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C 스프로울
R.C 스프로울.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R.C 스프로울의 기고글인 ‘죄책감은 잠재울 수 있을까? 루터는 그 길을 찾았다’(Can guilt ever be silenced? Luther found a way)를 11월 4일(현지시각) 게재했다.

R.C. 스프로울은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ies)의 설립자이자, 플로리다주 샌퍼드에 위치한 세인트 앤드류스 채플(Saint Andrew's Chapel)의 첫 번째 설교 및 교육 사역 목사, 리포메이션 성경대학(Reformation Bible College)의 초대 총장, 그리고 테이블톡(Tabletalk) 매거진의 편집 주간으로 활동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1515년, 마르틴 루터는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당시 루터는 신학 박사로서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과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시편 강의를 막 마친 그는 바울의 로마서 강의를 시작할 참이었다. 강의를 준비하던 중, 바울이 칭의라는 주제를 꺼내며 쓴 구절을 깊이 살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본래 지니신 의를 가리킨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지만 자신은 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롭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복음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지 루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강의를 준비하는 동안 루터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의 수호성인인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글을 읽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바울은 인간의 의나 인간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다는 뜻에서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 하실 때 그에게 주시는 의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통찰을 이해하는 순간, 영혼에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그때 나는 다시 태어나 열린 문을 지나 낙원에 들어간 듯했다.”

그것은 루터의 삶을 뒤흔든 깊은 체험이었다. 풀리지 않던 죄책감의 무게가 등에서 굴러떨어졌다. 공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 의는 애원해서 얻거나, 빌리거나, 훔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자격을 갖추거나 노력해서 얻을 수도 없었다. 루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의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종교개혁을 돌아보면, 마르틴 루터는 어떤 의미에서 세상 전체에 맞서 섰다(contra mundum). 그가 맞섰던 그 모든 권위에 도전하고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으려면, 믿기 어려울 만큼 반항적이거나 오만하거나,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물론 루터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집이 센 사람이라도 권력자들의 끊임없는 비판 앞에서는 지쳐 물러설 법하다. 그런데도 루터는 왜 물러서지 않았을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기까지 너무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워 왔기에, 누구 앞에서도 그 확신을 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서재에서 겪은 그 체험을 통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확신에 눈을 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을 얻은 뒤 로마서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 가면서, 바울이 이 교리를 얼마나 분명히 가르치는지 확인했다. 그 가르침은 어떤 세상적 이유로도,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의를 굳게 했다.

필자는 마르틴 루터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1세기 이후를 통틀어 가장 정직한 그리스도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과 의로우심, 그리고 그분의 공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의로우신지 깊이 이해할수록, 우리 자신이 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두고 스스로를 속이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흔히 자기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면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상대평가해 주시기를 바란다. 우리보다 더 악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거기서 위안을 얻고, 정작 자신이 어떤 기준으로 심판받을지는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의 기준이 비교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잣대가 아님을 알았다. 그 기준은 하나님 자신의 완전한 의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의는 자기 안에서 나올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그 순간, 종교개혁의 씨앗이 싹텄다.

필자도 우울감에 시달린 때가 있었다. 특히 젊은 시절 신학을 공부하며 신학자의 길을 막 걷기 시작했을 때,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가라앉고 낙심하곤 했다. 그럴 때면 루터의 글을 찾았다.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신학적 통찰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루터에게서 필자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꾸밈없이 인간적인 사람이었고, 이런 문제와 끊임없이 씨름해야 했다.

루터는 사탄과 끝없이 싸운다고 말했다. 사탄이 자신의 기쁨과 평안과 위안을 빼앗으려 거세게 몰아붙이는 것을 그는 ‘안펙퉁’(Anfechtung)이라 불렀다. 그럴 때마다 루터는 복음으로 달려가 그 안에서 안식을 얻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이미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루터의 삶에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겪는 씨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가 그 싸움에서 거둔 승리를 통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찾는 길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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