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비아크(왼쪽) 목사와 폴리 현숙 목사.
존 비아크(왼쪽) 목사와 폴리 현숙 목사. ©순교자의소리 제공

오늘은 제 삶과 간증을 나누려 합니다.

1899년, 한 미국 선교사 부부가 미얀마에 왔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제 증조부가 살고 계시던 마을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부족 사람들은 아직 야만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옷조차 입지 않고 사는 상태였지요. 선교사들에게 우리와 함께하는 삶이란 마치 동물들과 사는 삶과 같았을 것입니다. 선교사님의 부인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호소한 적도 있었지만, 선교사님은 부인을 이렇게 설득했다고 합니다. "여보, 어느 날 아침이면 우리도 여기서 아름다운 날을 맞이하게 될 거에요. 그 날을 기다립시다." 하나님은 그들의 사역을 축복하셨고, 드디어 우리 부족에도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999년, 선교사가 우리 땅에 처음 오신 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집회를 가졌습니다. 우리 부족의 85%가 기독교인이 되었고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함께 예배하는 땅이 된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대다수 기독교 부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기독교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저를 비롯한 삼남매를 홀로 키우셔야 했습니다.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워졌고, 어머니는 도심에 위치한 작은 집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셨습니다. 온통 부잣집인 도시의 집집 가운데 우리 집만 아주 가난했지요. 제 친구들 또한 모두 부자였고 많은 장난감이 가진 아이들이었지만 저는 늘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늘 가난이 싫다고 어머니께 불평을 했고, 제 꿈은 어려서부터 언제나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6학년이 될 즈음, 어머니는 인도와 중국 간 무역사업을 하시면서 집안 형편이 괜찮아졌습니다. 저는 점점 좋은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제 꿈도 곧 이뤄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12살이 되던 해, 교회 수련회에서 저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떤 부르심을 느꼈지만, 목사님이나 사역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고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는 저를 인도에 있는 성경대학에 보내셨습니다. 그곳에 가면 영어를 잘 배울 수 있었고, 사업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학교를 쉴 때면 어머니 사업을 도와드렸는데, 상아를 사서 다른 곳에 파는 일이었지만 사실 그 일은 불법이었습니다. 인도에서 상아를 사다가 미얀마를 거쳐 중국에 파는 일이었는데, 굉장히 큰 이득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계속 한다면, 제가 꿈꾸던 부자가 되는 일이 곧 이뤄질 것이었습니다. 1997년 무렵, 다니던 성경대학 기도실에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늘 제게 사역자가 되라는 감동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기도를 멈추고 기도실을 뛰쳐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해 10월 어느 날, 바로 그 기도실에서 하나님은 제 마음에 다시 찾아와 주셨고, 그날 저는 더 이상 그분을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마침내 주님께 약속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네,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날 이후 세상을 보는 저의 관점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양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나눠 갖게 된 것입니다. 죽으면 지옥에 가게 될 사람들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대학 이후 저는 미얀마에 돌아갔습니다. 미조람에 있는 한 선교사를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분을 만나 기도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전 그분에게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는 책 한 권을 건네 받았습니다.

돌아와서 그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저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흐르는데도 읽기를 멈출 수 없었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다시 읽고... 몇 번을 그렇게 반복하면서 겨우 책을 다 읽었고, 다 읽은 뒤 저는 비로소 선교사가 되기를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읽게 되길 원합니다. 모두가 이 책을 읽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길 원합니다.

2000년 말경, 신학 석사를 이수한 후 저는 인도에 있는 오리싸주의 선교사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3개월의 기도 후 제가 그 곳에 가기로 결정했을 때, 제 어머니는 제가 미국에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저를 미국에 보내서 비즈니스 공부를 시키시려고 준비를 다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교사로 오리싸에 가겠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많이 우셨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성경대학에 보낸 것이 그 목적은 아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답했습니다. "어머니,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께서 가라고 한 곳 있어야 합니다." 2001년 1월, 저는 오리싸주에 선교사로 가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큰 은혜로 많은 컨퍼런스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디렉터는 제게 많은 사역의 기회를 주셨고, 필요한 오토바이나 집까지 공급해주었습니다. 제 삶은 아주 충분하고 좋았습니다. 그러던 중, 필리핀에 있던 친구로부터 메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 너의 인도사역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그렇지만, 인도에는 외국인들이 왕래하면서 선교를 할 수가 있지만, 우리 조국 미얀마는 누구도 그렇게 해줄 수가 없잖아. 우리 같은 미얀마인들이 복음을 모르는 4000만명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절대 복음을 만날 수 없을거야."

저는 그 밤 내내 주님의 뜻을 물으며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3개월을 기도한 후, 저는 하나님께서 제가 미얀마로 돌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했고,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더욱 놀라셨습니다. 아들이 부자가 되는 큰 꿈에서부터 점점 추락해서, 결국엔 미얀마의 가장 가난한 사람인 선교사가 되기로 했으니까요.

