운 겨울이라 주로 집 안에서만 활동했었는데, 글을 쓰고 강의안을 만들다가 무료해서 아들 방엘 갔더니 책상 위에 2/3쯤 맞춰진 커다란 퍼즐이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호기심으로 하나씩 맞추어 보고자 애를 써봤는데, 단 한 개의 퍼즐조각도 제 자리에 놓질 못했다.

[2] 그림이 아주 크고 퍼즐조각이 많다 보니 너무 맞추기 힘들어 포기하고 말았다. 며칠 뒤 새로 도전해보려고 방엘 갔더니 완성된 퍼즐이 근사한 모습으로 나를 반기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공부하다가 쉬는 시간에 하나씩 맞추어서 완성한 작품이다. 수없이 많은 퍼즐조각들과 완성된 작품을 지켜보다가 그 속에 감추어진 삶의 원리와 비밀들을 깨우치게 됐다.

[3] 각각의 조각들을 보노라면 비슷해 보이긴 해도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다. 어떤 것은 모가 나고 어떤 것은 둥글고, 어떤 것은 오목하고 어떤 것은 볼록하게 생겼다. 각각의 조각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조각 하나만으론 별 볼일 없어 보이나, 전체 그림을 완성함에 있어선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 귀한 존재들이 서로 꼭 맞는 짝과의 결합을 통해 작품이 완성될 수 있다.

[4] 관찰하면 할수록 퍼즐조각은 우리 사람과 흡사해 보이고, 퍼즐조각 맞추기 게임은 우리 인생과 같아 보인다. 미완성일 땐 볼품이 없었는데 모두 제 자리를 찾아 전체의 그림을 완성하고 보니 정말 멋진 걸작품이 되어 있더라. 25년 전쯤 유학시절에 나는 가끔씩 퍼즐게임을 했다. 공부를 하다가 무료해지려하면 퍼즐을 하나씩 맞추어 나갔다.

[5] 그땐 지금의 것보다는 작은 것이어서 맞추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주에 걸쳐서 애를 써야 비로소 완성됐다. 그런데 가끔씩 천신만고 끝에 완성 일보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망연자실을 경험할 때가 있다. 작품이 완성되어야 하는 찰나에 화룡정점을 찍어야 하는 조각 하나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허겁지겁 테이블과 의자 밑을 들추기도 하고 소파의 쿠션을 들어내어 구석구석을 샅샅이 다 뒤져보기도 한다.

[6] 몇 주간에 걸쳐 어렵사리 맞추려 한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는 느낌 다들 경험이 있을 게다. 단 한 조각만 놓으면 모든 게 완성되는 판국에 그 하나가 없어서 작품을 망친 쓰라린 경험 말이다. 평소엔 굴러다니는 하찮은 퍼즐조각일지 모르나 이때 이 조각 하나는 엄청나게 중요한 가치가 있다.

[7] 그 하나가 있고 없고에 따라 작품이 완성되느냐 아니면 미완성 작품으로 허무하게 끝나느냐가 달려 있다. 이 모습과 흡사한 성경의 이야기가 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이다. 양 100마리 중 한 마리가 사라졌다. 99:1이란 압도적인 비율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존재는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목자는 99마리 양을 들판에 방치한 채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

[8] 세상 산술법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 가치관으로서는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이 목자는 그런 산술법을 알지 못한다. 그저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떠난다. 이유가 뭘까? 그 한 마리가 있어야 100마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은 수많은 퍼즐조각들에 비하면 너무도 미미한 존재다. 여러 조각들이 존재하건만 그 하나쯤 없다고 무슨 대수일까 보냐. 하지만 그 한 조각이 없으면 작품은 완성되질 않는다.

[9] 한 마디로, 어떤 조각도 없어선 안 될 가치 있는 존재란 말이다. 한 마리의 개미는 보잘 것 없어 보지만 개미군단의 위력은 영상에서 많이 보고 놀랐다.

또 다른 성경 가운데 구체화 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있다. 누구일까? 마가이다. 예루살렘 총회를 통해 ‘할례 문제’로 일어났던 혼란들이 일단 정리되자 이듬해인 AD 50년에 바울은 곧 제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한다. 그런데 이 때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10]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 15:37∼41)

[11] 안디옥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꾼인 두 선교사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다. 제1차 전도여행 시 중도에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마가를 바울은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이후 제2차 전도여행 때에 마가의 동행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결국은 바울이 바나바와 결별하기에 이르고 만다. 그 후 10여 년간의 기록은 없으나 아마도 바울이 그러했듯이, 마가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변화된 모습으로 선한 열매들을 많이 맺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12]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이 말년에 로마에 있으면서 마가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딤후 4:11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에 대한 바울의 생각이 크게 바뀌었음을 보게 된다. 과거와는 달리 나중에 바울이 마가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바울의 측근 중 데마는 끝에 가서 배신하였으나, 마가는 비록 1차 여행 때는 배신행위를 했지만 바울의 말년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거듭난 것이다.

[13] 외삼촌 바나바의 배려 속에 마가는 바울의 생각마저 뒤바꿔놓을 정도로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쓸모없다고 여겼던 마가라는 퍼즐조각 하나도 함께 곁들여졌을 때 놀라운 작품 완성에 한 몫을 차지함을 바울이 깨달은 것이다. 이때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이후 바울은 바나바와 같은 입장에 선다. 빌레몬서에 보면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바울과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이다.

[14] 빌레몬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로부터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일꾼이 된 사람이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주인을 배신하고 도망쳤다가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 새 사람이 되었다. 알고 보니 그가 바로 빌레몬의 종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그를 용서하고 한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는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처음엔 자기 사명을 버리고 도망친 마가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며 거부했던 바울이 아닌가!

[15] 그런데 나중엔 주인을 배신하고 도망친 종을 용서하라고 주인인 빌레몬에게 권면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의 모습인가?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쓸모없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전 7:17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16]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남들이 보는 나, 가족이 보는 나, 내가 보는 나,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는 너무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 하지만 땅바닥에 굴러다니고 소파 속 한 구석에 버려져 있는 퍼즐 한 조각도 근사한 작품을 완성함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란 사실을 놓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개성과 은사대로 최선을 다하여 함께 하나님 나라라는 작품을 완성함에 작은 부분이라도 감당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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