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월리스 박사
에릭 월리스 박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에릭 윌리스 박사의 기고글은 '사회주의는 연민이 아니다, 시기심을 제도화한 것이다'(Socialism isn't compassion. It's institutionalized envy)를 8월 2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에릭 월리스 박사는 저자이자 선구적인 학자 및 강연자이며 신앙에 기반한 보수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인물이다. 탄탄한 학문적 배경과 성경적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성경적 세계관과 충돌하는 문화적·정치적 담론에 도전하는 주요 목소리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들려는 사회주의의 시도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고유한 재능과 능력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개인으로서뿐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그러나 성경이 그리는 공동체는 모든 사람을 동일한 역할과 결과로 묶어놓는 집단과는 다르다. 인간을 국가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그려 넣을 수 있는 ‘백지’로 보는 대신, 서로 다른 역할과 은사를 가진 ‘몸의 지체’로 바라본다.

바울은 이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고전 12:14, 17)라고 했다. 손은 발이 아니며, 몸이 온전할 수 있는 이유는 각 지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악기와 다양한 연주 기술이 함께할 때 비로소 풍성한 음악이 만들어진다. 모든 것을 똑같게 만드는 것은 조화를 이루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조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차이를 지워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사회주의가 빠지기 쉬운 오류 가운데 하나는 결과의 차이를 곧바로 불의로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섯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은 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바라보며, 그 차이 자체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문제로 규정한다. 그러나 결과 뒤에는 서로 다른 선택과 수고, 위험 부담, 절제, 훈련, 시간과 같은 다양한 요소가 존재한다. 추수한 열매만 비교하면서 씨를 뿌리고 가꾸는 과정의 차이를 외면한다면, 공정성에 대한 판단 역시 왜곡될 수 있다.

달란트 비유가 보여주는 ‘다름’

달란트 비유에서도 주인은 종들에게 처음부터 동일한 양을 맡기지 않는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다른 사람에게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 한 달란트를 맡긴다(마 25:15). 출발점부터 차이가 있었고, 그것은 주인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비유의 초점은 누가 더 많이 받았는지를 문제 삼는 데 있지 않다.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있다. 받은 것을 활용하고 책임 있게 일한 종들은 칭찬받았고, 두려움 때문에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땅에 묻어버린 종은 책망받았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문제는 ‘차이’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책임 있게 사용하는 청지기적 태도가 중요하다.

필자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경제적 차이를 곧바로 도덕적 불의로 규정하는 사고방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인간의 존엄성은 동일하지만, 은사와 능력, 책임과 결과가 언제나 동일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탐심을 정의로 포장할 위험

십계명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고 명령한다. 탐심은 단순한 경제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관한 문제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바라보며 분노하고, 그 차이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태도는 정의에 대한 관심과 쉽게 뒤섞일 수 있다.

물론 모든 재분배 정책이나 사회복지 정책을 탐심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사회는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고, 취약한 이들을 돕고, 불공정한 제도를 바로잡을 책임이 있다. 성경 역시 가난한 사람과 약자를 돌보는 일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러나 필자가 우려하는 지점은 다른 사람의 소유와 성취에 대한 시기와 원한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때다. 타인의 성공 자체를 의심하고, 결과의 차이를 없애는 것을 정의의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면 사회는 탐심을 치유하기보다 제도적으로 증폭시킬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기심을 공공의 미덕처럼 포장하는 체제는 탐심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도화할 위험을 안고 있다.

동등한 존엄성과 동일한 역할은 다르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됐기에 동일한 존엄성을 가진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동일한 존엄성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역할과 능력,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말한다(고전 12:11). 은사는 서로 다르지만 그 차이가 공동체를 분열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섬기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교사는 가르치는 은사로 다른 사람을 돕고, 건축가는 자신의 기술로 삶의 공간을 만들며, 상인은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한다. 어느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능력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필자가 보기에 바로 이것이 차이가 가진 중요한 의미다. 다름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만드는 조건이 될 수 있다.

경제적 자유와 청지기 정신

필자는 경제적 자유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재능과 능력을 개발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할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각자에게 맡겨진 은사를 활용할 공간을 열어준다.

자유시장경제가 완전한 체제라는 뜻은 아니다. 시장 역시 탐욕과 착취, 독점과 부패로 왜곡될 수 있다. 그렇기에 법과 제도, 도덕적 책임이 필요하다. 경제적 자유가 인간의 죄성을 자동으로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앙 권력이 사람들의 역할과 생산, 분배를 지나치게 통제할 경우 개인의 창의성과 책임,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필자가 사회주의적 경제 모델을 경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차이를 위에서 조정하려는 시도가 결과적으로 각 사람에게 주어진 능력과 책임을 발휘할 공간까지 축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청지기 정신은 단순히 많이 가진 사람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이 받은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을 요구한다.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섬겨야 하고,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재물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며, 재능 있는 사람은 그 능력을 통해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경제관에서 자유와 책임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차이는 반드시 불의인가

필자가 보기에 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단순히 어떤 경제 시스템이 더 많은 생산량을 만들어내느냐에 있지 않다. 인간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더 깊은 인간관의 문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재능과 능력, 기회와 책임을 허락하셨다는 사실 자체를 결함으로 바라본다면, 국가가 그 차이를 끊임없이 교정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는 모든 차이가 곧 불의라는 전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실제 사회에는 불의한 차별과 착취가 존재한다. 출발선의 심각한 불평등이나 권력 남용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기독교인은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며 불공정한 제도를 바로잡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결과의 차이를 제거하는 것이 정의와 동일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다른 은사와 책임을 인정하면서, 그 능력을 자기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청지기적 자원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사이의 ‘다름’은 언제나 치유해야 할 상처가 아니다. 때로 그 차이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섭리적 방식일 수 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고, 재능 있는 자가 다른 사람을 풍요롭게 하며, 누구도 혼자서 온전히 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자신에게 맡겨진 은사를 책임 있게 발휘할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반드시 교정해야 할 불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 자유를 이웃을 위한 책임과 연결시킬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충실히 사용하는 청지기적 삶의 한 모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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