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하나님은 당신을 구하시기 위해 때로 당신의 길을 멈춰 세우신다"(God must interrupt you to save you)을 11월 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몇 년 전, 필자가 즐겨 읽는 월스트리트저널 칼럼니스트 크리스 프리스윅(Kris Frieswick)은 끊임없는 알림과 방해에 지쳤던 경험을 글로 썼다.

그는 쉴 새 없이 알림을 보내는 새 애플워치를 ‘악마의 팔찌’라고 불렀다. 어느 날 오후 일곱 개의 알림이 한꺼번에 뜨자 결국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너희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그리고는 반항하는 사춘기 아이처럼 고개를 돌려버렸다.

필자도 그 심정을 이해한다. 오랫동안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경영자로 일하며 전화와 이메일, 문자메시지, 메신저 알림, 일정 안내,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끊임없이 대응해야 했다. 업무에서의 방해만 해도 그랬다. 가정과 개인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요구까지 더하면, 하루 종일 자신의 시간과 관심을 빼앗기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방해를 참아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간섭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삶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성경은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바른길로 이끄시려 해도, 사람들은 그 음성을 외면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 65:2).

잠언에서 지혜 역시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잠 1:24–25)이라고 책망한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향해 안타까움을 드러내셨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뜻과 계획을 고집한다. 프리스윅의 항의처럼 “왜 내 삶에 간섭하는가”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멈춰 세우고 방향을 바꾸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고집과 반역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시작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때로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내린 올바른 결정의 결과로 이해한다. 어느 순간 하나님을 찾기로 결심했고, 그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믿음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한때는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성경이 묘사하는 인간의 영적 상태는 단순히 주의가 산만하거나 더 나은 선택이 필요한 정도가 아니다. 바울은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고 말한다(엡 2:1).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로마서 5장 6절에서도 바울은 우리를 ‘연약한’ 존재로 묘사한다. 이 말은 구원에 필요한 힘을 스스로 갖추지 못한 상태를 드러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결심이나 더 많은 정보만이 아니다. 새로운 생명이다.

에베소서는 그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 분명히 밝힌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

죽어 있던 우리를 살리신 분은 하나님이다. 구원의 주도권도, 그 구원을 가능하게 한 긍휼도 하나님께 있다. 우리가 받은 새 생명은 그분의 선물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유효한 부르심

개혁주의 신학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유효한 부르심’과 ‘유효적 은혜’라는 말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부르시는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새롭게 하셔서, 그가 기꺼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하신다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거부하던 사람을 변화시켜 그 부르심에 응답하게 한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났듯,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역사가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을 원하지 않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그분께 나아가기를 원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하는 구원의 흐름도 이러한 확신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흔히 ‘구원의 황금 사슬’이라고 부르는 이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과 부르심, 의롭다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을 연결한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 안에 놓여 있다.

은혜는 우리를 기꺼이 응답하게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유효한 부르심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말씀과 성령으로 사람을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의 은혜와 구원으로 이끄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마음을 밝혀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의지를 새롭게 하신다. 그 결과 사람은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그리스도께 나아간다.

이 설명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응답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믿고 그리스도께 나아가지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변화시키신 분은 하나님이다.

따라서 구원을 자신의 통찰력이나 결단력의 공로로 돌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깨닫게 하시며, 새 생명을 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역시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돌리고, 자신을 변화시키신 하나님께 찬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사해야 할 하나님의 개입

우리는 일상의 방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계획을 지키고 싶고,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으며, 누군가의 간섭 없이 선택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개입까지 같은 방식으로 거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죄와 반역을 깨뜨리는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길에 들어오신다. 자신의 뜻만을 따르던 마음을 돌이키시고, 영적으로 죽어 있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이끄신다.

그 개입은 우리의 삶을 망치는 방해가 아니다. 우리를 살리는 자비다. 구원이 은혜라는 고백은 바로 이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 붙드셨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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