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혁! 대부분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잘 모른다. 물론 일반인들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분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남궁 혁 박사의 족적은 한국의 신학사나, 재무 역사에 큰 일을 감당했던 거목이었다. 남궁 혁 박사는 최초의 신학박사이자, 최초로 평양신학교의 교수가 되신 분이다.
남궁 혁은 1882년 7월 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는 임오군란 때, 경기도 용인으로 피난 가서 3세까지 살았다. 그 후 외조부 임승지(任承旨)가 평양의 감사로 부임할 때, 평양 감영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다시 용인으로 돌아와 한문을 공부해 과거에 등과했다. 그가 살았던 용인이 오늘의 총신대학교 신대원 캠퍼스가 가까이 있다. 1900년 7월, 남궁 혁은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세 소년으로서 인천 세관의 관리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1901년, 전라남도 목포 세관으로 전근한다. 그는 세무 공무원으로 시작했지만, 배재학당에서 배웠던 뛰어난 영어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배재학당 시절, 후일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1907년 한국교회가 평양 대부흥이 시작되던 그해, 남궁 혁은 목포 영흥(永興)학교 교사로 취임한다. 그러면서 남궁 혁은 별도로 영어 강습소를 열어, 영어를 가르칠 때,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金炳魯, 장면의 부친, 기타 한국의 준재들이 남궁 혁 선생에게 영어를 배웠다. 그렇게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마스터 한 뛰어난 인재는 이승만과 남궁 혁 두 사람이었다. 그는 1908년, 서울 연동 교회에서 게일(J. Gale) 박사 주례로 결혼 후, 칠남 이녀를 둔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후일 그의 자녀들은 미국, 일본, 홍콩 등지에서 의사로, 교수로, 과학자로 크게 일했다.
1909년 그는 광주 숭일(崇一) 학교로 전근하고, 1916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1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 후,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양림교회 담임 목사가 된다. 남궁 혁은 그의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1922년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신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한다. 그리고 1923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신학교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Th.M)을 받았다. 그는 또 1925년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박사(Ph. D) 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그동안 스코틀랜드에서 모였던 ‘세계 주일학교 세계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한다. 그는 193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1회 총회장이 된다.
그는 1925년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가 된다. 그는 신약학자로서 여름이면 지리산에 들어가서 신약성경 개역에 전력을 쏟았다. 그리고 1928년부터는 평양신학교 잡지인 「神學指南」의 편집주간이 되어 폐간할 때까지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을 지켰다. 그는 남장로 교회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철저한 칼빈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神學과 信仰을 함께 보면서 보수주의적이고 복음적인 필치로 평양 신학을 이끌어갔다.
남궁 혁은 자신의 자라난 배경도 그렇고, 학문하는 배경도 넓어서인지, 후배들을 끔찍이도 사랑했다. 그는 모두를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남궁 혁은 그의 후배인 박형룡을 끔찍이 사랑했고, 그의 결혼 주례를 섰고, 박형룡을 평양신학교 교수 자리에 올려놓았다. 박형룡 박사가 아직 교수 자리에 오르기 전에 「神學指南」 편집을 돕고 있는 분들 가운데는 박형룡, 김재준, 강흥수, 김창덕, 이원모 등이 있었다.
1939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던 평양신학교는 폐교되고, 남궁 혁 박사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그러나 1939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상해에 머물면서 ‘신학 사전’ 편집과 ‘神學指南’ 교열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당시 박형룡, 박윤선 박사는 만주 봉천신학교를 세우고,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망명 평양신학교인 셈이다. 한편 남궁 혁 박사는 해방이 되자, 상해 거류민 단장에 피선되어 1946년 피난민을 인솔하고 귀국한다. 그리고 미 군청 당국의 간청으로 적산 관세청에 취임하게 된다. 또 1947년에는 재무부 세관 국장에 취임했으나, 사람들의 부패를 그대로 볼 수 없어, 사임한다. 그는 1948년 대한기독교연합회 총무로 취임했고, 1949년 11월,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동남아 기독교 반공 대회’에 참석해 부회장이 된다.
남궁 혁 박사는 한국 근대사에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 말에 애국자의 가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평양의 감사였고, 그는 평양 감영에서 자란 귀공자였다. 그러나 배재학당에서 이승만과 함께 영어 공부에 올인했던 신학박사요, 영어 박사였다. 이승만이 한성 감옥에서 6년 가까이 옥고를 견디고 나와 미국으로 가기 전에, 이승만은 그의 배재학당 동지였던 남궁 혁의 집에서 몸을 추스르고 보양하면서 미국으로 갈 꿈을 키웠다. 그렇게 배재학당에서 영어로 꿈을 키웠던 두 사람, 한 분은 평양신학교 교수이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출신 남궁 혁 박사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를 부르신 주님께서 남궁 혁을 불러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세우게 하셨다. 그리고 또 한 분은 평생 독립운동에 몸 바치다 자유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박사이다.
두 분 모두 배재학당과 프린스턴 출신이요, 영어의 도사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오늘의 한국과 한국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궁 혁 박사는 6.25 때 월남하지 못하고 공산당에게 순교당했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성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