어느 컨퍼런스에 설교자로 초청을 받았을 때, 양복을 입고 오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겐 양복도 없었고, 모든 재정을 감옥 사역에 쏟아 부은 후라 양복을 살 돈도 없었습니다. 저는 삼촌에게 가서 양복 살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그때, 삼촌의 대답을 전 잊지 못합니다. "존, 난 정부에서 제공한 일자리에서 일하면서 이렇게 집도 갖고 있고 옷도 많은데, 대체 너는 너의 주님을 위해 일한다면서 양복 한 벌을 못 받았단 말이니? 너 정말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거냐?" 그리곤 아무 양복이나 한 벌 꺼내가라고 하셨습니다. 전 그 순간 결심했습니다. 양복 한 벌조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입으려 하지 않겠다고 말이지요.

2005년 제가 살던 도시에는 교회가 많았고, 저는 여기 저기 다니며 설교도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2,500명이 모인 집회에서 말씀을 나누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제 마음을 아주 깊이 만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복음을 셀 수 없이 들어 본 사람들일 것이지만, 지금 이순간에도 이 땅에는 단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4000만명이 있다. 그들은 복음을 모르고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사무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제 저의 설교가 그들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제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저의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미얀마 회복 선교회를 설립했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네 명의 선교사로 시작된 우리 선교회는 현재 21명의 선교사사를 미전도 종족이 거주하는 마을에 파송했고 모두 열심히 사역 중입니다. 우리 파송된 선교사님들은 지금 미얀마-중국 국경지대 등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가 말씀을 전하는 곳에서는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심하게 매질을 당하고 집에서 쫓겨나는 등의 핍박을 받게 됩니다. 우리에겐 예배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론 오두막이나 나무 아래가 저희의 예배당이 됩니다. 이 집 저 집, 옮겨가며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역으로 인해 저는 종종 정부에 소환되곤 했습니다. 갈 때마다 그들은 "불교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 "예배도, 설교도 금지다!" 라고 협박을 하고, 저는 알았다고 하고선 늘 하던 전도와 예배를 계속합니다. 그들은 늘 똑같이 말하고, 저 또한 똑같이 대답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사역들을 통해 저나 가족들, 우리 사역자들은 많은 위험에 직면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우리가 예배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마음조차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또한 심지어 이 세상의 왕이나 대통령들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한 그들은 저희들의 생명에 관해 어떤 짓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죽거나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일이기에, 우리는 기쁘게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전도 종족이었던 인레이에는 현재 137명의 성도가 생겼고, 중국 국경엔 300명 이상, 다른 여러 마을에도 몇십 명, 몇백 명의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한 마을 지도자가 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한 중국 군에 잡혔고, 그 군대는 잡힌 사람들 중 누구도 살아나온 적이 없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습니다. 우리 모든 사역자들과 그의 가족들은 모두 큰 슬픔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0달 후, 그의 아내는 누군가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문을 열자, 그녀의 남편이 돌아와 서 있었습니다! 그는 3달 이상 무거운 족쇄를 차고 움직이지도 못했고, 심한 매질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돌아온 그에게 여전히 사역을 계속할지 물었습니다. 그는 "네, 당연합니다! 저는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가 사역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안전상의 이유로 그를 말렸습니다. 그 마을로 가면 곧 죽게 될테니까요. 결국 그는 곧 다른 지역의 선교사로, 그 곳엔 다른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루는 인레이의 저희 집에 삼촌과 그 가족들이 방문했습니다. 저는 미국 순교자의 소리에서 제공한 SUV 차량을 타고 그들을 데리러 갔습니다. 사실 이 차량은 제가 요청한 적이 없는데, 저희 사역을 위해 제공된 차였습니다. 삼촌을 모시러 가자, 삼촌이 놀라며 말했습니다. "내 조카 존! 네가 이렇게 좋은 차를 갖다니!" 저는 대답했습니다. "이게 좋은 차인가요?" 삼촌은 "그럼. 난 오토바이 밖에 없는걸!" 제가 삼촌께 물었지요. "삼촌이 근무하는 정부에선 이런 차도 안 준단 말인가요? 제가 섬기는 하나님은 늘 이렇게 가장 좋은 것으로, 제가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데요?"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신실하십니다. 선교현장에선 매우 심한 핍박과 반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누구다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을 위해 그 누구도 그 대가를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19-20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분을 영접한 각각의 모든 사람이 가서 전하고 제자를 삼아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목사의 역할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입니다. 우리가 가서 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 역할을 하는 이들을 지원함으로써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느 날,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그 순간 우리 안에 참된 기쁨이 허락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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