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미 스트리클러 목사
제이미 스트리클러 목사. ©ChatGP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제이미 스트리클러 목사의 기고글인 '천사와 마귀가 등장하는 성경, 우리는 왜 그 존재를 외면하며 읽는가?'(Your Bible is full of angels and demons. Why do we read it as if it isn’t?)를 11월 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신학박사(Th.D.)이자 공인 목회상담사(BCAPC)인 제이미 스트리클러는 미국 콜로라도주 오티스의 루터교 목사로, ‘컴 애즈 유 아 목회돌봄센터’의 수석 상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성경의 초자연적 세계관을 소개하는 팟캐스트 ‘헤비 시올로지(Heavy Theology)’를 진행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아람 왕이 엘리사를 붙잡으려고 군대를 보내 성읍을 포위했을 때, 아침 일찍 일어난 엘리사의 사환은 눈앞의 광경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엘리사는 그 청년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수레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이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 세계가 실재한다는 전제에서 사건을 전한다. 성경 곳곳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성경의 영적 세계를 불편하게 여기듯 읽을 때가 있다. 천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시적 상징으로, 귀신은 고대인들이 질병을 설명하던 문화적 표현으로, 마귀는 인간의 악함을 가리키는 비유로만 이해한다. 도덕적 교훈은 받아들이면서도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적 존재들은 사실상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독법에는 근대적 사고방식의 영향이 있다. 20세기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전기와 현대 의학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이 신약성경의 영들과 귀신에 관한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의 책을 직접 읽지 않았더라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비슷한 전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곤 한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이 실제이며, 성경의 영적 존재들은 상징이나 은유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제가 성경 자체의 관점과 일치하는지는 물어야 한다.

성경이 전제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

성경은 여러 본문에서 영적 존재들을 이야기의 실제 참여자로 묘사한다.

욥기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 앞에 서고, 그들 가운데 고발자인 사탄이 등장한다. 시편 82편은 하나님께서 신들의 모임 가운데 서서 판결하시는 모습을 그린다. 다니엘서에서는 천사가 ‘바사 왕국의 군주’에게 가로막혀 지체되다가 미가엘의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한다(단 10:13).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노래도 주목할 만하다. 8절의 마지막 부분은 본문 전승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또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수효대로’로 전해진다. 후자의 읽기를 따르는 번역은 하나님께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신 일을 하늘의 존재들과 연결해 묘사한다.

이 구절의 세부적인 의미와 다른 본문과의 관계를 두고는 해석이 나뉜다. 그러나 성경에는 민족과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 영적 차원이 있음을 보여주는 본문들이 있으며, 모든 영적 존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아니라는 관점도 드러난다.

그렇다고 성경이 하나님과 악한 세력을 대등한 두 권력으로 보는 이원론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영적 존재들 역시 피조물이다. 창조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며, 다른 모든 존재는 그분의 권위 아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초기 신앙 공동체가 이해한 영적 현실

제2성전기 유대 문헌에서도 이러한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다. 사해문서에는 악한 영으로부터 보호를 구하거나 그들을 물리치기 위한 기도문이 포함돼 있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도 영적 세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유스티누스를 비롯한 이들은 우상숭배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설명하면서 악한 영적 존재들의 활동을 언급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질문은 영적 존재가 실재하는지에만 머물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악한 세력에 맞서 어떤 일을 이루셨으며, 그리스도인은 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핵심이었다.

복음서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한다.

강한 자를 이기시는 더 강한 분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을 받으셨을 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막 3:27).

제자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는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영적 차원을 제거하면 예수님의 사역이 지닌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된다. 예수님은 더 나은 도덕과 사상을 가르치시는 데 그치지 않으셨다. 악한 권세에 사로잡힌 이들을 자유롭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드러내셨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러한 승리와 연결한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교회의 소망은 악한 세력을 부정하거나 인간의 의지만으로 극복하는 데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승리에 있다.

기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성경의 영적 세계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기도의 의미도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은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따르면 기도는 경건한 습관이나 마음의 위안을 넘어선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악에 맞서는 신앙의 실천이다.

동시에 싸움의 대상이 ‘혈과 육’이 아니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영적 전쟁이라는 언어가 다른 사람을 악마화하거나 적대하는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미워하는 대신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악에 저항하도록 부름받았다.

영적 현실을 인정할수록 분별이 필요하다

영적 세계를 믿는다고 모든 질병과 고통을 악한 영의 활동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 4:1)고 권면한다.

참된 분별은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주장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 말씀에 비추어 검토하고, 인간의 신체와 마음에 관한 지식도 존중한다.

비텐베르크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 마르틴 루터는 기도와 함께 합리적인 예방 조치와 이웃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일은 대립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고통받는 성도에게는 기도와 목회적 돌봄이 필요하며, 상황에 따라 의료적 치료와 전문적인 상담도 필요하다. 신실한 목회자는 이 둘을 경쟁시키지 않고 적절한 도움을 받도록 안내해야 한다.

소망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승리다

성경의 영적 세계관은 두려움을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힘만으로 악에 맞서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를 이기시는 더 강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다. 그분이 이루신 승리는 교회가 기도하고 분별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갈 근거다.

엘리사의 사환이 두려워했던 것은 눈앞의 군대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열렸을 때,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보호가 드러났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묻는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 분명히 등장하는 영적 차원을 지워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무분별한 호기심이 아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현실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권위와 승리를 신뢰하는 믿음이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크리스천포스트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