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루터회가 지난 8일 일본 루터 교단과 더불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제주명성아카데미하우스에서 한일평화예배를 진행했다.
©기독교한국루터회 제공

[기독일보 박용국 기자] 기독교한국루터회가 지난 8일 일본 루터 교단과 더불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제주명성아카데미하우스에서 한일평화예배를 진행했다.

주최 측은 "이에 앞서 오전 10시에 유시경 대한 성공회 신부의 특강, 오후 2시에 “평화”를 주제로 하는 발제 및 토론의 시간을 갖고, 이어서 오후 4시에 그리스도가 주시는 참 평화가 한국과 일본에 임하기를 간구하는 예배를 드렸다"고 밝히고, "이번 행사는 한일 양국 루터교회가 선교협력으로 함께 하고, 나아가 양국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연대하는 화합의 자리"라 전했다.

특히 예배 중에는 한일 루터교회가 공동으로 평화선언문을 낭독했으며, 일본의 우경화와 일본군 위안부, 그리고 영토 문제 등이 언급되기도 했다. 특히 일본교회는 "일본 교회는 일본 국가가 저지른 전쟁의 과오를 진지하게 회개한다. 일본 국가와 일본 교회가 한국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전쟁 과오에 가담해 온 것을 회개하며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행할 것이다. 다음 세대에도 진실을 알리며 아시아의 이웃과 진실한 화해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 사죄하기도 했다.

다음은 남상준 목사가 한일루터교회 연합 평화예배 이후 오후에 발제한 발제문 "성서로 본 평화 - 신약성서의 평화 이해" 전문이다.

"성서로 본 평화 - 신약성서의 평화 이해"(한일루터교회 연합 평화예배 오후 남상준 목사 발제)

안녕하세요, 남상준 목사입니다. 저는 LCK(기독교한국루터회)에서 영문서기 일을 맡고 있으며, 현재 루터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주도에서 일본루터교단과 한국루터교단이 함께 모여서 평화에 관한 모임도 갖고, 한일, 일한 연합평화예배를 드리게 되어서 대단히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존경하는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신약에서 말하는 평화가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제주도에서 NRK(일본루터교회)와 LCK가 처음 모여 평화 예배를 드리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여러분, 제주도에 이렇게 오셨는데, 제주도 어떤가요? 제주도는 경치도 아름답고, 날씨와 온도도 여행하기에 매우 좋습니다. 하지만, 이 제주도가 겉보기에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애환과 슬픔이 깃든 땅입니다. 옛날에는 이곳이 유배의 땅이었습니다. 많은 학자와 정치인들이 정권에 의해 쫓겨나서, 이곳 제주도로 유배를 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추사 김정희를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 제주도는 1940년대 일제 식민지 시절에 일본의 오키나와 섬처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일본군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면서,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곳입니다. 그리고 제주 4.3 사건 때에는 제주 지역민의 7분의 1, 거의 5만 명가량의 죄 없는 시민들이 학살당한 땅입니다. 제주 4.3 공원의 이름을 평화공원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평화공원의 기념비는 아직도 아무런 내용이 기록되지 않고 빈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지금 평화가 필요한 곳에, 평화가 필요한 시절에, 이곳에 모여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평화는 그리스어로 “에이레네”라는 단어를 씁니다. 신약 전체에서 100번 정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에이레네는 평화, 평안, 평강, 화평, 화목, 화해, 안전함, 온전함 등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샬롬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이레네는 단순히 만족의 상태나 심리적 안정의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평안뿐만 아니라, 신체상의 건강, 안녕, 삶의 행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또한 전쟁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구약의 샬롬도 단순한 마음의 평안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에이레네로 번역되는 샬롬을 구약에서 살펴보면, 스가랴 9장 10절에, 장차 오실 메시야 왕은 겸손하여 나귀를 타며 전쟁을 종식시키고, 이방인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분입니다. 구약에서는 평화가 전쟁과 정의와 연관되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32장 17절에는, “정의의 결과는 평화요, 공의의 열매는 영원한 안전”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9장 5절에는 메시야의 이름을 “평화”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신약성서에서도 평화를 전쟁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역을 지나가실 때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가에서 살던 미치광이를 고쳐주신 이야기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나옵니다. 이 귀신의 이름은 군대였습니다. 귀신의 수가 많아서라고 설명합니다. 이 귀신이 돼지 떼 2천 마리에게 들어가, 돼지가 바다로 돌진하여 죽은 후 귀신들린 사람이 온전하여졌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로마제국의 제10군단이 이 지역에 쳐들어와 온 마을을 불태우고 학살한 일이 있었습니다. 10군단의 군대의 상징, 즉 깃발에 달고 다니는 표식이 바로 돼지였습니다. 본래 로마의 군단은 6천명 규모이지만, 이 지역에 쳐들어왔던 로마 10군단은 1천5백명에서 2천명 규모의 군대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시는 길목의 여러 마을들이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신약성서를 읽을 때, 한 가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복음서의 이야기가 비록 예수님 당시의 30년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인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의 상황이 본문에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는 로마제국에 의해 억압을 당하고 식민지 지배 하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의 상황이 반영되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그에게 평안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때의 평안은 신체적, 사회적 온전함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신약성서에서 평화는 심리적인 평안뿐 아니라, 사회적 안녕의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하나님의 평화가 이 땅에 도래한 것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곧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이며, 이것은 평화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4장은 예수님께서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취임연설을 하는 부분입니다. 일종의 사명 선언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구약성서 이사야의 본문을 통해 선포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4장 17절 18절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으로 선포됩니다. 누가의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의 오심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불의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곧 전인적 구원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참된 평화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라고 노래합니다.

