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일보는 한국성과학연구협회에 소속된 이명진·류현모·민성길·송흥섭·문지호·박종명·고두현·임수현 등 의과학자와 의료인들이 집필한 책 ‘PC주의와 의학’(광연재)을 연재합니다.

Ⅰ. 들어가며

이성과 도덕의 상실, 68혁명이 잉태한 의학의 위기

이명진(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공동대표,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전 소장)
저자 중 한 명인 이명진 원장

의학(Medicine)은 인류 역사상 가장 엄격하게 객관적 진실을 추구해 온 학문이다. 생명을 다루는 영역이기에, 진단과 치료의 모든 과정은 철저한 과학적 사실과 임상 데이터에 기반한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 EBM)’을 따라야만 한다.

서구 문명과 근대 과학을 지탱해 온 위대한 두 기둥은 ‘객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이성적 사유와, ‘인간의 생명은 천부적이며 창조 질서 안에서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보편적 도덕률이다. 의사이자 생명윤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임상 현장에서 끊임없이 목도하는 것은, 이 두 기둥이 무너질 때 환자의 생명과 사회 전체가 치명적인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전 세계 의학계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과 ‘젠더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사상적 해일에 직면해 있다. 이 흐름의 기원은 멀리 1968년 프랑스의 68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든 금기를 부수고 낭만적 박애주의를 내세운 68혁명의 여파는 서구 사회의 보편적 질서와 제도를 무너뜨렸고, 평등과 인권의 이름으로 도리어 극심한 혼란을 낳았다.

소수자의 감정을 보호하고 차별을 없애겠다는 감성적이고 상대주의적인 명분은, 이제 진료실의 문턱을 넘어 생물학적 팩트마저 검열하고 통제하려 든다. 객관적 사실(facts)보다 주관적 감정(feelings)을 우위에 두는 PC 이데올로기는 의학의 근본인 ‘이성’을 마비시키며, 우리 사회를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

Ⅱ. 심각한 의료 현장

1. 고삐 풀린 자율성(Unbridled Autonomy)과 미끄러운 경사길

생명을 수호하는 것(Pro-life)이 의사의 숭고한 본질적 소명이다. 히포크라테스선서 이래 의료윤리의 제1원칙은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마라(Primum non nocere)’는 악행금지의 원칙이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현대의 왜곡된 흐름은 대니얼 캘러핸(Daniel Callahan)이 지적했듯 맹목적인 ‘고삐 풀린 자율성’으로 변질되었다. 남에게 당장 물리적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극단적 자기결정권은 도덕과 사회 질서를 뿌리부터 무너뜨리고 있다.

이러한 고삐 풀린 권리 주장은 생명을 경시하는 ‘미끄러운 경사길(Slippery slope)’로 국가를 내몬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책임 없는 방종을 허용한 서구 국가들의 말로는 비참하다. 이혼을 조장하고 간통을 비범죄화하며 가정을 해체한 뒤, 생명을 죽이는 낙태를 여성의 권리라며 앞다투어 합법화했다. 네덜란드, 캐나다, 일부 유럽 국가들은 낙태 허용을 넘어 마약을 합법화하고, 급기야 병들고 나약한 이
들의 고통을 줄여준다는 명목으로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마저 합법적인 제도로 둔갑시켰다.

대한민국 역시 무서운 경사길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인간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는 방치된 반면, 동물의 생명을 보호하는 법안은 쏟아지는 기형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OECD 자살률 부동의 1위라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 최근 조력존엄사라는 미명하에 약자들을 사실상 죽음으로 내모는 법안마저 국회에 등장했다. 독일의 사회학자 가브리엘 쿠비(Gabriele Kuby)의 엄중한 경고처럼, 정치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도덕이 해체되면 사람들은 윤리적 민감도를 상실하고 선을 악이라 부르며 악을 선이라 부르는 야만의 시대에 휩쓸리게 된다.

2. 문화 마르크스주의와 의학 용어의 신전체주의적 검열

PC주의자들은 이 파괴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먼저 ‘언어’를 타락시킨다. 이는 단순한 소수자 배려 운동이 아니다. 언어를 통제하여 인간의 사고 자체를 뜯어고치고, 전통적 가치 체계를 붕괴시키려는 ‘문화 마르크스주의(Cultural Marxism)’의 치밀한 전략이다. 그들은 20세기 공산주의자들이 썼던 선동 방식(propaganda)을 그대로 답습하여 모호하고 기만적인 신조어(newspeak)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의학은 현상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세포 수준의 명백한 진리를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PC는 특정 의제에 부합하지 않으면 의학 용어마저 오염시킨다. ‘어머니(Mother)’라는 거룩한 단어를 ‘출산하는 사람(Birthing person)’으로 강제 변환하고, 사람을 죽이는 ‘의사조력자살(PAS)’을 ‘조력사망’이나 ‘존엄사’로 포장하여 치료자(Healer)인 의사를 합법적 살인자(Killer)로 전락시킨다. 언어의 파괴는 곧 이성적 사고의 파괴이며 진실의 은폐다. 양의 탈을 쓴 전체주의가 진료실을 장악하여 의학적 현실을 검열하고 있다.

3. 젠더주의와 소아청소년을 향한 돌이킬 수 없는 의학적 폭력

현재 의료윤리 측면에서 마주한 가장 끔찍한 위협은 젠더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소위 ‘젠더확인치료(Gender-affirmation therapy)’다. 대한의사협회는 협회 공식 입장인 KMA POLICY를 통해, 젠더불쾌증(Gender dysphoria)은 생물학적 성과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 정체성의 불일치로 괴로움을 겪는 병리적 상태이며, 이를 해결하겠다며 시행되는 사춘기 차단제나 교차 성호르몬 요법, 성전환 수술은 장기적인 의학적 근거가 전혀 입증되지 않은 무책임하고 극도로 위험한 인체 실험에 불과하기에, 젠더불쾌증 소아 및 청소년의 성전환 시술을 제한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성정체성의 일시적 혼란을 겪는 청소년들은 섣부른 의학적 개입이 없다면 성인이 되어 80~88% 내외가 자연스럽게 그 혼란을 극복한다. 그러나 자아 형성이 끝나지 않은 결정적 시기에 호르몬 약물을 투여하는 것은, 아이들을 평생 트랜스젠더의 굴레로 밀어 넣는 최악의 의원성 위해(Iatrogenic harm)를 초래한다.

전 세계 젠더 클리닉이 바이블처럼 떠받드는 세계트랜스젠더건강전문가협회(WPATH)의 진료지침(SOC 8)조차 의학적 전환 치료의 최소 연령 제한을 임의로 삭제하는 비윤리적 개정을 결행했다. 실제로 이들이 제안한 진료지침 자체도 해당 지침의 많은 내용이 과학적 근거가 부실함을 자인하고 있다. 판단 능력이 미성숙한 아동의 건강한 육체를 돌이킬 수 없이 훼손하는 것은 의학의 탈을 쓰고 자행되는 명백한 아동 학대다. (계속)

PC주의와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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