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의 기고글인 '진정한 위로를 원한다면, 주님 앞에서 괜찮은 척하지 말라’(Don't put on a happy face: Be honest with the Lord if you want real comfort)를 8월 1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주콜로토 박사는 전직 목사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며 35년 동안 병원, 중독 치료 센터, 외래 진료소 및 개인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치즈버거와 초콜릿 셰이크, 맛있는 파스타 한 그릇. 이런 음식들은 브로콜리와 밥에는 없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바로 우리의 ‘컴포트 푸드(comfort food)’, 곧 위안을 주는 음식의 목록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음식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했던 식사, 할머니의 따뜻한 손맛, 혹은 단순히 미각을 자극하는 짜릿함처럼 그 음식이 품고 있는 기억과 의미에 관한 것이다.
위안(comfort)은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베풀거나 스스로 위안을 얻기 위해 반드시 종교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신론자도 서로를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고, 종교적 틀이 전혀 없는 사람도 불타는 건물에 뛰어들어 타인을 구하거나, 모르는 아이를 입양하고, 아무런 대가 없이 죽어가는 사람 곁을 지킬 수 있다. 위안은 특정 종교인에게만 허락된 전유물이 아니다. 인간은 본래 서로에게 위안을 주고받는 존재다.
심리학자로서 필자는 위안이 지닌 이 신비로운 힘과, 우리가 얼마나 본능적으로 위안을 구하고 또 베풀고 싶어 하는지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삶에 슬픔과 어려움이 찾아올 때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이 쓴 말씀이 늘 마음에 떠오른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7).
이 말씀을 읽다 보면 필자는 종종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지금 느끼는 이 위안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시는 보편적인 위안일까.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무언가 다른 차원의 위안일까.
단순히 ‘위안을 느낀다’는 감각만으로는 그 근원을 판단하기 어렵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세로토닌과 같은 생물학적 반응 때문인지, 사회적 유대감이 만들어낸 안정감인지, 혹은 자신을 성공적으로 속인 결과인지는 느낌만으로 구별할 수 없다. 도둑도 친구가 자신을 숨겨주면 안도감을 느낄 수 있고, 불륜 관계에 빠진 사람도 배우자보다 다른 사람에게서 더 큰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평안하다’는 감각 자체가 그 너머에 있는 어떤 초월적 존재를 자동으로 증명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더라도, 그 위안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설명 가능한 심리적·사회적 작용인지를 감각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기독교 신학은 이 질문에 ‘일반은총(common grace)’이라는 개념으로 답해 왔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마 5:45)고 말씀하셨다. 바울 역시 루스드라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고 결실기를 주시며 음식과 기쁨으로 사람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셨다고 말했다(행 14:17).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로의 흔적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위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놀랍게도 고난 자체가 위로가 전달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고난을 피해 오는 위로가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는 위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 위로가 다시 그들에게 흘러간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고난은 위로가 피해 가야 하는 장애물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이어주는 통로가 된다.
마치 한 몸이 하나의 신경계를 공유하는 것과 비슷하다. 한 지체의 고통이 다른 지체에 전달되듯, 위로 역시 공동체 안에서 흘러간다.
바울은 이어 자신이 아시아에서 겪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일반적인 의미에서 위안은 흔히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연결된다. 위험이 지나가고, 필요가 채워지고, 몸과 마음이 비로소 경계 태세를 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상황이 해결됐기 때문에 위로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고, 살 소망마저 끊어질 정도였다고 고백한다.
