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는 함정을 피하는 법"(Avoiding the 'not a real Christian' trap)을 8월 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는 공공연하게 반미 어젠다를 드러내는 자칭 공산주의자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최근의 선거 흐름을 지켜보며, 언젠가는 상식이 다시 힘을 얻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왔다. “이번이 마지막이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흐름은 좀처럼 멈추지 않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미시간주 연방 상원의원 민주당 경선에서 진보 성향 유권자가 밀집한 지역과 대학가에서 압도적인 표차를 기록하며 후보 자리를 차지한 압둘 엘사예드(Abdul El-Sayed)의 사례가 그렇다.
심지어 공공 식료품점 운영과 17%의 주 소득세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위스콘신 주지사 후보이자 공개적인 민주사회주의자인 프란체스카 홍(Francesca Hong)조차 데이비드 크롤리(David Crowley) 밀워키 카운티 행정관에게 불과 약 4,000표 차이로 패했다. 다행히 올해 위스콘신에는 추수감사절이 일찍 찾아온 셈이지만, 그 격차는 안심하기에는 너무 아슬아슬했다.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인 페기 누넌(Peggy Noonan) 역시 필자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에 기고한 글에서 오늘날의 문화와 사회주의의 급부상을 진단하며, 이것이 곧 사라질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는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누넌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회주의의 실패가 역사적으로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이들 중 많은 사람은 그 역사 자체를 모르거나 관심을 두지 않으며 “우리가 하는 버전은 다를 것”이라고 믿는다고 지적했다.
그렇다. 늘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현상은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한다”(고후 4:4)는 성경의 표현과 더불어, 탈진실(post-truth)적 사고가 오늘날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처럼 보인다. 누넌은 이 현상을 두고 사회주의는 하나의 신념 체계이기 때문에 감정을 자극하는 반면, 자본주의는 이성과 경험적 판단에 더 기대기 때문에 감정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또 필자가 사회주의의 확산 과정에서 발견해 온 영적인 요소와 맞닿는 대목도 짚는다. 종교가 쇠퇴하면 정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초월적 확신이 약해질수록 정치 운동이 더 과격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필자는 한 가지를 더 덧붙이고 싶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단순한 경제 정책이나 행정 모델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경쟁하는 신념 체계에 거의 종교와 같은 강도의 충성과 헌신을 요구해 왔다는 점이다.
공산주의는 하나의 ‘세속 종교’인가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는 에세이 『공산주의라는 종교(The Religion of Communism)』에서 공산주의가 열렬한 신앙과 교리, 의식, 이단에 대한 처벌, 사명감 등 종교와 유사한 특성을 띤다고 분석했다. 다만 그 체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리에 국가와 혁명 이념이 들어선다는 것이다.
니버는 이를 설명하며 한 러시아 영화의 장면을 예로 든다. 비와 양식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농민들이 소련 당국을 찾아가 필요한 것을 제공받은 뒤 국가를 마치 종교적 경외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장면이다. 인간의 궁극적 의존 대상이 하나님에서 국가로 옮겨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공산주의가 지닌 지나치게 단순한 윤리 구조에도 주목했다. 노동계급에 대한 충성을 절대적인 선으로 규정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최종 목표로 삼을 경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폭력과 기만까지도 정당화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목적 중심적 사고방식은 오늘날 일부 급진적 정치운동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나는 문제다.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기독교와 종교 전반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혁명가이자 소련 정치가였던 니콜라이 부하린(Nikolai Bukharin)은 종교와 공산주의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공산주의 혁명에 헌신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고의 뿌리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크스에게 종교 비판은 경제 이론의 부수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인간과 도덕, 역사와 궁극적 실재를 바라보는 그의 세계관과 깊이 맞닿아 있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여기에서 단순한 무신론을 넘어 강한 반기독교적 정서까지 읽어낸다.
마귀와 칼 마르크스
폴 켄고르(Paul Kengor)는 『마귀와 칼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죽음, 기만, 그리고 침투의 대장정(The Devil and Karl Marx: Communism’s Long March of Death, Deception, and Infiltration)』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단순히 실패한 경제이론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형태를 바꾸며 살아남아 온 혁명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세계관이라고 해석한다.
