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복규 목사
최복규 목사 ©자료사진

[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 이하 한복협)가 10일 오전 신촌성결교회에서 "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님들을 기리며"란 주제로 2월 월례회를 개최한 가운데, "한국교회의 예레미야 김치선 목사님을 기리며"란 주제로 최복규 목사(한국중앙교회 원로)가 발표했다. 다음은 그의 글 전문이다.

1. 출생과 성장 과정

1899년도에 함경남도 흥남에서 출생하였으며 마을 글방 선생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10세 때 기독교인이 되고 16세부터 10여리 되는 거리에 있는 교회에 새벽기도 교인이 되었다.

본래는 고깃배를 40여척이나 운용하는 부요한 가정에서 성장하고 있었으나 해상에 큰 재난으로 전 재산을 졸지에 잃고 무일푼 빈민으로 추락하여 극심한 가난에 고생했다. 그때 선교사의 도움으로 하우스보이로 일하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어느 날 선교사가 경영하는 영생중학교에 큰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화재 원인은 원한을 품은 불량한 사람들이 선교사를 죽이기 위해 교장실에 가두고 불을 지른 것이다.

이것을 먼저 발견한 치선군이 달려가 교장실문을 부수고 들어가 실신하여 쓰러진 선교사를 구출하였다. 그 선교사가 바로 영재영 (Luther Lisgur Young) 이다. 영재영선교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불속에 뛰어들어 자신을 살려준 치선군을 친아들처럼 사랑하고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에게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치선은 정규학교 학업을 지속할 수 있어서 연희전문학교(연세대)까지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하여 슬하에 1남 3녀의 자녀를 두게 되었다.

2. 해외 유학과 목회자의 길

영재영선교사가 일본으로 사역지를 옮겨갈 때에 함께 출국하여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30년에 졸업,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미국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거처 달라스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35년도에 한국 최초로 구약학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고베 중앙교회를 개척 설립하여 담임목사로 목회사역을 하게 된다.

불초소생도 1970년초에 부흥사경회인도 초청으로 스승이 설립 시무하던 교회에서 함께 은혜를 나눈 적이 있다.

김치선 목사님은 큰 꿈을 품고 동경으로 이전하여 YMCA 강당에서 1939. 11. 5. 동경 신숙 중앙교회를 개척 설립하여 재일 한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목회를 시작했다.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팽배하던 때에 전통적인 보수 개혁 신학에 성령운동까지 불붙이게 되어 짧은 시간에 교회는 큰 부흥을 가져왔다고 한다.

일본은 대동아전쟁(2차세계대전)을 앞두고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 있는 한인교회에 큰 핍박을 하기 시작하였다. 김치선목사님은 투옥되었으며 정상적인 예배가 어렵게 되었다. 1940년부터 박해는 점증되었다.

그 와중에도 목사님 가정에 큰 경사가 났으니 곧 아들 김세창의 출생이다. (41. 1. 3일생)

김치선목사님은 1944. 3월에 귀국하면서부터 남대문교회(1885.628 알렌선교사댁에서 개척 설립)에서 시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난은 지속되었다. 옛날 3.1.만세운동 때에 주동했다는 죄목으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어 1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친일파교인의 신고때문에 한국어로 설교한 죄목으로 또 다시 옥살이를 하였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손양원목사나 김구선생과도 절친했다고 한다.

3. 목사님의 견고한 신앙과 신학사상

김치선 목사
김치선 목사 ©대신세계선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미국에 프린스턴 신학교가 좌경화 되면서 정통보수신학자들이 필라델피아로 와서 세운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수학한 사람이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국은 해방된 흥분과 무질서, 그리고 남북 분단, 6.25전쟁 등으로 모두가 절망적인 암흑세계였다. 교계도 친일과 반일, 친공과 반공, 국내파와 해외파등 등 혼돈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모두가 다 우왕좌왕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개혁주의 보수 정통신학 입장에 곧고도 굳게 초지일관 지조를 고수했다. 그야말로 반석위에 세운 집이었다.

여러분의 목회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신학자들이 학교를 떠나 세상 밥벌이로 들락거릴 때도 목사님은 한 번도 교회 목회와 신학교를 떠나신 적이 없었다.

그분의 삶이 그분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첫째 : 그 분의 기도생활이다.

식사나 타인과 대화중이나 강의나 설교 중에도 관계없이 낮 정오 12시가 되면 반드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거나 손들고 기도하신다. 얼마나 간절한지 늘 눈물을 흘리시며 큰 소리로 하셨다. 내용은 한국과 세계교회 위하여,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위하여, 신학생들을 위하여,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국민의 십일조를 드리게 하소서. (당시 3,000만 국민의 10/1인 300만 구령) 그리고 전국에 28,000동네에 우물 파게 하소서. (동네마다 교회 세우게 하소서)

둘째 : 그분의 강의와 설교 내용이다.

목사의 덕목은 정직과 진실이다. 목장도 없고 양도 없으면서 목사의 명함을 내미는 것은 사기 치는 것이다. 아무리 중요하고 선한 일도 교회를 떠나서 하는 것은 안 된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그리고 남이 판 우물을 기웃거리지 말고 내가 판 우물에 생수를 마시고 퍼주어라. 전국 28,000 동네마다 교회 세우기 위해 기도하라.

“세상 모든 것 다 준다 해도 나는 30명 양을 바꿀 수 없다. 나는 평생 선한 목자 되기 원한다.”

그분의 확고한 삶의 중심은 예수. 성경. 교회중심이다.

그러나 그분의 눈물의 기도와 열심, 겸손, 사랑 등등 사모하고 따르는 분들이 많았으나 반면에 몇 가지 약점을 들어 반대편에서 혹평하는 이들도 있었음은 아쉬운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리라. 아멘

/글=한복협 제공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치선목사 #최복규목사 #한복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