그가 말하는 위로는 “결국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낙관론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최악의 결과 너머에서 작동하는 한 가지 선언에 삶을 건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소망의 근거는 애초부터 위기가 무사히 끝날 것이라는 데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위기가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돼야만 소망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집착’과 기독교적 위로는 무엇이 다른가
주의 깊은 독자라면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것이 그저 기독교라는 이름만 붙였을 뿐, 현대 심리학이나 명상 전통에서 말하는 ‘마음챙김(mindfulness)’ 또는 ‘비집착(non-attachment)’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외부 상황이 흔들 수 없는 곳으로 마음의 중심을 옮겨 평안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비집착은 대체로 결과와 자신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쁜 결과가 생겨도 그것에 지나치게 매이지 않도록 훈련하고,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내적 평정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축소하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사형 선고”, “살 소망까지 끊어진 상태”라고 말한다. 위협이 실제보다 작았다고 자신을 설득하지도 않고,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고난의 실체를 철저히 인정한다. 그리고 그다음에 소망을 둔다. 최악의 상황이 별것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최악의 상황조차 마지막이 아니라는 믿음에 자신의 삶을 맡긴다.
이것은 단순한 기분의 차이가 아니라 구조적인 차이다. 비집착은 결과에 덜 흔들리도록 자신을 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반면 바울의 위로는 지금 벌어지는 일의 무게를 온전히 인정하면서도, 그보다 더 큰 현실인 부활을 붙들라고 요구한다.
고린도후서가 말하는 위로는 고난과 죽음의 공포를 정직하게 직면하게 한다. 현실을 합리화하거나 적당히 미화하는 방식으로 빠져나갈 길을 제공하지 않는다.
현실을 부정하는 위로는 위로가 아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일이 국가적 관행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았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값싼 은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회개와 제자도의 대가 없이 용서를 말하고, 진실을 직면하지 않은 채 위안을 얻으려는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바울 역시 비슷한 선을 긋는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중요한 것은 누가 더 편안함을 느끼느냐가 아니다. 그 위로가 현실을 부정하도록 요구하는가, 아니면 더 정직하게 바라보도록 만드는가가 중요하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은 바울처럼 사형 선고를 눈앞에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주택담보대출금과 아픈 아이, 무너져가는 결혼생활, 노력에 비해 보상이 턱없이 부족한 직장, 돌봄과 생계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하루처럼 작지만 끈질긴 문제와 씨름하고 있을 수 있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바로 이런 경험과도 연결되는 단어를 사용한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 ‘환난’으로 번역되는 헬라어는 압박과 짓눌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압박받는 느낌이다.
이는 어쩌면 ‘고난’이라는 거창한 단어보다 평범한 화요일을 견뎌내는 워킹맘과 워킹대디의 일상을 더 정확하게 묘사할지도 모른다.
바울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때 사용한 단어와 우리의 일상을 짓누르는 압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우리의 평범한 고통이 ‘진짜 고난’으로 인정받기 위해 더 심각한 비극과 경쟁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화요일에도 필요한 부활의 소망
바울의 주장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인 죽음조차 최종적인 마침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진리다. 그리고 평범한 화요일의 압박을 견뎌내는 부모의 작은 위로 역시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 소망에서 힘을 얻는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인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역사적·신학적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문제를 잠시 접어두더라도 한 가지는 분명히 볼 수 있다.
기독교적 위로는 단순히 기분을 달래기 위한 심리적 속임수와는 구조가 다르다는 점이다. 그 차이는 이 위로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지’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헛된 희망을 유지하려면 대개 지름길이 필요하다. 상황이 실제보다 나쁘지 않다고 자신에게 거짓말하거나,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위로에는 그런 지름길이 없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고단한 부모는 “오늘은 잔인할 만큼 힘들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괜찮았다”거나 “별일 아니었다”고 포장할 필요가 없다.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고 자신을 세뇌할 필요도 없다. 바울 역시 자신의 상황 앞에서 깊이 절망했고, 살아남기를 간절히 원했다.
기독교적 위로가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철저히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최악의 상황이 영원히 최악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소망은 부활이라는 주장 위에 서 있다.
이것이 사형 선고를 앞둔 바울과 고단한 화요일을 견뎌내는 평범한 부모에게 동시에 주어지는 기독교적 위로다. 기분을 잠시 돌려놓거나 “다 괜찮다”고 자신을 속이게 만드는 위안이 아니다.
그날 하루가 순조롭게 흘러갔는지보다 훨씬 더 견고한 것, 곧 죽음조차 마지막 말이 될 수 없다는 소망 위에 세워진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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