누가복음 19장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제자들이 노래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며, 곧 그 평화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으로 보면 대단히 충격적이고 위험하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1세기 지중해 지역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평화”라는 말 자체가 황제에게 속한 말이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용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평화를 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은 당시의 로마제국을 완전히 무시하고 거부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로마황제가 왕이 아니라,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시라는 선포였던 것입니다. 로마황제가 주는 평화는 거짓된 평화라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 땅에 새로운 질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선포의 의미가 이 “평화”라는 단어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의와 평화와 화해가 성취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이 평화의 개념을 화해의 개념으로 전환시켜서, 우리 인간들 상호간의 윤리적인 문제로 확장시켰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9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자”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화평하게 지내야함을 역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화가 우리를 하나님과의 평화뿐 아니라, 사람들과도 평화를 이루게 하십니다. 바울은 서신을 보낼 때마다, 항상 자신의 인사말에 평화를 언급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평화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부터 18절까지에는 평화에 관한 중요한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는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둘로 갈라져 원수된 것을 평화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피가 둘을 하나로 만드셨고,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허물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온 평화는 먼저,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합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화평케 합니다. 이 평화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을 허물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서는 “평화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에베소서가 말하는 평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케 되고, 사람과 화평케 되었으므로,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노력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 노력의 방법은 십자가를 지는 방법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리스도인이 평화의 길을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이 평화를 전파하고 지키는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케 하는 자”로 언급됩니다. 곧 다른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는 평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평화는 둘을 하나로 만들어주고, 서로를 향해 쌓아놓은 담을, 장벽을 허물어줍니다.

지금 우리는 평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과 북이 갈라져 아직도 대치하며 심각한 긴장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로 이 막힌 담이 허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내부에는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이념과 갈등으로 사회가 갈라져 있습니다. 우리가 허물어야 할 담들이 여전히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사회에 높은 장벽의 담을 세우며, 서로를 갈라놓고 갈등을 깊게 만들기도 합니다.

제주 4.3사건의 마지막까지 투쟁하며 전투를 이끌었던 지도자 이덕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투 중에 죽은 이덕구는 십자가 틀에 매달려 광장 앞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 왼쪽 주머니에 숟가락을 하나 꽂아줍니다. 제주 4.3 사건에서 가해자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북쪽 지방에서 내려온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서북청년단입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형제를 죽이는 그 비극의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어제 우리 교단의 총회 앞에 플래카드가 하나 걸려 있는 걸 봤습니다. 기독당에서 내걸은 플래카드인데, 그 내용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죽은 백남기씨를 왜 부검하지 않느냐, 부검하라고 항의하는 내용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서북청년단과 같은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일제식민지 시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청산되지 못한 과제들이 여전히 이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상처가 너무 커서 아직도 고통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기득권을 가지고 같은 민족을 괴롭힌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여전히 이 사회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며, 이 사회에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하고 있습니다. 제주 4.3뿐 아니라 광주 5.18을 통해, 여전히 우리는 이념적 갈등을 겪고 있으며,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하나 언급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해자가 되어서 다른 민족에게 커다란 아픔을 준 사건입니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입니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통해 그곳의 수많은 양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습니다. 퐁니, 퐁넛 사건이 대표적 입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견고한 담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평화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진 참된 평화가, 한일 관계를 비롯하여 우리 내부의 문제들, 외부의 문제들까지도 해결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담들이 무너지고 둘이 하나가 되는 그 평화의 여정에 우리에게 남겨진 일들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글=기독교한국루터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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