켄고르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성장 배경과 지적 영향, 개인적인 글과 시,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 표현, 악마적이고 지옥적인 이미지에 대한 그의 관심 등을 제시한다. 특히 마르크스의 젊은 시절 작품 가운데는 하나님과 천국, 지옥을 둘러싼 어둡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바라본 시선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는 「라인 옵저버의 공산주의(The Communism of the Rhine Observer)」에서 기독교의 사회적 원칙을 비겁함과 자기 비하, 굴복과 겸손을 조장하는 것으로 묘사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여기에는 프랑스어 ‘카나유(canaille)’와 같은 모욕적인 표현까지 등장한다.
이러한 기록은 적어도 마르크스주의가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사상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무신론과 종교 비판은 마르크스의 혁명적 세계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기독교는 인간과 도덕, 궁극적 실재에 관해 그와 상당히 다른 전제를 갖고 있었다.
켄고르는 또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노동자와 공장만을 조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지식인과 학계, 예술가와 언론, 영화 산업 등 문화 형성의 핵심 영역으로 확장됐다고 지적한다. 이들 영역이 사회 변혁의 사상을 전달하는 통로가 됐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과거 예수회 신부였던 말라기 마틴(Malachi Martin)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악이 언제나 노골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동시대의 유행과 관심사를 따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교묘하게 움직인다고 경고했다.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기준
예수님은 “각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눅 6:44)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공산주의가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 흑서(The Black Book of Communism)』는 20세기 공산주의 정권 아래에서 발생한 정치적 탄압과 기근, 강제수용, 처형 등으로 인한 희생 규모를 집계하려 했다. 이 책은 소련과 중국, 베트남, 북한, 캄보디아, 동유럽 등을 합쳐 약 1억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추산했다.
정확한 숫자와 산정 방식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 캄보디아를 비롯한 여러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엄청난 규모의 정치적 폭력과 인권 침해가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필자는 여기에서 요한복음 10장 10절의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는 말씀을 떠올린다. 역사 속 공산주의 체제에서 나타난 파괴적 결과를 생각할 때, 그 열매를 단순한 정책 실패 정도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동시에 종교가 전쟁과 죽음의 주된 원인이라는 주장이 반복되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20세기를 돌아보면 노골적인 무신론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정권들 역시 엄청난 규모의 폭력과 억압을 자행했다. 인간의 폭력성을 설명하는 데 종교 하나만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다.
문제는 ‘잘못된 적용’에만 있었는가
역사와 켄고르의 연구가 제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스탈린과 레닌, 마오쩌둥 같은 지도자들이 본래 선량했던 마르크스주의 이상을 단순히 왜곡한 것인지 여부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에는 혁명적 계급투쟁과 사유재산에 대한 근본적 비판, 종교에 대한 적대, 기존 사회제도의 전복이라는 요소가 이미 존재했다. 이런 사상이 국가 권력과 결합했을 때 강압과 탄압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애초부터 내재돼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TV 시리즈 <듄의 아이들(Children of Dune)>에 등장하는 한 대사는 이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약할 때는 상대의 원칙을 내세워 자유를 요구하지만, 강해진 뒤에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상대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내용이다. 관용과 자유의 언어를 사용해 권력을 얻은 뒤, 정작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그 자유를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도 보장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새로운 민주사회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무엇을 근거로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단지 그들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인가.
마르크스주의가 새롭게 등장할 때마다 따라붙는 약속은 대체로 비슷했다. 이름은 바뀌고 수사는 더 부드러워지며, 혁명은 새로운 세대가 받아들이기 좋은 언어로 다시 포장된다. 과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대신 오늘날에는 형평성과 해방, 체제 변혁 같은 표현이 사용된다.
물론 모든 현대의 사회민주주의나 민주사회주의 정책을 20세기 전체주의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상의 계보와 권력관, 인간관, 종교관에 대한 검토를 중단해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명칭이 아니라 그 사상이 실제로 인간의 자유와 양심, 종교와 재산권, 제도적 견제 장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는 강압과 종교 탄압, 제도 파괴, 극단적인 계급투쟁, 막대한 인명 피해가 특정 공산주의 체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약속만으로 그 역사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
필자는 마귀가 인간을 속이기 위해 언제나 완전히 새로운 거짓말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우 오래된 거짓말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포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포장지가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이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